지난해 8월 5일 개정된 '입양특례법'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아동 유기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고, 예민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이를 아파했다. 국회에서도 시민·사회에서도 염려하는 분들이 나타났고, 이분들의 노력으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발의되고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개정안의 핵심은 세 가지다. 하나는 청소년 미혼모(부)들이 출생 신고를 두려워해서 아이를 유기하고 있으니, 입양 기관의 장이 이 아동들을 짐짓 기아로 간주하고 대신 가족관계등록을 창설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소년 미혼모들의 경우 7일간의 입양숙려제 적용을 면해주자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장애 아동의 경우는 5개월간의 국내 입양 우선 추진제를 적용하지 말고 의뢰 즉시 해외 입양 알선 절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입양을 통해 유기되는 아동을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입양의 문턱을 낮추어서 아동 유기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개정안이다.
이날의 공청회를 지켜보면서 개정안에 대한 격렬한 찬반 논쟁의 와중에도 아동의 생명 문제를 우리 사회에 하나의 의제로서 제기한 개정 주장 측의 노고에 대한 깊은 공감과 존경이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을 깊이 했다. 이분들의 의제 설정 자체가 없었다면 공청회도 찬반 논의도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고 비록 다른 해법이나 대안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이만한 열심을 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날의 논쟁은 시간 제한으로 인해 더 깊고 심층적인 논의까지 다가가진 못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생명'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아주 미미하지만 터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개정 측은 '개별자로서 생명에 관한 책임과 사랑에 기초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유지 측은 '생명 친화적 사회 구성을 통한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인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 생명을 길 위에 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 어떤 인권도 생명보다 앞설 수는 없다. 이 생명을 구원하는 길은 입양의 문턱을 낮추어서 이 생명들이 입양이라는 제도 안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전자의 주장이다.
반면에 '아동의 생명이 입양을 통해서 금방 보기에는 건짐을 받은 듯이 보이지만, 입양 후 아동이 겪는 고통 역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입양인들의 경우 소위 정상가정에서 자란 이들에 비해 자살, 마약 중독, 우울증, 중범죄 연루 등에서 현저하게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고, 가정 형성과 자녀 출산 등에 있어 현저하게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는 결과에 비추어 볼 때, 한 사람의 생명을 출산이라고 하는 시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생명을 더 통전적이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후자의 주장이었다.
결국, 논란은 유기로 인해 위기에 처하고 있는 생명의 문제를 입양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의 문제로 수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접점을 찾는 일은 쉬워 보이지 않았던 공청회였다. 긴급한 해결책으로서 입양의 문턱을 낮추자는 주장이 입양의 문턱이 낮았을 때 입양으로 인해 그 삶이 훼손되고 곤경을 겪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맞부딪히면서, 결국 긴급이란 언사에 어울릴 만큼 긴급한 해결책을 도출해내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입양을 해답으로 전제한 해결책의 모색을 포기하고 전면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내어 놓고 합의에 이르는 것이 오히려 아동의 생명에 대한 긴급한 대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 살리기의 위급성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생명의 위기와 사회적 죽음을 배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입양을 통한 해결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생명 친화적 사회로 통합적으로 가꾸어 내는 일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 더 바람직한 방향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장회익 명예교수는 '온생명'을 얘기한 바 있다. 땅과 하늘, 흙과 물과 불과 바람, 풀과 나무와 짐승들 그리고 인간들이 어우러진 온생명의 숨을 개별자로서 생명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별자로서 생명을 보듬어 가꾸는 일만큼이나 온생명에 대한 존중과 섬김 또한 그만큼 중요할 뿐 아니라, 생명 경외의 더 본질적인 길임을 깨우쳐 주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를 생명 친화적 사회로 가꾸어서 개별자로서 생명이 위기에 처하지 않도록 하는 일 역시 그 긴급성이 뒤떨어진다고 말하거나 그 선후를 가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잘못된 접근인지도 모른다.
광주학살로부터 시작되고 삼청교육대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반생명적이고 폭압적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던 1980년대에 아동의 해외 입양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그 정점을 찍은 사실에 비추어 보면, 결국 입양의 본질이 거대 담론의 차원에서는 반생명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점이 지금 우리에게 입양의 문턱을 낮추자는 그 주장이 아무리 선의에 기초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 전체의 반생명성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입양을 통해서 아동 유기의 문제가 일거에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면, 우리 사회가 반생명적 사회의 거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거에 망각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지금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아동 양육 시스템을 구축해가야 할 것인지를 묻는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입양 아동의 90퍼센트가 미혼모(부) 가정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면서, 그들이 자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와 국회가 힘껏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미혼모와 그 자녀들이 우리 사회의 반생명적 편견으로 고통당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시민·사회는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아동의 출산 사실을 기록하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을 생각하고 가족관계등록 등에 관한 법을 손질해서 미혼모 당사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동시에, 아동의 출생의 기원에 대해서 알 권리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국가의 공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미혼모 문제의 뿌리는 오히려 미혼모 자신에게 있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 문화에 오히려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이는 바, 아동의 출생 등록을 미혼모에게만 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미혼부 혹은 혼외부들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아동의 출산 사실을 등재토록 하고, 나아가 양육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을 지도록 강구해야 할 것이다.
베이비박스의 아동 유기와 입양 기관의 입양 의뢰가 친생모의 품으로부터 아동을 결별시키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서 임신·출산 여성 긴급 지원 체계를 만들어서, 입양을 전제하지 않은, 그런 점에서 결별이 아닌 양육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임신과 출산의 위기에 내몰린 여성들의 최초 상담을 사실상 입양 기관이 하고 있는 현실을 문제적으로 바라보면서 임신·출산 여성 최초 상담에서 입양 기관들로 하여금 손을 떼게 해서 2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국가나 시민·사회의 최초 상담의 결과로 입양 의뢰되는 아동들만 넘겨받아 입양을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언론도 아동 유기에 대한 선정적이고 부풀리는 보도 혹은 이 땅의 아동 양육 시스템에 대한 성찰이 결핍된 보도의 관행에 대해서 숙고하고, 이 땅의 재생산 체계의 생명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고양시키는 차원에서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입양을 자명한 해결책으로 바라보는 성찰이 결핍된 중복 보도나, 입양을 못 가는 모든 아동이 유기되거나 비밀 입양될 것이라고 하는 근거 없는 보도의 천박성을 스스로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입양 아동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무슨 국가적 재난인 양 부산스러워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자성해야 한다.
▲ 지난 2009년 7월 1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재)중앙입양정보원 개원식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TRACK)' 소속 해외 입양인들이 입양정보원 설립 과정에서 해외 입양인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반발하며 자신들의 입양 번호가 적힌 마스크를 쓰고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아동이 입양을 못 가면 시설에 남게 된다는 담론의 재생산에 대해서도 더 성찰적이 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경우 2세 미만의 영아들이 입양을 못 가서 시설로 넘어간 아동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통계는 보지 못했다. 입양 기관에 의뢰되었다가 시설로 넘어간 아동에 대한 통계 없이, 입양을 못 가면 시설에 남게 된다는 목소리를 거듭 듣는 일은 좀 민망하다. 시설 아동들의 대부분은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연장아들이 가족 해체의 결과로 시설로 입소하는 경우인 것으로 보이는데, 입양과 시설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입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소리를 높이는 일은 얼핏 입양의 낭만에 지나치게 젖어 있는 발언처럼 보인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아동 복지 체계를 어떻게 재구성하면 근 2만 명에 달하는 경악할 만한 숫자의 아동 양육 시설 아동을 원가정에서 보호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편집자 : 보건복지부는 2010년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부모의 사정으로 인해 각종 아동 양육 시설에서 자라는 아동이 약 2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시설 아동의 문제를 입양으로 풀 수 있다는 낭만과 환상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2만 명에 가까운 시설 아동 중 실제로 입양된 아동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물론 연장아 입양을 통해서 시설 아동을 가정으로 입양한 분들의 노고와 사랑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큰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바이지만, 한 사회의 시스템으로서 또 한 사회의 아동 양육 체계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사회의 사회적 생명을 더 풍성하게 가꾸는 일이라는 점, 혹은 생명 친화적 사회 구성의 지름길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별자로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만큼이나, 우리 사회의 사회적 생명, 혹은 생명 친화적 사회 구성에 대한 추구는 어느 것이 우선이냐를 논할 사안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할 일이고, 나아가 생명 친화적 사회 구성이 개별 생명의 위기를 총체적으로 감경시키는 길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이번 공청회가 개정 측이든 유지 측이든 선한 의지의 발출인 바, 이 두 에너지의 충돌로 그 에너지를 소멸시키고 말 일이 아니라 60년 한국 사회의 아동 양육 시스템을 생명 친화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너지가 되도록 지혜를 모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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