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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여, 한국 민주화의 성공과 좌절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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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여, 한국 민주화의 성공과 좌절을 잊지 마라"

"민주주의-신자유주의 공존 거부해야…민주화는 목표 아니라 과정"

무바라크의 30년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이집트 혁명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권력을 넘겨받은 군부와 민주화 운동 세력의 힘겨루기 속에서 결론이 날 것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가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1952년 이후 60년간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뿌리를 내린 군부의 힘이 우세할 것이라는 전망이 다소 많다. 그러나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중동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이집트를 잃어서는 안 되는 미국의 구상도 중요한 변수다. 오바마 미 행정부는 전세계 민중봉기와 정치 변혁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면서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칠레, 동유럽 모델 중 어떤 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것인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인도네시아와 한국 모델을 선호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 칼럼에서 "한 나라의 정치적 장래를 다른 나라의 관리가 걱정해준다는 것도 쓰라린 일이지만, 최근 3년 동안 민주주의의 실질적 후퇴를 거듭하는 한국이 모범 사례의 하나로 거론된다는 것도 괴로운 아이러니"라고 논평했다. (☞바로가기)

이같은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인 학자 허버트 빅스가 한국의 현대사를 돌아보며 이집트의 민주화 앞에 놓인 장애물과 가능성을 짚어보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다.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칼럼을 게재하는 웹사이트 <제팬포커스>에 지난 15일 실린 이 글에서 허버트 빅스는 한국의 사례로 볼 때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임을 이집트의 민주화 세력이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허버트 빅스가 '과정으로서의 민주화'를 강조한 것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는 동시에 재벌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가 확립된 한국의 민중들이 겪고 있는 좌절과 고통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사례는 다당제 민주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극단적인 경제적 착취, 반민중적 정책, 허울뿐인 자유선거와 같이 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아프게 지적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도 두 나라를 비교하는 작업을 의미 있게 한다. 미국 변수에 대한 허버트 빅스의 결론은 이집트가 한국보다 비교적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한국 역시 주한미군의 존재가 진정한 변화를 더디게 하는 하나의 요소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팽창으로 인해 한국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고 그는 분석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안보적 이해관계가 걸린 나라이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거의 없다는 게 허버트 빅스의 판단이다.

그가 말하는 '운신의 폭'이란 국민 다수의 이익과 요구에 맞게 대외관계를 결정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허버트 빅스의 분석으로 볼 때, 이명박 정부의 대미 편향 외교는 한국에 주어진 외교적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한국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이집트처럼 전락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허버트 빅스의 글은 이집트의 앞날을 전망하는 동시에 '이집트의 거울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 다음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원문보기)

30년 동안 일본 근현대사에 관한 연구·저술 활동을 했던 허버트 빅스 교수는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 대학원 교수를 역임한 후 현재 미국 빙햄턴대 교수로 있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히로히토와 근대 일본의 형성>이란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편집자>


▲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다음 날 카이로 타르히르(해방) 광장에 동이 트는 장면과 1987년 6월항쟁 당시 서울시청앞의 모습

중동 혁명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이집트, 팔레스타인 점령지, 그리고 미국

1880년대 초반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기간이 진행되면서 중동의 아랍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은 히틀러와의 전쟁 때문에 힘이 빠졌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아랍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미국에 넘기고 물러났다. 1948년 식민주의자들의 마지막 정착국인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그 땅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이 쫓겨난 것은 유럽 식민주의 후퇴의 한쪽 프레임을 형성했다. 다른 쪽 프레임은 1956년 영국·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2차 대전 기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을 확보하고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그 왕국을 미국과 석유 기업들의 손아귀에 넣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와 협력을 시작했고,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와서는 관계를 서서히 강화시켰다. 미 국가정보국(CIA)의 비밀공작을 통해 이란 등 페르시아만의 산유국들이 하나 둘 미국에 복속됐다.

미국이 건설한 중동 질서의 전체적인 틀은 과거 유럽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었다. 군주, 군사 독재자, 사우디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지원하는 게 기본이었다. 그 그림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중요하다.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을 중동 전역에 미국의 힘을 투사하기 위한 기지로 여겼다. 사우디는 그걸 반대할 수 없었다. 현재와 같은 미-이스라엘 관계가 처음으로 형성됐던 1967년(3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의 세속적 민족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 현재 이집트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진행중이다. 군과 경찰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자들은 민주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호스니 무바라크가 가지고 있던 권력을 군대에 이양토록 하고 장막 뒤로 사라졌다. 군 지휘부는 지금 개혁의 속도와 내용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군사 독재자들이 지난 40년 동안 이끌어 온 경제적 착취와 약탈 시스템은 뿌리가 깊다. 그러한 경제 구조를 바꾸려고 하는 대중들의 운동은 군 지휘부와 기득권 엘리트들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군부는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단지 '군부의 관리 하에 선출된 민간 정부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건설토록 하겠다'고만 약속했다. 근부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것은 이집트 민중들에게 닥친 첫 번째 구조적 장애물이다.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와 예멘으로 퍼지고 있는 혁명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서 두 번째 장애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혁명의 열기는 미 5함대가 있는 바레인으로 번졌다. 또한 이란의 반정부 시위에 다시 불을 붙였고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요르단강 서안(웨스트뱅크)의 이스라엘 점령지 등에서도 동조 시위가 일어났다. 알제리에서도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거리를 점거하고 이집트식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알제리의 독재자 역시 민주적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고, 반군들에 의해 오랫동안 시달려왔다. 이러한 혁명의 들불은 미국의 중동 지배 상황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고, 멀리 아시아의 무슬림들과 미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집트의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고,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의 이행을 바라는 시민 조직이 늘어가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정치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집트의 보통사람들은 독립적이면서 이집트와 아랍의 이익에 맞는 대외 정책을 추구하도록 정부 당국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이익이 되게 하는 길이다. 미국의 안보를 관리하는 이들은 '억압이 덜한' 수준의 현상 유지-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주의-를 지지하겠다고 천명했지만, 미국이 자신들의 힘과 지역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변화를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경제난과 식료품 가격의 고공행진,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이집트의 시위 열기는 쉽게 타올랐다. 정치적 억압도 문제를 심화시켰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해외의 자본을 끌어들였지만 이집트인들 대부분은 더 가난해졌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들어선 새로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집트인들이 시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이집트 혁명은 2003년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이라크 침략과 점령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2006년 미국과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고 해즈볼라가 그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던 일,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의 정착지를 늘려가는 현실, 2007년 이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등도 이집트인들이 분노를 쌓아 왔던 이유일 것이다. 미국의 후원 하에 저질러지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해 아랍인들이라면 누구나 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일들은 이 지역을 들끓게 했다.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나온 핵심적인 요소들은 이집트 장교 계급과 그들을 후원하는 미국이 이번에 등장한 민주화 세력과 권력을 얼마나 공유하려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했다. 그들은 이집트 국내외 정책들의 뿌리를 수정해야 한다.

아랍 출신 역사가이자 활동가인 질베르 아슈카르(Gilbert Achcar)는 이집트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선두에 선 이집트의 수많은 집단에 주목했다. 2000년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인티파다(봉기)에 연대한 사람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 사람들, 자유노조 운동 지도자들, 도시 젊은이들, 중산층 및 시민사회 운동 회원들,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무슬림 형제단 등이다. 최대 야권 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은 수십년을 지나 오는 동안 급진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누그러뜨리는 쪽으로 변해왔다. 의사, 엔지니어, 기타 전문직 종사자들로 이뤄진 그들은 시민적 권리와 자유 문제를 종교 문제보다 상위에 뒀다.

이 집단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탄압했던 힘은 바로 장막 뒤에 있던 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일부는 여전히 군부가 중립적일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지만 말이다. 미국의 자금으로 배를 채운린 무바라크의 군인들과 기업인들은 대중들의 이러한 환상을 이용해 시위의 기세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처음 전국적인 시위가 발발했던 1월 15일부터 2월 4일까지 민주화 시위의 위세는 매우 강력해 독재자를 즉시 쓸어버릴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위대는 이집트 전역에 있는 광장으로 나와 평화적으로, 질서있게 시위를 벌이며 군부독재의 종식, 자유·민주주의 일반 원칙의 이행, 경제·사회적 정의의 실현 등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요구는 비상계엄법 즉각 철폐, 헌법 개정, 고문과 탄압 중단, 부패한 사법부 개혁, 국민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 등으로 점점 구체화됐다. 시위대는 무엇보다 무바라크 사임, 군사정부 해체, 민족민주당(NDP) 지배의 의회 해산, 조기 개헌 등을 주장했다. 시위대는 독재정권에 복무한 모든 공직자들이 사임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지배 구조가 해체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희생은 헛되이 끝날 것이며 투옥과 고문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고, 시위대의 수가 늘어나면서 두려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육군의 최고 지도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바라크와의 결별을 거부했다.

한편에서 고위 군 사령관들은 시위대들에게 바리케이드를 해체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지만 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은 하지 않았고 가끔은 시위대를 보호하기도 했다. 봉기 9일째 경찰이 시위대 해산에 실패하자 무바라크의 정보기관들은 무장폭력배들을 소집해 카이로로 보냈다. 그들은 사복경찰들, 무직자들과 함께 일당 17달러를 받고 말이나 낙타를 타고 주먹과 곤봉과 칼, 쇠파이프, 화염병을 이용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그 공격에는 미국이 지원한 최루탄과 총, 총알도 쓰였다.

시위대에 대한 공격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무바라크의 사임을 압박하고 '최고 고문 사령관'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으로 하여금 시위를 진압토록 했다는 보도가 나온 후에 있었다. 과거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술레이만은 CIA의 카이로 '교섭창구'로 외국에서 잡은 테러용의자들을 카이로로 데려와 고문하는 CIA의 불법 활동을 돕는 역할을 맡았었다. 또한 <알자지라>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비밀스런 관계에서도 술레이만이 '교섭창구' 역할을 했고, 그가 2월 3일 TV 연설에서 시위대를 향해 외세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력이라고 비난한 이후 이집트인들은 술레이만을 무바라크 2세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술레이만은 시위대에 대한 보복 위협을 숨기지 않았다.

술레이만은 또한 언론인들과 인권단체 간부들에 대한 공격을 승인했고, 시위대 수백 명의 사망·실종·투옥에도 책임이 있다. 무바라크가 술레이만을 부통령으로 선택했을 때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프랭크 와이즈너 특사는 미 정부가 무바라크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위가 18일째 되면서 전국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수백만 이집트인들이 체제의 종식을 요구하자 무바라크는 권좌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협상이 공존하는 현재의 상태가 만들어졌지만, 군은 여전히 국정 운영의 권한을 가지고 있고 군부 통치의 기반은 그대로 있다.

정치에서 군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일상화된 이집트의 상황은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과 유사하다. 술레이만 일당을 제거하고 군부 통치를 끝장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중동 특파원 앤서니 샤디드가 지적한 것처럼 "오랫동안 군부는 장막 뒤에서 상황을 관리하며 중추적인 행위자로 부상해왔다. 무바라크 집권 시기 총 400억 달러의 미국 원조를 받아먹었던 군부의 이해관계는 군수 산업에서부터 건설, 소비재 산업, 리조트 운영까지 이집트 경제의 모든 분야에 뻗어 있다."

74세 술레이만 부통령과 75세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이 이끄는 군 최고위원회는 의회 해산, 헌법 효력 중단 등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 영국, 독일, 프랑스의 후원에 힘입어 국정 장악력을 놓지 않으려고 분투하고 있다. 모든 외부 세력들은 혁명을 억누르고 이집트의 위기를 자신들의 이익으로 돌릴 수 있는 안전한 길을 찾고 있다. 미국의 납세자들이 매년 이집트에 13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이집트의 고위급 장성들은 미 국무부와 의회, 로비스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오바마 행정부의 이집트 정책을 지원하는 우파 전문가들과 미 정부 내 모든 부처의 친(親) 이스라엘주의자(pro-Zionists)의 후원도 받고 있다.


이집트는 어디로 가나?

이집트와 한국은 정치 문화가 매우 다르지만, 두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민주화 이행의 걸림돌은 무엇이며 가능성은 있는가를 보여준다. 미국은 두 나라의 민주화 세력을 질식시킨 군부 독재자들을 지원했다. 전통적인 시각으로 볼 때 미국이 그러한 정책을 취한 것은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워싱턴의 진짜 목표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질서 속에 두 나라를 확실히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국제 환경 속에 있지만, 두 나라를 비교해 봄으로써 이집트인들의 앞에 놓인 민주화 투쟁이 비록 어렵지만 성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오늘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돈이 많이 드는 전쟁을 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는 시점이라면 시사점이 클 것이다.

1948~60년 이승만 독재와 61~79년 박정희 독재 시절 한국에는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자생적인 자본가 계급이 거의 없었다. 독재 정권은 시민들의 자유를 거의 허락하지 않았고, 미국은 박정희 정부를 꾀어 내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돕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은 매우 빠른 수출 주도형 산업화를 경험했고, 정치·경제적 개혁도 시작했다. 자본가·금융가 계급은 군부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늘었고 자율성을 키웠다.(2010년 현재 한국은 이집트보다 훨씬 많은 65만3000명의 군 병력과 32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지원에 따라 많은 이득을 보기도 했다.

박정희가 암살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5월 미국이 뒤를 봐주는 상태에서 임금 인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전두환은 1987년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세력에 의해 물러났다. 그 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더 강해졌는데, 그 무렵 냉전이 끝났다는 게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야당의 활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정치 과정에 지속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 민주화 세력의 활동은 또한 대만이 1당 군부 독재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한국의 학생운동권이 도시 중산층과 결합했을 때, 박정희·전두환 독재의 경제적 토대가 됐던 남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부흥했다. 일본식 발전국가 정책은 꽃을 피웠고, 한국은 점차 법치국가가 되어 갔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 이행은 동북아 전체로 혁명적 상황을 퍼뜨리지는 못했다. 1990년대가 시작되고 약 30개 재벌 중심의 경제가 형성되면서 한국 정부는 더욱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소득 불평등은 커져갔고, 노조의 활동을 제약하는 법률이 생겨났다. 한국의 사례는 다당제 민주주의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극단적인 경제적 착취, 반민중적 정책, (허울뿐인) 자유선거와 병존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고, 아직은 뿌리가 깊지 않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혁명이 지연되는 건 크게 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북한과의 전쟁 때문이며, 북한·중국·러시아로 둘러싸인 이 나라에서 미군이 하고 있는 완충자적 역할 때문이다. 미군 기지와 군대의 주둔을 끝낼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과의 불평등한 주둔군 지위 협정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확장과,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떠오른 상황, 이런 것들이 결합되면서 동북아시아에는 다른 가능성들이 있고, 그것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운신의 폭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이집트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다. 이집트는 발전국가가 아니었으며, 법치도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집트 군의 규모는 크지만, 정보기관과 경찰기구는 군 보다 더 크다. 최근 연구 자료에 따르면, 2009년을 기준으로 이집트의 내무부는 경찰 85만, 보안군 45만, 비밀경찰 40만, 사복경찰 등 총 170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CIA가 높이 평가한 수감시설도 그물망처럼 존재한다. 이집트 군부는 경제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면서 부패와 정실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집트의 군부는 또한 미국의 대리인으로써 이집트와의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팽창주의적 시오니즘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 또한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과거 사다트와 무바라크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무슨 일이든 마음 껏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정부가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이집트에는 1979년 이스라엘과 맺었던 평화협정에 손을 보고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쟁을 피하려 하는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이집트 민주화 이행의 미래가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아직 모른다. 군은 권력을 잡아 왔고 지금도 비상계엄법을 통해 통치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은 불안정한 상태다. 놀랍고도 용기있는 혁명 운동은 현재까지 어떤 폭력에 의해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권위가 필요하고 새로운 헌법이 필요하다는 것 이상의 제안을 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집트의 젊은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군부의 지배, 극심한 빈곤, 미국·이스라엘에 대한 종속 이 세 가지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 그들이 그 목적을 이루려면 노엄 촘스키가 예리하게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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