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도 아세안 대화상대국으로서, 또한 '아세안+3'(한중일)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 회원국으로서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십 차례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게 될 것이다. 한국 언론은 논평은 고사하고 단신도 내주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의장국 수임은 동남아시아의 인권 신장과 민주 진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아세안 의장국은 국명의 알파벳 머리글자 순서로 수임하므로 원래 올해는 브루나이 차례지만 지난 2009년 4월에 인도네시아가 2011년 의장국을 자원하고 나서서 먼저 하게 된 것이다. 아세안 전체의 절반이 넘는 인구와 광대한 군도에 펼쳐진 영토 덕분에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중심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공식적 의장국까지 브루나이와 캄보디아를 제치면서 먼저 수임하려 할 만큼 인도네시아의 상황인식은 급박했다. 2015년 '아세안공동체'의 역사적인 출범이 목전에 다가왔는데 숙제가 한참 밀려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당면 과제를 '국민 중심의 아세안 형성'(People-Centered ASEAN)으로 압축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면 '국가 연합'이 아니라 '국민 연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인권 신장과 참여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을 일찌감치 분명히했고, 마르띠 나딸레가와 외무장관도 같은 노선에 입각한 여러 가지 실행 계획들을 이번 아세안 외무장관회의에서 내놓았다.
나딸레가와 외무장관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을 존중하는 풍토의 조성을 위한 시급한 당면과제로 아세안인권위원회(AICHR, ASEAN Inter-governmental Commission on Human Rights)의 내실화를 거론했다. 2009년에 출범한 AICHR은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인도네시아 정부는 올해 중 '아세안인권선언'을 제정해 합의된 기준을 갖고 AICHR이 체계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 지난달 13일 열린 아세안 외무장관회의에 참석한 각국 장관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아세안재단(ASEAN Foundation)의 3년 임기 소장에 임명된 마까림 위비소노의 면모 역시 인도네시아의 기획에 부합한다. 위비소노 소장은 유엔 인권위원회와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의장을 역임한 베테랑 외교관으로 국제기구의 인권 관련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의 아세안 청사진을 실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아울러 나딸레가와 장관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주노동자 권리보호 문제도 중요한 의제로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노동력 송출국의 입장에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수입국의 입장에서 협의에 나서게 될 것이다.
미얀마(버마)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에게는 별반 효과가 없는 경제제재를 중지하도록 요구하고, 미얀마 정부에게는 아웅산 수치를 포함한 모든 세력의 화해와 국민통합의 과정을 시작하도록 요구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학계, 언론, 시민사회의 의견을 듣고 함께 논의하는 다양한 포럼을 결성함으로써 아세안을 더욱 개방시키자는 의견도 피력했다.
인도네시아의 열의가 어느 때보다 높기에 그 귀추가 주목된다. 아세안인권선언이 올해 제정될 수 있을지, AICHR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인지, 합의한 인권기준을 위배한 회원국의 처벌까지 가능해질 것인지, 국제적으로 지탄받는 미얀마 인권침해 문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인지, 이에 따라 아세안의 전통적 운영원리인 내정 불간섭 원칙이 약화될 것인지, '인권 외교'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인권 수준도 따라서 향상될 수 있을 것인지 등 궁금한 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아세안 인권체제 제도화를 위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열정이 벌써 냉소적인 반응에 부닥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나 국내 상황에서 한계가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의 정치체제는 다양하다. 미얀마는 군부독재, 베트남과 라오스는 일당지배체제, 브루나이는 술탄 왕정체제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는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정치적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최근에 나아지고 있지만 태국의 민주주의는 퇴행했다. 따라서 일부 회원국들은 아세안의 인권체계를 강화하려는 인도네시아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거나 심지어 부당한 간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 최고의 민주주의 수준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최근 군인들이 파푸아 섬의 민간인들을 고문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은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내부적으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되고 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가 강도 높은 인권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회원국이 인권선언을 위배하더라도 처벌보다는 설득이라는 외교적 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 아세안 심볼 |
아무튼 동남아 민주주의의 기수 인도네시아는 역내 인권신장을 향한 깃발을 올렸다. 아세안의 지도적 중심국가로서 '아세안시민권'을 만들어보겠다는 창대한 기획과 책임 있는 자세에 대해 진심으로 지지와 박수를 보내주자.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열심히 관찰하자.
무엇보다도 이런 호기를 이용하여 아세안 운영이나 회원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요구와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자. 동남아 이웃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이들에게는 특히 약속과 실제의 차이를 기회로 활용하는 실천적 지혜가 각별히 필요하다 하겠다. 올해는 아시아 민주연대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니까.
* '아시아생각'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칼럼으로,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