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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파괴자 모사드의 '암살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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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질서의 파괴자 모사드의 '암살 잔혹사'

<알자지라>가 파헤친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비밀 전쟁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 하마스의 지도자 마흐무드 알-마부가 지난달 20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호텔에서 살해된 사건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살해 용의자들이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독일이 발행한 여권을 위조해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나라들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8일 "모사드의 소행일 확률이 99%"라고 공언했던 두바이 경찰청장은 20일 현지 신문 <알-바얀>과의 인터뷰에서 "모사드가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 중에는 용의자들 간의 전화통화 기록들이 있다"고 한 걸음 더 나갔다.

또한 영국 <더타임스>는 21일 소식통을 인용해 이번 사건의 최종 결정권자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였다고 보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월 초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외각에 있는 모사드 사령부에서 알-마부 암살 프로젝트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작전을 승인했다고 전했다.

국제적으로 파문을 몰고 온 이번 사건으로 인해 모사드의 역사와 실체에 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20일 인터넷판에서 '모사드의 비밀 전쟁'이란 기사를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그간 저질러 온 행적의 역사를 짚어 봤다. 다음은 <알자지라>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 모사드 창설 당시의 모습 ⓒ모사드 홈페이지
모사드의 비밀 전쟁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반세기 이상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수많은 암살 사건의 배후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심지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1988년 리비아가 팬암기를 폭파시킨 로커비 사건, 2001년 9.11 테러의 배후에도 모사드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나올 정도였다.

모사드는 요인 암살을 위해 타국에서 발행한 여권을 위조하는 등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모사드는 이스라엘 건국 3년 후인 1951년 당시 총리였던 벤구리온에 의해 창설됐다. 벤구리온 총리는 "적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방위의 최전선"에 있는 정보기관이 필요하다며 모사드를 만들었다.

모사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는 성경 잠언 11장 14절을 모토로 채택했는데, 이는 그들의 적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비밀 정보기관에는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모사드와 군사 정보를 담당하는 아만, 그리고 국내 보안을 담당하는 신베트가 있고, 모사드의 국장은 정보 사항을 총리에게 직접 보고한다.

모사드는 요인 암살 외에도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된 100명의 인질들을 성공적으로 구출하면서 '명성'을 쌓아 나갔다.

모사드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찾아내 이스라엘로 압송, 시민재판에 세우고 2년 뒤 처형시키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아이히만을 체포함으로써 벤구리온은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에서 커다란 갈채를 받았지만, 아르헨티나는 모사드가 자신들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유엔에 제소했다.

이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모사드의 그같은 행위가 계속된다면 세계의 평화와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모사드는 유엔 안보리의 말을 듣지 않고 해외 활동을 계속했으며, 안보리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신의 분노 작전'

그리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대표팀의 선수와 코치 11명이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사드는 1979년까지 7년에 걸쳐 검은 9월단과 연계된 이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신의 분노'라는 이름의 이 작전에 따라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번역가인 와사르 즈와이델(Wael Zwaiter)이 처음으로 희생됐다. 이스라엘은 그를 검은 9월단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했다. (즈와이델은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조카이기도 하다-옮긴이)

즈와이델은 1972년 10월 16일 저녁 늦게 집으로 오는 길에 모사드 요원들에게 총살을 당했는데, 즈와이델의 지지자들은 그가 9월단과 연계되지 않은 지식인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 이스라엘이 프랑스 검은 9월단의 총책이라고 주장하는 마흐무드 함샤리가 1972년 12월 파리의 아파트에서 살해됐다. 함샤리는 부비트랩이 설치된 전화기에 손을 댔다가 폭사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모사드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일하고 있는 모로코인 웨이터 아흐메드 부치키를 검은 9월단의 지도자 중 하나인 알리 하산 살라메로 착각해 살해하기도 했다. 부치키는 73년 7월 임신한 아내 앞에서 총살당했다. 노르웨이 당국은 부치키를 살해한 후 노르웨이를 떠나려던 모사드 요원 중 6명을 붙잡아 감옥에 넣었다.

하산 살라메는 결국 1979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자동차 폭파사고에 의해 사망했다. 이 사고로 주변에 있던 8명의 사람들도 함께 숨져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이로써 모사드는 9년에 걸친 신의 분노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 작전으로 살해된 많은 사람들은 검은 9월단과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이스라엘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해 오고 있다.

그 후로도 모사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튀니지 지부장인 아부 지하드를 1988년에, 몰타의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인 파티 샤카키를 1995년에 살해하는 등 이슬람 고위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이어갔다.

이라크에 수출할 '슈퍼 건'(포신이 수십미터인 거대한 대포)을 개발한 캐나다인 과학자가 1990년 벨기에 브뤼셀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일, 하마스가 사용하는 폭탄을 제조한 것으로 알려진 야햐 아이야시가 96년 가자지구에서 부비트랩이 설치된 이동전화를 사용하다가 사망한 것, 하마스의 멤버인 엘 딘 셰이크 칼릴이 2004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한 일은 모두 모사드의 소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모사드는 수많은 암살 사건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 두바이의 호텔 CCTV에 찍힌 알 마부 암살 진적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모사드 '명성'에 먹칠한 칼리드 마샬 암살 실패

그러나 모사드의 작전이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1954년 모사드 요원들은 이집트에 있는 극장, 카페, 미국 소유 시설 등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잦은 장소에 폭탄을 설치했다. 폭력 사태를 일으켜 당시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정부를 흔들고 시나이 반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가급적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같은 음모를 포착한 이집트 당국은 모사드 정보 요원들을 체포했고 테러 계획은 무산됐다. 이 일로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핀하스 라본이 사임했다.

1997년 요르단에서 하마스의 최고지도자인 칼리드 마샬을 죽이려다가 무산된 일은 모사드의 가장 큰 실패 사례였다. 벤야민 네타냐후 당시 총리(현 총리이기도 함)의 지시를 받고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요르단으로 들어간 두 명의 모사드 요원들은 9월 25일 칼리드 마샬의 귀에 독극물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그를 살해하려다가 결국 체포됐다.

자신의 나라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진 것에 격분한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스라엘이 해독제를 넘겨주고 요르단과 3년간의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문제를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자 미국이 이 사건에 개입했고, 결국 네타냐후 총리는 후세인 국왕에게 사과하는 한편 해독제를 보내주고, 투옥시킨 하마스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풀어주었다. 이에 요르단은 구금한 모사드 요원들을 돌려 보냈다.

이스라엘이 야신을 석방한 것은 모사드에 여권을 도용당한 캐나다가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나섰고 당시 중동 평화협상을 이끌던 미국마저 이스라엘에 불만을 표한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야신은 그로부터 7년 뒤인 2004년 이스라엘에 의해 결국 폭사했다.

모사드는 또한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비군사 작전도 수행한 바 있다. 모사드의 전신이었던 조직은 1938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 시절에도 영국의 뜻을 거역하며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데려왔다.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유대인 수백 명을 구출해 낸 것도 모사드였다. 현 모사드 국장인 마이어 다간은 특공대 사령관 출신으로 1967년부터 73년까지 이스라엘 육군에서 복무했고 1982년 레바논 침공에도 참여한 바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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