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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 가을, <금강문화권 초대장> 받으세요

[알림]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9월 답사 안내

우리 땅의 영혼(soul)과 정신(sprit)을 찾아나서는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 제6강이 9월 26-27일, 주말의 1박2일 동안 금강 중상류 지역에서 펼쳐집니다. 9월 국토학교의 주제는 <금강문화권의 초대장>이며, 답사 키워드는 <옛이야기 재잘대는 실개천 휘돌아>로 잡습니다.

국토학교는 지난 4월 개교하여 제1강(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에 이어, 5월의 2강(영남 전통마을 순례), 6월의 3강(호남의 누정문화 원림문화), 7월의 4강(북강원의 요산요수), 8월의 5강(내포지방에 부는 바람)을 펼쳐왔습니다. 이제 6강부터는, 국토의 내륙지방과 해안지대의 종횡무진 편력에 이어 보다 심층적인 국토 가로지르기 순례에 들어갑니다.

박태순 교장 선생님은 제6강 주제인 금강문화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짚어줍니다.

"산고수장(山高水長)입니다. 산은 높게 솟아야 하고 강물은 멀리 흘러야 합니다. 전북 장수읍 수분리(水分里)의 뜬봉샘에서 발원하는 금강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한껏 호기롭게 누리며 유장하게 흐르고 싶어 하지만 워낙 드센 팔자여서 온갖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게 됩니다.

어질고 너그러운 산이라는 뜻의 덕유산, 번거로운 세속을 벗어난 산이라 내세우는 속리산이련만 금강은 도무지 곧바로 흐르지 못하고 갈팡질팡 헤매며 몸부림을 치는데 역사의 물굽이도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가며 온갖 사연들을 엮어냅니다. 은자(隱者)들의 골짜기 무주구천동이라든가 <화랑세기>의 사랑과 전쟁이 애달프기 그지없던 양산8경을 휘돌아 금강은 간신히 영동 옥천의 개활지대로 나오지만 자연과 문명의 충돌, 그리고 거대 토목공사가 금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80년 12월에 준공된 대청댐의 높이는 72m이고, 길이는 495m입니다. 이로 인해 조성된 인공호수 대청호의 길이는 80km, 저수면적은 72.8㎢, 저수용량은 14억 9000만t입니다. 이런 통계를 쉽게 풀자면 대청호는 2백리에 걸친 호수이고 그 면적은 여의도(8.48㎢) 넓이의 85배쯤 됩니다. 서울 전체의 면적이 여의도의 70배쯤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대청호는 서울특별시보다도 큰 거대 인공호수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대청호는 개발만능시대의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녹색생태 요구와 욕구가 부쩍 늘어나는 탈산업 시대의 문화 환경 속에서 더욱 소중하고 막중한 역할을 강요받고만 있습니다. 대청댐의 접변지역은 곧바로 1백50만 인구의 대전광역시와 65만 인구의 충북 도청소재지 청주 및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예정지역이 되고 있으니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의 젖줄이 돼주어야 하는 금강의 헌신과 봉사가 힘들어 보이기만 합니다.

금강문화권은 산업사회 속에서 이처럼 문화충격과 문명충돌을 빚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한때 개발만능주의자들은 <한강의 기적>을 운위한 적도 있었지만 탈산업시대에는 <금강의 응전과 도전>이 미래사회의 나침반 구실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정당한 관심과 관찰이 요청되니 이에 금강문화권 초대장을 띄웁니다. 금강유역에서 과연 무엇을 보게 되는지…."

천고마비의 계절에 찾는 금강 유역 일대가 과연 오늘, 어떻게 주목 받고 있는지 그 문화역사지리 현황은 어떤지, 교장 선생님의 답사지 배경 설명을 들어봅니다.

<답사지 배경 설명>

인비테이션 투 더 리버 오브 금강…, 금강 안내 권유의 초대장을 어떻게 작성해볼 수 있을까. 금강변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은 명시 <향수>에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고향의 풍정을 노래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 고향의 실개천마저 하천정비사업으로 변모되어 버렸듯이 산업기술문명시대의 금강은 자연하천으로 방치되지는 않는다. 옛이야기는커녕 오늘의 이야기마저 재잘거려주는 실개천이 없고 여울목과 도랑과 둠벙을 모두 사라져버리게 만든 수자원 관리 위주의 치산치수는 분명 임계점에 도달되어 있다.

한강, 낙동강에 이어 금강과 영산강, 섬진강을 일컬어 5대강이라 하는 것은 수역면적의 크기에 따른 분류이다. 국토의 장강대하를 다른 기준을 통해 이해해 보아야 할 까닭이 있다. 특히 국토의 중간벨트지대를 관통하고 있는 금강 지리학이 그러하다. 수자원 개발의 측면만 아니라 하천지형학의 관점에서 아울러 생태환경학을 염두에 두어 금강이 어떻게 국토 전체와 조화, 균형을 맞추면서 지역문화를 감당해낼 수 있겠는지 짚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강문화권이라 할 수도권 지역의 과밀포화 상황의 해소책은 단기간 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범람현상의 여파는 이미 금강문화권에 홍수출하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선 다급한 대로 한강문화권과 금강문화권의 상관관계를 점검해볼 필요도 있다.

한강의 고민을 금강에게 떠맡기려는 방식의 관찰이 아니라 금강으로 하여금 한강과 낙동강의 문제점을 짚어보게 하고 영산강-섬진강을 점검해보게 하는 것과 같은 종합적인 전망이 요청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의 문화사회학 및 학술예술사도 두루 파악해보아야 한다.

서기 475년에 백제는 한강의 위례성에서 금강의 웅진(곰나루)으로 천도하는데, 금강권역으로의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1970년대와 2000년대에도 재현되어 제출된 바 있다. 전통시대에는 남한강의 충주 일대를 '중원(中原)'이라 하여 중시하였고 금강의 청주 일대를 '서원(西原)'이라 하였는데 20세기 초부터 역전현상이 빚어진다.

1908년에 충청관찰사 부임지가 남한강 수계의 충주에서 금강 수계의 청주로 이전된다. 금강문화권은 경부선과 호남선의 양대 철도를 포괄하게 되는 서울-대전의 종축과 청주-공주-부여-논산의 호서 지역 횡축 및 보은-옥천-영동-무주-장수의 상류지역을 두루 엮어 국토의 중앙지대를 비단 실로 수를 놓듯 금수강산으로 꾸며왔으나 자연경제시대에는 예상도 못했던 '개발근대화의 태풍'을 만나게 되었고 오늘에는 '탈산업화의 홍역'을 치르고 있다. 속리산의 금강, 덕유산의 금강, 그런가 하면 대청댐의 금강과 용담댐의 금강이 서로 동상이몽이다. 금강 어름치와 금강 모치를 되살리려는 노력과 불루길과 배스의 금강 생태계 교란 현상을 동일선상에서 논의해볼 수도 없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은 흙에서 자란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푸른 하늘을 날고 싶어 함부로 화살을 쏘아대고 또 찾으러 다니는 그의 금강 방죽 체험이 유난스러운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팔트에서 자란 도시인들이 금강 일대에 함부로 쏘아댄 온갖 공해물 덩어리들을 어떻게 찾으러 다니고 주워 담아야 할지 이는 난감한 노릇이 된다. 적어도 금강을 답사할 적에는 아스팔트에서 자란 마음을 접고 '흙에서 자란 마음'을 되찾아보고자 해야 할 일이다.

제6강 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9월 26일(토요일)

07:30 서울에서 출발
(추석을 앞두고 성묘자들로 교통이 혼잡하므로 출발 시각을 앞당겼습니다. 7시 20분까지 반드시 탑승 바랍니다^^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 유진여행사 경기76아 9111.)

09:30 금강변 독락정 도착(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101번지)

독락정(獨樂亭)은 1437년(세종 19)에 임목(林穆. 1371~1448)이 건립한 정자인데, 고향 마을을 '삼기촌(三岐村)'이라 부른다고 <누정기(樓亭記)>에서 밝히고 있다. 경상·전라·충청을 휘돌아 나오는 금강 본류와 지류의 모든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에 삼기촌이라 한다는 것이다. 전월산(轉月山, 280m)과 그 뒤쪽으로 정삼각형의 윤곽이 또렷한 원수산(元帥山, 254m)을 끼어 앞쪽으로 금강을 조망하게 하는 이 일대가 행복중심복합도시(이하 행복도시) 건설예정지로 결정된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 독락정ⓒ프레시안

행복도시건설청의 도시계획에는 주산(主山)이 원수산, 좌청룡은 전월산, 우백호는 괴화산, 명당수는 금강 본류와 미호천 지류라 하여 전체 스카이라인에 대해서는 '삼산이수(三山二水)'라는 전통지리학의 표현을 쓰고 있다. 녹지축(그린 네트워크)과 하천축(블루 네트워크)의 기본 동선 구축으로 생태도시⋅강변도시를 지향한다고 한다. 15세기에 세워진 독락정의 <누정기>는 주변 환경에 대한 찬탄이 대단한데 미래를 예견한 듯한 묘사도 보인다.

"삼기촌 남쪽으로 5리쯤 내려가면 고개가 있는데 세 강물이 꿈틀거리며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북쪽으로 원수산을 쳐다보니 성곽 같이 둘러 있고,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하늘에 드높이 솟구쳐 있다. 강은 질펀한 모래밭에 넓게 흐르니 하늘과 물이 한 빛이다. 바람 불면 푸른 주름살이 되고 달 비치면 은빛 물결이로다. 돛과 노, 물고기와 새들이 가고 오고 떴다가 잠겼다 한다. 이 모든 풍경들이 다 내 발 밑에 있다. 길 가는 나그네들이 사방 들판에서 꾸불거리며 연달아 끊이지 않고 나다니는 것도 또한 앉아서 볼 수 있다."

"바람 불면 푸른 주름살, 달 비치면 은빛 물결"이라 읊었던 이런 전원경관을 과연 어떻게 테크노시티의 오픈스페이스 속에 리모델링하게 될 것인가. 독락정 일대가 앞으로는 3도 아니라 8도 사람들의 '동락정(同樂亭)'으로 될 수 있을까.

10:00 행복도시 홍보관 투어(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142-1번지)

금강은 행복도시 건설지 일대에서 N이라는 영어글자를 비스듬히 뉘어놓고 있는 형상으로 흐른다. 오른쪽 맨 윗부분을 대청댐이라 한다면 그 아랫부분 꼭짓점이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이다. 이로부터 금강은 방향을 크게 틀어 사면(斜面)으로 북류하여 그 꼭짓점이 공주 곰나루가 되고 다시 남류하여 부여의 백마강이 되고 있다. N이라는 글자의 오른쪽(V) 사면 쪽에서 행복도시 건설이 오늘에 추진되고 있는 중이지만 이미 AD 5∼6세기에 왼쪽(Λ)의 사면에서는 백제의 고도 공주 및 부여의 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금강문화역사지리학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이해해보게 된다.

2002년 12월 19일의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후보자는 <권력, 부(富), 문화의 분산>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국토의 편중된 수도권중심 일극체제를 지양하여 균형과 다양성의 다극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의 이러한 공약은 국토현실을 제대로 직시한 개혁안이었는지 아니면 각계 국토권력자들의 막강파워를 실감 못했던 어설픈 이상주의자의 국토 이데올로기 담론 차원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행복도시건설청 바로가기->http://www.macc.go.kr/

11:30 대청호 현암사(懸巖寺) 전망대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대청댐으로 조성된 대청호 일대 경관의 최고 전망대이다. 절벽 바위에 매달려 있는 형세라고 하여 이런 사찰 이름을 얻었는데 주민들은 '달음 절'이라고 부른다. 사찰이 절벽의 고지에 위치하여 대청호만 아니라 멀리 남쪽으로는 서대산, 서쪽으로는 계룡산, 동쪽으로는 속리산의 원경을 조망할 수 있다.

여기서, 개발만능주의 연대기의 거대토목공사가 대청댐의 경우를 통하여 어떠한 한계와 모순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인지 살펴본다.

1966년에 '4대강유역 종합개발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해 8월 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법'이 제정 공포된다. 4대강의 수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전담부서가 세워져 각종 댐들의 시공과 함께 토건개발시대가 본격화된다. 준공 순으로 따져보면 소양강댐(1973년), 팔당댐(1973), 안동댐(1976), 장성댐(1976), 대청댐(1980), 충주댐(1985)이 순차적으로 건설되었고 크기로 따지면 소양강댐⋅충주댐⋅대청댐⋅안동댐의 순서이다.

대전과 청주의 첫 글자를 따서 '대청'이라는 합성어를 붙인 댐으로 인해 인공호수가 조성되었으니 대청호 호반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지만, 그러나 대청댐 탐구에는 감동만이 아니라 냉정한 성찰이 요청된다. 토건 전문 용어로는 '하천 유수(流水) 전환 공사'라 한다는데 댐의 건설로 인해 401km에 달하는 금강 전체 물줄기의 흐름이 끊기고 잠기는 상황을 만나게 했다.

댐 건설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자원'의 경제성을 위한 방편이며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종합적인 환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건설을 위한 건설'의 조급성에 매달렸던 측면이 없지 않았는지 되돌아 살펴보아야 할 까닭이 있다. 우선 엄청난 크기의 인공호수 조성으로 큰 면적의 수몰지역이 생겨나고 다수의 수몰민들이 발생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연생태환경의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인공호수 대청호가 조성되었던 것인지 질문을 해보게 된다.

댐의 상류지역이 되는 청원, 보은, 옥천, 영동 일대는 상수원보호구역이 되어 주민들의 생업에 원활하지 못한 점이 있게 된다. 댐의 접경지역은 대전 청주 공주 천안 및 행복도시의 거대 밀집 도시 공간권을 이루어 대청호의 수질오염과 환경오염의 직접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오늘의 대청호는 두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 댐이 건설될 당시에는 환경영향 평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오늘의 대청호는 개발만능주의 시대의 태생적 한계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생태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더욱 까다로워질 것인데 대청호는 너무 많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을 엮고 지고 있는 어머니처럼 시달리고 헐떡거리는 형편이다.

더구나 금강은 한강이나 낙동강과는 달리 수로가 대단히 복잡한 곡류(曲流)이다. 상류 쪽으로는 구배도 높은데 배불뚝이 모양의 호반은 유속이 아주 느리기만 하다. 전문가의 조사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유입된 물은 댐 아래로 빠져 나가기까지 200일 가량 머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이런 까닭에 '크게 맑은(대청)' 호수는 전혀 아니게 되고 도리어 수질오염과 생태보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12:10 문의문화재단지

조선시대 문의현의 객사이던 문산관 (충북 유형문화재 49호)을 비롯하여 수몰지역의 양반가옥, 민가, 대장간, 주막집 등을 옮겨놓았다. 그러나 이 문화재단지는 '수몰 유물의 집합소'만은 아니어서, 민선을 통해 청원군수를 지낸 소설가 오효진이 미술관을 건립하기도 하여 예술행사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남한강의 청풍문화재단지와 금강의 문의문화재단지는 '지속불가능하게 된' 전통문화양식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해보게 하는 장소이다. 1974년에 시인 고은은 <문의 마을에 가서>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대청댐 공사로 수몰민이 생겨나던 당시의 문의마을에서 시인은 이미 개발근대 극복의 명제를 제출해보고 있었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하략)."

문의문화재단지 바로보기->http://cultural.puru.net/

13:00 점심식사 (문의면 호수식당의 가마솥손두부/청국장/비지전)

14:00 청남대 답사(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1981년 6월 대청댐 완공 기념식에 참석했던 당시 대통령이 호반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다는 의견에 따라 대통령 별장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준공되었을 적에는 그 명칭이 영춘재(迎春齋)였는데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아니하였던 이 별장의 건설과정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고 지적된다. 1988년에 이르러서는 이 별장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국회 5공특별위원회에서 현지조사를 하기도 했다.

56만평의 경승지에 조영된 이 별장은 참여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03년 4월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대통령 별장의 역할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청남대의 관리 및 운영을, 가령 문화재청과 같은 중앙부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충북도청에 인수시킨 것이 온당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점도 있다. 인공호수 대청호와 대통령 별장 청남대의 건설은 일단 '개발국토'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환경국토'를 지향하는 현 단계에서 그 문제점을 점검해 볼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

환경지리학으로 살펴볼 적에 성급한 건설⋅개발의 전(前)시대 후유증과 환경⋅생태의 후(後)시대 요구조건을 동시에 접수해야만 한다. 청남대의 공공디자인을 왜 점검해보려고 하는 것인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지난 시대의 개발독재와 개발근대화의 병폐를 제대로 살피어 미래를 열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청남대는 제5공화국 시대의 물량위주 건축공간문화와 조경문화를 오늘에 진찰해볼 수 있게 한다. 전통시대의 원림문화-누정문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을 뿐더러 그 공간구성마저도 국적불명의 풍경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청남대 바로보기->http://chnam.cb21.net/

15:30 삼년산성 둘러보기(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청주의 상당산성은 일찍이 백제가 쌓은 것이고 보은의 삼년산성은 신라가 상주 쪽으로부터 진출하여 470년에 축성한 것이었다. 475년부터 고구려는 남한강을 장악하여 영월에서 서울 아차산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에 여러 산성들을 쌓게 되지만 문경과 괴산 일대 및 금강 쪽에도 미처 확인할 수 없었던 고구려 산성들이 무수히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494년 살수(薩水) 전쟁'은 신라가 고구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였다가 패퇴되는 것을 백제가 후원군을 보내어 지원해주는 복잡한 양상의 <금강 삼국지>를 연출해 보이고 있었다. 오늘의 대청호 일대에서 벌어졌던 대격돌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494년 살수 전쟁'은 대단히 중요한 대하서사 드라마를 내장시키고 있는데 이를 '역사퓨전'으로 출력시킬 수만 있다면 핍진한 CG(컴퓨터 그래픽)가 될 것이다. '494년 전쟁'을 통해 현재의 청주와 보은 일대를 살피면 야만적인 것은 5세기였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세기임을 확인한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3년이나 걸려 쌓았다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은 1,680m이다. 내외면 모두 수직에 가까운
석축 조영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 삼년산성ⓒ프레시안

신라문화유산 삼년산성의 견고한 아름다움은 모처럼 찾아온 방문자들을 경탄하게 하지만, 신라인들의 자긍심과 진취성과 용맹성의 문화마인드를 과연 어떻게 읽어내려 하고 있는가 물어보고자 한다면 오늘의 문화정책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일반인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만드는 한자투성이 전문 용어들의 해설과 안내와 언어코드들이 딱할 지경이다.

그런가하면 산성의 개보수에 있어서 신라 당대의 석물과는 다른 석재를 활용하고 있다는 문제점 등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지적하게 되는 것은 관련 행정당국들의 민족문화유산에 관한 정책과 실행이 초보적인 계몽 해설 단계에서 도무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성문화', 나아가서는 '산성 축제'를 재활해내는 프로젝트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돈의 가난 탓보다는 마음의 메마른 황폐를 더욱 들통 나게 한다. 축성 방법, 규모, 연혁 등의 초보 연구에서 제발 졸업하여 일반인으로 하여금 비유컨대 '하이델베르크 고성 탐방'처럼 관심과 흥미와 탄복을 자아내게 할 수 있도록 문화역사경관을 새롭게 정리 정돈하고 아울러 명소로 가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과연 저 문화관료주의자들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할 일일까.

삼년산성 바로보기->http://www.tourboeun.go.kr/

17:00 정지용 생가/문학관 살펴보기(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금강이 문학과 어떻게 만나는지 살피려 할 적에 개항장 군산을 배경으로 하는 채만식 소설 '탁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시문학이 또한 압권이다. 역순으로 살펴보자면 부여의 신동엽, 강경의 박용래, 보은의 오장환, 옥천의 정지용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21세기 문학을 장차 어찌 꾸려갈지 모르겠으되 20세기 문학사는 거칠기 그지없는 탁류의 격랑이었다. 전통이라는 뒷물결과 근대라는 앞물결에 뒤채고 보채면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은 금강의 현대사이기도 하였다. 금강의 시인들 또한 격변시대 급물살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었던 바 있었다. 시대와 타협하여 보신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 던져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의 모험과 탐구로서 자신의 삶을 탕진케 했던 이들이 뿌려놓은 빛은 투명하기 그지없음에도 그 그림자는 여전히 짙기만 하다.

정지용(1902년생), 오장환(1918년생)의 시문학을 문학성 자체로서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궤적에 엮어서 묶어놓았던 것은 시인의 비극이기 보다도 시대의 비극으로 통찰해야 할 일이었다. 이 시인들의 생애 전반기 문학 업적은 영롱하게 또렷하였지만 근대사의 역경에서 고경을 치른 후유증의 치료를 하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 채로 후반기 생애를 허망하게 마감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참으로 뒤늦게 '해금'이 되어 '문학 기념사업'이 나오게 되는데 '오래 된 미래'가 이들을 더욱 새롭게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당부한다. 정지용 생가는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었고 정지용 문학관은 2005년 5월 15일 시인의 생일에 맞춰 개관하였다.

정지용문학관 바로보기->http://jiyong.kr/

18:00 천태산 영국사, 양산8경(송호리 솔밭) 둘러보기

양산8경의 들머리에 놓인 천태산(715m)의 주위 경관은 당돌하다. 산의 자태가 끼끗하고 말쑥한데다가 굿거리장단처럼 휘도는 금강 춤사위가 흥겹다 할지 서럽다 할지 모든 전망들을 아리랑 가락처럼 휘늘어지게 한다. 이 산이 놓여있는 곳의 땅 이름에 양산(陽山)이니 금산(錦山)이니 하는 호칭들이 붙는 것이 무심치 않다. 전북 무주를 빠져나온 금강은 대둔산에서 천태산으로 뻗는 금남정맥의 삿대질에 길이 막혀 갈팡질팡 흐르고 있다.

유서 깊은 사찰 영국사(寧國寺)는 산불을 만나기도 했지만 본찰은 무사했고, 은행나무도 안녕하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였다 하는데 고구려가 나라 이름을 내려놓은 것이 이 해였다. 삼국통합의 격변 시대에 세워졌다는 창건 연대를 그냥 믿고 싶다.

이보다 앞서 신라의 김춘추는 655년 왕위로 나아가 '태종무열왕'이 되는데, 등극 원년에 비보를 듣게 된다. 화랑 김흠운(金歆運)은 김춘추의 명을 받들어 낭랑대감이라는 지휘관으로 백제와 벌이는 전투에 출정하는데 전쟁의 현장은 오늘의 '양산8경' 일대이다.

부하인 전지(詮知)가 김흠운에게 간청하기를 공은 반자(半子). 곧 임금님의 사위이니 진두지휘는 피해야 한다고 애원한다. 하건만 김흠운은 '임전무퇴'의 화랑정신을 내세워 돌진하다가 예상했던 대로 전사한다. '삼국사기'는 김흠운 열전을 별도로 꾸밀 지경으로 이 고지식한 화랑을 기렸지만 당시 백성들은 '양산가'라는 노래를 지어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했다.

'양산도 타령'은 오늘에 경기도 선소리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충북 영동의 민요였으리라 추정해본다. 노래가사에 <에라 놓아라, 아니 못 놓겠네, 능지를 하여도 못 놓겠네>하는 사설이 들어있는데 고지식한 화랑의 살신성인 때문에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삼켜야만 하는 공주의 외로운 슬픔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산면 면사무소 옆에는 충남 기념물 97호로 지정된 '영동 가곡리 고분'이 놓여있다. 1993년 충북대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는데 7세기 중엽의 신라계 석실분(돌방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무덤'이라고 불러온 이 고분은 백제와의 싸움에서 죽은 신라 화랑을 추모하여 세운 것이리라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는 것인데, 신분 높은 이의 석실분이 왜 어떻게 서라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동 땅에서 발견된다는 것인가. 역사의 수수께끼를 그냥 궁금해 할 것만도 아닐 듯하다.

남한강 삼국지에 이어지는 금강 삼국지…, 강물도 흐르고 역사도 흐르고 사람도 흐른다. 김대문이 <화랑세기>에 묘사한대로 하자면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도 흘러가고 뛰어난 장군과 용감한 군사도 흘러간다. 화랑의 '세기'가 흘러가고 나면 다른 청춘들이 또한 다른 이념과 명분의 흐름을 타고 이어서 흘러간다. 물은 이처럼 흘러가지만 강 자체는 흐르지 않고 남는다. 사람들은 흘러가지만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는지 그 사연은 국토에 남게 되고 설화를 통해서라도 기억된다. 양산8경 금강 물줄기는 옛이야기 재잘대며 흐르는데 누가 그 이야기를 들어줄 것인가.

19:30 저녁식사(무주구천동 입구 우리마을에서 버섯전골/도토리묵/파전)

21:00 취침(무주 토비스콘도-다인실)

9월 27일 일요일

06:00 기상

07:00 아침식사
(토비스콘도에서 북어국정식)

09:00 무주리조트 곤도라-설천봉->향적봉(1,614m) 오르기

관광 곤도라를 타고 해발 1천5백20m의 설천봉에 닿으면 덕유산 정상 향적봉(1,614m)을 20분만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는 적상산, 마이산, 가야산, 지리산, 계룡산, 무등산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빼어나다. 무주리조트 곤돌라는 줄곧 양비론과 양시론의 대상이 돼오고 있다.

긍정론자의 주장은 알피니스트들만 덕유산 정상에 올라야 하는 것이냐 반문하면서 엉뚱하게 <산악문화 기회균등론>을 펼치지만 덕유산의 수난과 환경파괴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덕유산 산상의 바람과 구름과 안개와 서리는 초겨울부터 나무마다 흰 꽃 형태의 수빙(樹氷)인 '상고대'를 피워내게 하지만 이 경관이 겨울스포츠맨에게 곤돌라를 통한 인기 관광 상품으로 제공되고 있다. 어질고 너그러운 덕유산이라 할지라도 견뎌내기 어려운 산상유람 서비스임에는 틀림없다.

덕유산에는 8개의 계곡이 있는데 그 중 북쪽으로 무주와 무풍 사이를 흘러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으로 빠져드는 설천까지의 70리 계곡이 바로 유명한 무주구천동 계곡이다. 폭포와 담과 소, 기암절벽 여울목들이 옥같이 맑은 계류와 함께 절경을 빚어 이른바 <구천동33경>을 이루고 있다고 관광안내서는 소개하지만 모두 지난 시절에나 간직되었던 수사학일 따름이다.

덕유산 일대의 역사문화자원을 어떻게 높은 품질의 '여행문화'에 접속시키게 할 수 있을지, 요즈음 용어로 하자면 덕유산 산악문화콘텐츠의 진흥개발이 제대로 수립되어야 할 일이다. 덕유산 고급문화 콘텐츠 작성 작업은 근원적인 것과 항속적인 것을 함께 숙고해야만 하는 것이겠는데, 과연 누가 숙고할 것인지?

무주리조트 바로보기->http://www.mujuresort.com

10:30-13:00 향적봉->백련사->구천동33경 하산 트레킹

향적봉에서 백련사를 거쳐 덕유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구역을 지나 구천동 입구(삼공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거리는 8.5km에 이르는데 약 2시간 30분 걸린다. 북덕유산에서 남덕유산의 종주등산을 권유하고 싶은 것은 산업기술문명의 바깥 자락이 남아 있음을 실감해보기 위함일 터….

덕유산 국립공원 바로보기 -> http://deogyu.knps.or.kr/
구천동33경 바로보기->http://tour.muju.org/index.sko?menuCd=AI01001001000

▲ 덕유산 하산길ⓒ프레시안

13:10 점심식사 (무주구천동 입구 명가에서 꺼먹돼지참나무장작구이/명가고냉지김치전골)

14:30 적상산 정상(1,034m) 드라이브

붉은 치마 바위산, 적상산(赤裳山)은 최영의 전설이 어린 안렴대라든가 <조선왕조실록> 4대 사고(史庫)지의 한 곳이던 산이었고 교통이 불편한 데다 산세까지 험준해 신선의 산으로 도술가들의 집합소였다. 허균의 한문소설 <남궁선생전>은 적상산을 배경으로 한국 신선도의 연단 수련을 소재로 하는 특이한 작품이다. 1608년(선조 41)에 40세의 그가 공주목사에서 파직 당하여 부안에 유배생활을 보낼 적에 남궁두(南宮斗)라는 도인을 만났다 했다.

이 소설은 적상산에 사는 선사(仙師)의 도술과 도통을 밝히는 판타지 문학인데 실제로는 임진왜란을 겪은 당대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었다. 나라는 다행히 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국토는 처참하게 유린당하여 백성들은 10명 중에서 대여섯 명은 살육 당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8도의 모든 도사들을 적상산에 불러 모아 신비한 방술의 성령대회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곧 적상산이 국토살리기운동의 본부가 되고 있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나걸(羅杰)이라는 당대의 실존인물을 거론하는데, 이 선비 역시 도사가 되기 위해 적상산에 숨어들었다고 밝힌다. 허균이나 박지원이나 이 산에 관한 묘사와 설명은 신비의 베일을 두르고 있었다. 이러한 적상산이 양수발전 시설로 망가졌다. 산 아래와 위쪽으로 두개의 저수지를 건설하여 양수발전을 하기 위해 산복도로를 뚫고 생태환경을 파괴했다. 그러나 멋모르는 이들은 산꼭대기 드라이브 코스의 교통 편리만 찬양한다.

16:00 용담댐 물문화관(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장수읍 수분리는 북쪽의 금강과 남쪽의 섬진강 물길이 나뉘는 곳이라 해서 이런 행정지명을 얻고 있지만 사진작가 강운구의 <마을3부작>은 비가 많이 내리는 이곳의 <건새집>을 영상 채집해놓은 소중한 책이다. 수분재 뜬봉샘에서 발원하는 금강의 물줄기는 진안 땅으로 들어서면서 용담면 월계리의 '용담댐'으로 입소하게 된다.

수몰면적은 950만평이고 2001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소양강댐⋅충주댐⋅대청댐⋅안동댐에 이어 국내 5위의 규모인데 대청댐과 물꼬 시비를 벌이기도 한다. 관광명소로 삼기 위하여 기념광장이라든가 생태공원을 조성해놓고 있다. 그리고 모반사건이라는 것을 일으켰던 정여립의 은거지 천반산과 죽도를 아우르는 '역사기행'의 순회코스도 마련해놓고 있다.

국토기행자로서 남한강과 금강의 발원지를 서로 비교 관찰해보게 된다. 두 강물의 시원지 일대는 고원의 스키장과 목장들이 염치불구하고 온갖 공해물질을 쏟아내고 있지만 무대책이 상책인 것처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걱정도 아니 하려는 것처럼만 보인다. 금강과 한강의 중하류 지역에서 생활하는 시민과 주민이 참 무던하기도 하다는 엉뚱한 사념에 빠지기도 한다. 아무리 오염된 물이라 해도 '정화 기술'이 워낙 발달되어 있으니 문제될 턱은 없다고는 하지만….

용담댐 물문화관은 지상 2층 건물로, 제1전시실에는 '지구의 탄생과 태초의 물' '지구촌의 물' '물의 순환' '고통 받는 물' 등 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용담다목적댐의 현황과 수력발전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의 제3전시실에서는 용담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에 대한 갖가지 기록물과 수몰지역 분포도, 금강 상류의 동·식물 자료가 전시되며 용담댐 전망대로 활용되는 야외테라스도 있다. 1980년에 준공된 대청댐에 비하자면 환경경제학이라든가 하천지형학에 대한 배려를 보다 충실히 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국토건문화도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16:30 서울로 출발

국토학교 참가비는 15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비와 뒤풀이, 입장료와 곤도라비, 여행보험료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10-2471-7410 또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9월의 답사 지도ⓒ국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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