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시작된 8월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5개항 합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북한 조문단 방문과 이명박 대통령 예방,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합의 등 굵직굵직한 일들로 채워졌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에 따른 대북 제재 국면은 대화와 협상 국면으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는 특히 북한의 대남 유화 제스처가 주목됐다. 북한이 대미협상에만 치중하고 남한과는 관계를 단절해 버리는 이른바 '통미봉남' 전략을 쓸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이는 북미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으면 남북관계도 같이 풀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북한이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국과 일본의 움직임이 미국의 운신 폭을 나름대로 제약하는 것을 확인한 북한도 통미봉남 같은 구식 전술은 이제 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지난 22일 있었던 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만남 장면 ⓒ연합뉴스 |
北 "면담 기회 주셔서 감사드린다"
북한의 대남 행보는 적극적이고 전면적이었다. 개성 억류자 석방을 시작으로 김정일-현정은 합의, 남북간 통행 및 북측 지역 체류 제한·차단 전면 해제까지 한달음에 이뤄졌다.
하이라이트는 특사 조의방문단의 서울 행보였다. '특사'는 김정일의 대리인이란 뜻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한테 만나 달라고 하고, 당장은 안 되니 하루 더 있다가 다른 나라 조문단들 올 때 같이 오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통령을 만나서는 "면담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하는 장면은 눈과 귀를 의심케 했다.
조문단이 돌아간 다음 날에는 새로운 소식이 쏟아졌다. 북한은 그동안 단절된 판문점 직통전화를 복구했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에 동의했다.
또한 그때부터 북한 매체들은 "이명박 역도"라는 말을 빼기 시작했다. 북한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조선신보>는 조문단이 이 대통령을 면담한 것에 대해 평양 시민들이 "참 잘됐다"는 말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회담에서도 북한은 꽤 많은 걸 양보했다. 국군포로·납북자 관련 문구를 합의문에 넣는 문제 외에는 날짜, 장소 등 거의 모든 걸 남쪽이 하자는 대로 했다. 합의문에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정신에 따라" 같은 표현을 넣자고 고집하지 않았고, 식량 지원 문제는 꺼내지도 않았다. 회담 직후 북한은 지난달 30일 예인해 간 '800 연안호'를 풀어주겠다고 알려왔다.
南 "입장 변화 없다"
이명박 정부도 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적십자회담을 먼저 제안했고, 회담이 열리자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지만 합의문에 관련 문구를 담는 것은 추후로 미뤘다. 올 안에 추가 상봉 행사를 열고 상봉을 정례화하자는 주장도 일단 접었다.
그에 앞서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북한 조문단과 회담과 만찬을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그들을 만난 것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북측에 비해 남측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고 변화의 폭은 좁았다. 대북 인도적 지원에 관한 정부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7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비공개 간담회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 장관은 지원 시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통일부 당국자는 "인도적 지원과 관련해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는 부분은 없다"고 확대 해석을 차단했다. 이 당국자는 또 쌀·비료 지원에 대해서는 "정부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대규모 식량·비료 지원은 당국간 협의 채널을 통해 해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먼저 요청을 해야 협의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 그대로다.
10번째 열리는 적십자회담에서 '제10차'라는 표현을 넣는 것을 거부한 것은 전임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해석됐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 날짜를 제안하면서 10.4 정상선언 2주년 기념일이 포함되지 않도록 한 것도 10.4 선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남북관계 전환 준비 비족 △북한에 주도권을 뺏긴 채 휩쓸려 가면 안 된다는 방어적 심리 △보수 지지층 이탈 우려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보수언론들은 북한의 최근 움직임에 대해 '남남갈등 조장 시도'나 '제재 모면을 위한 위장 평화공세'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들이 정부 고위층의 머릿속을 지배하다 보니 이산가족 상봉 같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문제만 일단 처리하고 보자는 것 같다.
김양건 "금강산 신변 안전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
북측은 손을 내밀었고, 남측은 그 중에서 손가락 두 개 정도만 골라잡은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북관계가 복원되더라도 김정일-현정은 5개항 합의를 이행하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그 정도면 이명박 정부도 진보나 보수 양쪽에서 오는 비판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고, 북한도 미국에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정일-현정은 합의 이행이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항 남북 통행 및 북측 지역 체류 정상화는 이미 이행됐고, 4항 백두산 관광은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이며, 5항 이산가족 상봉은 합의가 됐지만, 뜨거운 감자는 1항 금강산 관광이다.
정부는 관광 재개를 위해서는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방북자 신변 안전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이 충족돼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김정일-현정은 합의 3항에 나오는 개성 관광 재개도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돼야 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소식통은 전한다. 금강산과 개성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다. 개성 관광은 금강산과 달리 북측의 결정으로 중단됐기 때문에 북측의 의지가 있는 이상 별 문제없이 재개될 것이라는 관측은 빗나갔다.
하지만 금강산 관광 재개에 관한 북측의 입장은 다르다. 김정일-현정은 면담 후 조선아태평화위원회와 현대그룹이 발표한 공동보도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취한 특별조치에 따라 관광에 필요한 모든 편의와 안전이 철저히 보장될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걸로 필요한 조치는 끝났다는 게 북측의 생각이다.
이는 조문단의 일원으로 내려온 김양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21일 만찬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현 회장을 만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는데 그만큼 확실한 게 어딨냐"고 말했다고 동석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전했다.
이에 정 전 장관은 "남쪽은 성문법적 사고가 있기 때문에 신변 안전에 관해 문서로 단단히 보장해 놓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 부장은 "수뇌급 합의 문서인 6.15 선언이나 10.4 선언도 안 지키는 마당에 하위 문서가 무슨 소용이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작년 관광객 사망 사고 후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에 유감 표명이 있었던 점 등을 들어 '관광 중단을 결정한 남측이 풀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견해차가 계속된다면 금강산 관광 재개는 난항을 거듭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한 번 더 전향적으로 나오고 남측도 거기에 호응한다면 김정일-현정은 5개항 합의 정도로 남북관계가 복원되는 시나리오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게 안 될 경우 북한은 다시 한 번 판을 깰 것인가? 그에 대해서는 아직은 전망이 엇갈린다. 북한이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의미에서 남북관계 중 되는 것만 하면서 끌고 갈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미국을 향해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쪽이 거부한다'면서 남북관계를 다시 닫아버릴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8월의 한반도'에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일본 총선에서 집권이 확실시되는 민주당이 대북정책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도 중요 변수다. 미국의 발목을 잡아 왔던 한국과 일본 중 한 나라만이라도 태도를 바꾼다면 오바마 행정부의 운신 폭은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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