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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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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의 두 얼굴

[대결, 차베스와 룰라]<9> 차베스 집권 10년 (2)

지난 10년의 베네수엘라 정치는 세계 정치사에 등장할 법한 정치적 사건들의 압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전적인 혁명의 3요소도 모두 갖춘 것으로 보인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민중의 정치적 각성과 해방적 열정,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쿠데타 세력의 음모까지. 양 세력의 전투는 격렬하다. 간간이 총격전의 비극이 발생하였고, 언어 총탄의 난사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양 진영 내부도 복잡하다. 변절과 배신이 판을 치고, 뜨거운 동지애와 연대의 감격도 돋보인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만의 고유한 사건들도 있다. 24시간 유폐되었다가 극적으로 권좌에 복귀한 보기 드문 반전이 있었고, 서구정치사상 최초로 개최된 국민소환투표로 대통령을 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베네수엘라 정치는 심원한 구조 변화를 겪었다. 필자는 차베스 정부가 맞이한 정치적 위기를 기준으로 세 시기로 나누어 분석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차베스 정부는 정치적 위기를 해결해가면서 개혁을 강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차베스 지지자들과 반차베스주의자들의 순수한 전투과정이 아니었다. 차베스정부의 오류 및 대중적 반정부세력의 형성 등 복잡한 사건이 숨겨져 있다.
▲ 국영 석유회사의 실질적 국유화 조치를 기념하는 조각상 ⓒ박정훈

40년 정치체제의 붕괴

제1기는 1999년 제헌의회 소집 국민투표 실시했을 때부터 2002년 4월 14일 차베스 대통령이 48시간의 유폐 끝에 권좌에 복귀할 때까지로 볼 수 있다.

구 연정 세력들은 199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차베스 후보의 대중적 인기에 놀라서 대선과 함께 개최하던 총선을 분리해 앞당겨 실시했다. 그것을 인식하고 있던 차베스 대통령은 1999년 집권하자마자 대선 캠페인에서 이미 약속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구 연정의 조기총선결과도 무효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제헌의회 선거에서 집권 연정은 70%에 육박하는 의석을 차지했다.

제헌의회가 제정한 신헌법은 국민투표를 거쳐 공포되었으며 신헌법에 따라 다시 대선을 치른 차베스는 2000년 임기 6년의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했다. 일련의 정치개혁 과정으로 차베스 대통령은 정치적 신임을 재확인했으며 의회에서도 다수파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제 차베스 정부는 국가의 구조개혁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1년 의회가 대통령에게 한시적으로 부여하는 대통령특별입법권을 활용해 49개 개혁 법안을 선포했다. 개혁안의 핵심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민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국영석유회사에 대한 국유화 조치를 더욱 강화하여 더 많은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이를 사회정책에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불평등한 토지소유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농업생산량도 높이고 식량주권도 회복하겠다는 정책목표였다.

이 과정을 둘러싼 정쟁이 격화되자 "기득권층의 예견된 반발"이라는 차베스주의자들의 주장과 "전체주의 독재"라는 반차베스주의자들의 입장이 격돌했다. 사실 차베스 정부의 개혁 정책에 맞선 기득권층의 반발은 예상된 것이었다. 하지만 차베스 지지자들의 단순논리처럼 이 저항을 단순히 기득권층의 반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 사보타주 시기의 '민중시장'에서 발전한 빈민지역 식료품 유통체인 메르깔 ⓒ박정훈

중도파와 중산층의 반대

차베스 정부의 정책 목표에는 동의했지만 처리 절차 및 개혁안의 내용에 대해서는 연정 내부의 견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개혁의 속도에 집착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의회에서는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의회 내의 공론화 과정을 생략되었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위임받아 직접 입법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연정 내부의 비판자들이 이탈했다. 이탈자 대열에는 연정에 참가하고 있던 비차베스주의 좌파인 사회주의 운동당(MAS) 지도자에서부터 차베스주의 좌파인 제5공화국운동(MVR) 지도자까지 두루 포함되었다.

비판자들의 이탈로 인해 기득권층(과거 양당체제의 잔당들, 기업가들과 어용 노총지도부)으로만 한정되었던 반정부세력은 다양해졌다. 여기에 중산층의 대중적 지지까지 더해졌다. 대부분이 공식부문의 노동자로 구성된 중산층은 40년 엘리트 연정체제의 대중적 기반이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이 중산층 복지마저 파괴하려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 후보에 표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차베스 대통령의 급진주의 노선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게다가 차베스는 석유수출국기구의 강화로 고유가 정책을 주도하고자 이라크의 후세인 및 리비아의 가다피와 회동하였고, 쿠바와의 우호를 다지는 등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외교 행보를 보여주었다.

베네수엘라 중상류층은 차베스의 반미외교 정책을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적으로도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미국화한 나라 중에 하나이며 중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은 다수의 라틴아메리카적 빈민의 경우와 달리 미국적이기 때문이다.

중산층 시민들은 1970년대 석유 붐의 수익으로 건립한 무상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석유 수입으로 계속 확대해간 석유공기업 등의 공공부문에 취직하여 휴가 때는 마이애미로 여행을 떠나고 평소에는 야구를 즐기는 생활을 즐긴다.

이제 반차베스 정치세력은 중산층 시민들의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의회를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그 정점에 2002년 4월 12일의 쿠데타가 있다. 2002년 4월 12일 대규모 시위 군중을 동원하여 집회를 개최한 뒤 반정부세력은 대통령궁으로 행진하였고,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들(대체로 빈민계층)도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주위에 결집했다. 그때 양측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에 진상에 대해선 베네수엘라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일치된 합의가 없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당시 발포자들은 반차베스 시위대를 호위해오던 까라까스 시 경찰(까라까스 시 경찰은 반차베스 진영의 까라까스 시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과 차베스를 지지하는 시민 결사체 볼리바르 단(Ci?rculos Bolivarianos), 그리고 다수 시민이 증언하는 저격수들이었다. 이 유혈사태로 양 진영에 속하는 시민 20여명이 사망했다.

유혈사태 뒤에 차베스 정부는 준계엄령에 해당하는 아빌라 계획을 발동하였고, 반대파의 극우파 진영(기업가, 엘리트 연정체제의 잔당, 군내부의 특권층, 어용 노총 지도부 등)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금도 그 당시 양 진영 시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했다고 알려진 저격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 물론 이 혼란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세력이 배치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또한 정치적 대결이 유혈사태로 번진 것에 대해선 정치 세력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은 시위 중에 벌어진 유혈사태에 대해서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겠지만, 쿠데타 이후에 벌어졌던 극우파에 의한 인권유린의 진상도 밝혀져야 한다.
▲ 빈민가에 들어선 정보센터 ⓒ박정훈

미국의 냉전 수법의 실패

쿠데타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쟁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미국의 개입에 관한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가 직접 개입했는지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는지 지금까지 논란이 분분하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임시정부를 즉각 인정한 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나라는 이라크에 동맹군을 파견한 아스나르 총리의 스페인이었으며, 오랜 외교 전통인 불간섭 원칙을 깨고 쿠바 고립 정책을 지지한 비센떼 폭스 대통령의 멕시코였다.

이 세 국가의 행위는 좌회전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부터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국이 냉전 시대의 낡은 수법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극우파 진영은 쿠데타를 일으킨 뒤 극우파 인사들로 배타적인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 진영 내부가 중도파에서 극좌파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했으며 반대파 내부는 쿠데타 지지여부를 둘러싸고 갈렸다. 한편 쿠데타는 차베스 대통령지지 세력의 결집을 가져왔다. 군내부에서는 입헌 장교들의 저항이 발생하였으며 빈민계층의 헌신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입헌장교들에 의해 구출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4월 14일 새벽 대통령궁으로 귀환했다.

이것이 차베스 정부의 급진주의 정치가 겪은 첫 번째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에 차베스 정부는 정치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여 40년의 엘리트 연정체제의 기반을 붕괴시켰으며 정치구조를 재구축했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은 집권 연정 내외부에 존재하는 중도파 정치세력과 그들의 지지계층인 중산층을 고려하지 않는 급진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 분배 받은 공동농장에서 작업하는 농민들 ⓒ박정훈

빈민 복지제도의 구축

제2기는 2002년 4월 대통령이 권좌에 복귀한 뒤부터 2004년 국민소환투표에서 승리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반대파 진영은 전열을 가다듬고 2002년 말부터 2003년 초까지 노·사 공동 사보타주(고의로 벌이는 재산파괴, 태업)를 벌이며 반격에 나섰다. "국가 속의 국가"라 불리는 국영석유회사(PDVSA)의 경영진, 엔지니어들, 노동자들은 국가의 중추 산업을 마비시켰으며 자본가들은 주요 기업들, 대형유통매장 등의 사업장을 폐쇄하였다. 두 달에 걸쳐 국가 경제와 석유산업이 마비되었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차베스 정부는 사보타주가 빈민층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국영석유회사를 가동하기 위해 파업 불참 엔지니어와 노동자들, 은퇴한 엔지니어와 노동자들까지 총동원해 석유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또한, 생산된 석유는 파업지지층이 주로 거주하는데다가 파업에도 가담하고 있는 까라까스 동부 지역 주유소에는 공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까라까스의 서부 빈민지역 주유소에는 꾸준히 공급하였다. 또, 파업에 참가한 식품 가공 및 유통 기업들로 인해 빈민 지역의 식품 공급이 부족해지자 정부는 군을 동원하여 직접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직거래장터인 대규모 "민중시장"을 수도 까라까스 한복판에 설치했다.

바로 이 기간 동안 차베스 정부의 사회개혁 정책의 가닥이 잡혔다. 그것이 쿠바 카스트로 정부의 조언에 의한 것이든 빈민운동에 오래 몸 담아온 좌파들의 발상에 의한 것이든 차베스 정부는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사보타주 기간의 "민중시장"은 훗날 빈민지역 식료품 유통체인(Mercal)으로 발전하였다. 빈민들이 무단 점유하고 있던 도시 지역 토지들이 분배되었고, 빈민 거주 지역 곳곳에는 무상진료소가 설치되었으며(Barrio Adentro), 무상교육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컴퓨터를 구경한 적도 없을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해 무상 정보센터가 설치되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공동체가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토지 분배가 이뤄졌고 협동조합이 활발하게 건설되었다. 이같은 차베스 정부의 사회정책은 빈민층을 정부의 지지기반으로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시기 차베스 정부의 사회정책 추진 과정은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 빈민과 농민 공동체와의 상호 협력과정이었다. 1989년 이후 도시빈민가에 등장한 풀뿌리 조직들은 1998년 대선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되고 활력을 띄게 되었다. 특히 사회개혁정책의 본격적인 추진과 함께 빈민가의 조직들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각각의 개혁 정책이 추진될 때마다 주민 조직들이 등장하는 식이었다. 토지위원회, 의료위원회, 교육위원회 등이 등장하였다.

또한 빈민 지역에는 대안미디어 운동을 전개하는 공동체 라디오들이 조직되어 있다. 특히 2002년 4월 쿠데타 정국에서 대통령이 사임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로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빈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빛을 발했다. 그 이후 개혁 추진 과정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 총을 쏘는 카라카스 시 경찰 ⓒ박정훈

국민소환투표의 승리

빈민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들은 차베스 집권 10년 동안 민주정부 40년 간 정치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던 인종적 하위주체(혼혈인, 흑인)와 계급적 하위 주체(빈민계층)들이 제도 밖에서는 물론이고 제도 내에서도 정치 주체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역설적으로 차베스 정부는 잠재적 반대 세력도 정치적 주체로 각성시켰다. 베네수엘라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지만 중산층 시민들이 이렇게 전투적으로 반정부시위를 벌인 경우는 없었다. 앞서 제1기에 언급한 것처럼 차베스 정부의 급진주의 정치, 반미외교에 반감을 가졌던 이들은 2002년의 쿠데타와 사보타주 등과 같은 정치적 사건이 야기한 경제위기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중산층이 차베스를 반대할 이유를 하나 더 갖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반대파 진영의 정치적 주도권이 극우파에서 중도파(중도 우파)로 넘어갔다. 쿠데타도 마다하지 않았고 국가경제를 파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특권층의 영향력을 급격히 축소시켰다. 이제 반대파 진영은 그간 인정조차 하지 않았던 신헌법에 따라 국민소환투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04년 세계정치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국민소환투표가 개최되었다. 1958년 베네수엘라 민주화 이래 처음으로 빈민을 위한 복지제도를 구축하기 시작한 차베스 정부가 59% 지지로 완승했다.

국유화 정책

제3기는 2006년 차베스 대통령이 재선된 뒤부터 2009년 올 초 실시된 연임제한 철폐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때까지를 포괄한다.

이 시기 차베스 대통령은 1980년대 외채위기 이래 도입되었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수정한다. 이른바 전략부문의 국유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사실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초기 경제 정책은 기존 정부의 거시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으며 전 정부의 재무장관을 그대로 유임하기도 했다. 당시 유가는 사상 최저가였으며 집권 원년 경기는 침체에 빠져 있었다.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를 수입하는 선진국의 이익이 아니라 석유생산국의 이익을 위한 기구가 되도록 석유 생산을 줄이는 고유가 정책을 주도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유가가 서서히 상승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물가도 근 20년 간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 시기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는 경제 노선의 급진주의 때문이 아니라 쿠데타, 사보타주 등 정치적 위기로 인한 자본유출 때문이었다.

그런데, 차베스의 경제 정책은 2006년 대선을 앞두고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을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차베스 정부는 국민소환투표의 승리를 통해 정책 추진의 자신감을 회복했다. 또한, 석유산업 개혁을 마친 차베스는 국제적인 유가의 고공행진 덕에 국가재정도 넉넉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민영 기업을 사들일 자원도 갖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주요 주변국들에 좌파 정부들이 집권하면서는 국제적인 고립의 가능성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불평등과 빈곤은 시장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키고 국가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가령, 2003년 경 라틴아메리카 국민들 가운데 민영화가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시민의 비율은 21%에 불과했다.

차베스 정부는 재선 이래로 석유, 전력, 통신 등의 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왔으며 2008년 말의 세계경제위기 발발 이후에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2008년 한 해 동안 국가의 절반 이상이 약 8시간 동안 전력 공급이 중단되는 대규모 정전 사태가 세 차례나 발생하여 국영기업의 신뢰를 추락시키기도 했다.
▲ 2002년 12월 사보타주에 참여한 카라카스 동부 지역 주유소 ⓒ박정훈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개혁

이 시기에 차베스 대통령은 2006년 대통령 선거 전부터 공언해온 연임제한철폐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2007년과 2009년 올 초 두 번에 걸쳐 추진했다. 2007년에는 찬성 49%, 반대 51%로 부결되었다. 차베스 대통령에게는 처음 벌어진 투표에서의 패배였다. 1998년 이래 그는 어떤 종류의 투표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충격은 컸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2008년 말의 지방선거를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절치부심했다. 그 결과 2009년에는 55%에 가까운 찬성을 얻어 연임제한철폐가 이뤄졌다. 이를 둘러싸고 베네수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개혁 정책의 지속성" 프레임 대 "장기 집권의 포석"이라는 담론 투쟁이 벌어졌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사람들은 차베스가 3선을 원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마거릿 대처가 3선 총리였다는 것엔 비난하지 않을까?"고 말한 적이 있다. 룰라는 차베스를 비난하는 우파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도 높게 추진한 마거릿 대처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면서 우파 정부의 이중성을 비판했다.

사실 연임제한 철폐 개헌보다도 더 근본적인 쟁점은 지난 10년간 추진해온 개혁 정책이 우고 차베스라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0년간 차베스 정부의 집권 연정 내부에서 차베스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왔다. 2006년 대선 전에 차베스 대통령은 집권 연정을 아예 단일정당으로 재편하자고 일방적으로 제안했다. 연정 참가 세력들은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PUSV, Partido Socialista Unido de Venezuela (PUSV))으로 합류하였지만 각 정당 마다 격렬한 논쟁 과정을 겪어야 했다.

또한, 내부 이탈자들이 꾸준히 반정부진영에 합류하는 일이 발생해왔다. 2007년에는 라울 바우델 전 국방장관이 차베스의 연임제한 철폐 개헌 추진을 가리켜 "쿠데타"와 다름없다고 맹비난했다가 차베스 정부에 의해 부패혐의로 체포되었다. 바우델 장관은 차베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1970년대부터 동지였으며 2002년 차베스가 감금되었을 때 그의 구출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미국 출신 사회학자로서 차베스 정부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해온 그레고리 윌퍼트도 빈민 계층에서 차베스에 대한 모종의 숭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한다. 빈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활발하게 성장해가고 있는 한편에서는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지지현상도 존재한다.

한편, 반차베스 진영은 새로운 원군을 맞았는데 그것은 바로 대학생운동의 등장이었다. 이것은 2007년 연임제한철폐개헌 투표에서 차베스가 패배한 이유 중에 하나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개헌을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빼앗아 권력에 더욱 많은 권력을 주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이에 맞서는 차베스 지지 학생운동도 활성화했는데 이들은 차베스야말로 민중에게 권력을 양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반박했다. 지난 10년간의 정치적 논쟁의 격화가 이젠 대학생 사회 내부의 정치적 대결도 낳게 되었다.

두 명의 차베스

지난 10년간의 차베스 정부는 40년 베네수엘라 '민주주의'가 한 번도 대변한 적이 없는데다가 20년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더욱 가난해지고 불평등해진 채 때론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되기도 한 빈민계층의 복지를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과 차별을 해결하는 그의 방식은 베네수엘라 사회의 통합을 지향하기 보다는 베네수엘라의 분열을 더욱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적 중도파와 중산층을 반대파로 돌아서게 만들면서 베네수엘라 사회의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베네수엘라 야당들은 차베스 대통령을 사이코라고 비난하고 빈민들을 룸펜이라고 모욕하는 데 열중하지만 차베스 정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무능했다. 이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쿠데타를 일으켜 감금하기도 했고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는 사보타주로 국내외의 비난을 샀다. 게다가 신헌법에 따라 국민소환운동, 개헌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진영은 차베스가 추진해온 사회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콜롬비아 문호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차베스 대통령을 만나 인터뷰한 뒤에 그가 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고 썼다. "한 명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나라를 구할 지사요, 또 다른 이는 절대권력자로 역사에 기록될 지도 모를 몽상가"라고 적었다. 그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모든 정치적 기획은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정치학자들이 가장 분주한 세기였던 20세기에 수많은 이념들과 체제들이 등장했지만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체제는 그리 많지 않았다. 차베스 체제도 시간의 시험을 피해갈 수는 없다.

지금 차베스는 20세기 내내 베네수엘라를 괴롭혀온 문제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석유 가격의 급락이다. 석유는 한때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국가로 만들어주었다가 결국 가난한 사람을 희생시켰던 검은 황금이자 검은 악마였다. 그간 석유가의 고공행진으로 차베스는 빈민복지정책을 전면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으며 베네수엘라를 남미 대륙의 리더로 부상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표면화한 세계경제위기의 여파로 석유가가 급락하기 시작했고 석유는 차베스 정부의 최대 정적으로 돌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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