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한국인들은 베네수엘라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부시 전 미국대통령을 "악마"라고 조롱하고 팔레스타인 침공에 항의해 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한 차베스 대통령은 최근 아랍 민족들에게 새로운 반미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사실 라틴아메리카에서 베네수엘라가 대륙적 관심을 독차지한 것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냉전 시대 이 나라에서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거나 게릴라 운동이 정부를 위협한 적도 없었습니다. 드라마틱한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에는 수많은 주인공 국가들(사파타와 비야의 멕시코,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쿠바, 아옌데의 칠레, 산디니스타의 니카라과 등)이 등퇴장했지만 베네수엘라는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베네수엘라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정치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초 남미 북부 5개국(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독립을 위해 스페인제국에 맞서 싸운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이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아우르는 합중국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던 그의 이상주의는 그 후 '양키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이 대륙의 좌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20세기 초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미국계 스탠다드 오일 사(현재의 엑슨모빌)가 석유개발을 위해 뛰어들었습니다. 석유 붐을 타고 수많은 이민자들도 이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1930경에는 세계2위의 석유생산국이자 세계1위의 석유수출국이 되었고, 1970년대 오일쇼크 시대에는 막대한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남미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 21세기 초 베네수엘라는 다시 국제 뉴스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이 세계인의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올해 10년 집권을 맞이한 차베스 대통령의 첫 번째 업적은 무엇보다도 베네수엘라와 자신을 국제적인 이슈메이커로 만든 것입니다.
10년 전 1999년에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만해도 베네수엘라 좌파 정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조차 고질적인 정정 불안이 낳은 예외적인 사례로 간주될 정도였습니다. 그 분석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라는 게 금세 드러났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이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정치적으로 좌회전하는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10년간, 1999년과 2009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에서는 심대한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대륙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민주선거로 집권한 우파들조차도 자신을 더 이상 신자유주의자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 변화의 특징에 대해서 제가 1강에서 이미 묘사했습니다.
▲ 자유의 여신상으로 분장한 반차베스 시민 ⓒ박정훈 |
총성 없는 내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집권 10년을 분석하고 평가하기 전에 먼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와 개혁 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장작을 지고 격렬한 논쟁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아무리 공정한 입장을 지키려 애를 쓴다고 해도 모두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고 맙니다. 내부의 당사자이든 외부의 관찰자이든 차베스 집권 10년에 관해 발언해온 사람들은 즉각적인 반박 혹은 열광적인 환호를 받아왔습니다.
이것은 지난 10년간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져온 격렬한 정치 대립 현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10년 동안의 베네수엘라의 정치 대립의 양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총성 없는 내전'이라고 할 만합니다. 때론 일촉즉발의 내전 전야 상황이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2002년 4월에 발생한 쿠데타 당시에는 차베스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20여명의 시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쿠데타가 발생해 대통령이 48시간 감금되었다가 권좌에 복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10년간 언어의 전쟁도 거침없었습니다. 마치 한국의 '노빠'와 '노까'의 논쟁처럼 '차베스빠(chavista)'와 '차베스까(antichavista)'가 격돌하였습니다. 2002년 야권 파업 당시에 저는 반 차베스 진영의 기자회견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연단에서 한 '차베스까' 인사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사이코'라 모욕하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빈민들을 '룸펜'이라고 조롱하더군요. 이에 차베스 대통령도 반대파지지 중산층을 향해 '쿠데타 지지자들', '파시스트'라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베네수엘라 까라까스의 한 택시기사는 내게 차베스 지지 여부를 놓고 다투다가 부부가 이혼하게 된 사연까지 전하였습니다.
격렬한 정치적 대립 뒤에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베네수엘라 수도를 방문해 친차베스 정부 시위와 반정부 시위를 보게 되면 이들 양측 시민들이 국적과 야구에 열광하는 취미 이외에는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거주 지역에서부터 경제적 수준과 피부색은 물론이고 복장과 정치적 상징물도 모두 명확히 구별됩니다.
수도 까라까스는 두 개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부 지역에는 구릉을 타고 빈민 주택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 주민들 다수는 혼혈인과 흑인들입니다. 이곳이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적 요람입니다. 이 지역의 빈민들은 동일한 색의 셔츠를 맞추어 입고 빈민가의 공터로 모여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합니다. 반면, 동부 지역은 회원제 컨트리클럽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부유한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주로 백인들이 거주합니다. 이 지역에 위치한 한적한 공원에 집결한 중산층과 상류층의 시위대는 카라카스 중심가를 향해 행진합니다.
이 두 시위대가 들고 가는 정치적 상징물도 천양지차입니다. 반정부시위대 속에는 뉴욕의 명물인 자유의 여신상의 이미지로 변장한 시민이 행진합니다. 반면 친정부시위대에는 이 나라의 '국부'이자 차베스 대통령의 사상적 지주인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은 물론이고, 쿠바 혁명의 지도자 체 게바라의 초상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제가 베네수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뉴욕과 아바나를 동시에 방문하고 돌아온 기분"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베네수엘라 정치 논쟁의 불똥은 한국에도 튀었습니다. 한국 보수언론은 차베스를 '급진적 포풀리스트'라고 조롱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했습니다. 반면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차베스를 '미제국주의와 맞장 뜬' 반미의 선봉장으로 찬양했습니다. 나아가 우고 차베스 정부의 개혁 정책을 "사회주의의 새로운 대안"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진보진영이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정치적 대립 뒤에 가려진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기에 우리는 정치적 대립의 수사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이념적 공방이라는 안개를 걷어내야 지난 10년 우고 차베스 정부가 이룬 객관적 성취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저는 2002년 4월 쿠데타 직후, 2002년 말 야권의 반정부파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중남미 좌회전의 절정이었던 2006년 총 세 차례에 걸쳐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습니다. 첫 방문에서 마지막 방문까지 날 사로잡았던 질문은 베네수엘라 사회가 이룬 실질적 성취는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뜨거운 정치공방 뒤에 자리잡은 객관적 성취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차베스: 모두를 위한 사랑, 정의, 평화, 도덕적 존경, 교육, 진보, 존엄성" 베네수엘라 빈민들이 정의한 차베스 ⓒ박정훈 |
반공 엘리트의 연정 체제
2002년 4월 쿠데타 직후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을 때 일간지 [엘 문도]의 편집장은 차베스는 하나의 정치현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차베스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차베스 대통령의 탄생 배경부터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차베스 집권 이전시대, 1958년부터 1998년까지의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의 주요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58년에서 1989년까지의 시기를, 그 다음에 1989년에서부터 1998년까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1989년을 시기 구분점으로 삼은 이유는 이 해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이 본격적으로 적용되었으며 같은해 도시빈민들의 까라까스 빈민항쟁(caracazo)이 발생하였기 때문입니다.
1989년 이전의 베네수엘라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드물게 정치 안정을 유지한 나라였습니다. 1958년 군사독재를 퇴진시킨 베네수엘라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뿐또 피호(Punto Fijo) 협약을 체결합니다. 이 협약의 골자는 어느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연정을 구성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이것은 정쟁의 격화로 인한 군의 정치개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좌파 세력을 배제시킨 반공주의 연정체제였습니다.
베네수엘라 공산당(PCV)은 비록 소수 정당이기는 했지만 조직노동운동에서 연정의 핵심세력인 민주행동(AD)과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또한 연정 체제는 석유산업 노동조합처럼 조직된 노동조합 세력과는 코포라티즘 관계를 맺었지만, 다수의 미조직 부문(도시 노동빈민층과 농민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베네수엘라의 정치 안정을 이룬 연정체제는 반공 엘리트 정당들의 연정체제였습니다.
사우디-베네수엘라
또한, 이 시대 베네수엘라는 석유산업을 기반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1970년대에는 남미에서 국민총생산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기도 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1929년 세계2위의 석유생산국이자 세계1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급성장하였습니다. 1935년에 이르면 석유는 베네수엘라 수출의 91.2%를 차지하게 됩니다.
1948년에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위해 공기업 베네수엘라 석유회사(국영석유회사(PDVSA)의 전신)가 창설되었으며, 1960년에는 선진국 석유대기업 카르텔에 맞서 산유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결성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국 기구 창설의 주역이었으며, 아메리카 국가로서는 유일한 참가국이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외국계 석유 메이저 회사로부터 자국 자원의 이익을 방어할 수단을 갖추게 된 베네수엘라는 1970년대 최고의 석유 붐 시대를 맞았습니다. 1973년(우리 입장으론 오일쇼크) 중동을 비롯한 산유국들이 석유 생산량을 줄이자 국제유가가 급증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도 오일달러의 유입으로 세수가 급증하자 재정 수입도 급증하면서 재정지출이 확대되었습니다.
1976년 마침내 베네수엘라 정부는 석유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 시대 베네수엘라는 '사우디베네수엘라'는 별명을 얻었고, 남미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이 가장 높은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석유 산업의 호황을 바탕으로 국가는 경제활동인구의 50%를 고용하였으며, 중산층을 위한 무상국립대학을 건립하는 등 복지투자도 확대되었습니다. 그 시절 국가보조금으로 위스키를 수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위스키 소비가 많은 나라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석유산업의 호황기 고용과 복지에 대한 투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된 중산층을 형성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유가 급락과 국제적 고금리로 인해 외채가 급증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도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외채의 덫에 걸렸습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자국 통화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정부 보조금으로 물가 상승 압력을 막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1980년대의 마지막 해인 1989년에 집권한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 카스트로 초상이 담긴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 반차베스 시민들은 차베스가 쿠바에 돈을 퍼주고 있다고 비난한다. ⓒ박정훈 |
이 같은 정치경제적 특징으로 인해 베네수엘라는 나머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다른 길을 걷습니다.
첫째, 베네수엘라는 라틴아메리카 나라치고는 아주 드물게 군사쿠데타가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뿐또 피호 체제를 통해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정체제에 속한 정당들은 중산층과 상류층의 정치적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베네수엘라 노동조합 총연맹(CTV) 소속 노동자계층도 안정된 중산층에 속하였으며 명목상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민주행동당의 정치적 지지기반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노동조합 총연맹(CTV) 소속 조합원은 약 130만 명에 이르는데 베네수엘라 공식 부문의 노동자 수가 130만 명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석유호황기 경제활동인구의 50%를 고용한 공공부문의 일자리는 연정체제에 속한 정당 지지자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자원을 분배하는 후견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베네수엘라는 혁명적 좌파 운동에 지지가 대단히 미약한 나라였습니다. 1958년 민주화 이전 시대에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던 공산당은 뿐또 피호 체제 이후에 베네수엘라 연정체제에서 배제되었고 당의 대중적 기반이었던 노동조합세력이 연정체제의 코포라티즘 체제에 흡수되면서 정치적 소수파로 전락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 공산당은 1960년대 쿠바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게릴라 혁명 운동에 나섭니다. 하지만 연정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게릴라 혁명운동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1960년대 베네수엘라에서는 농민층이 급속도로 붕괴되면서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계급구조가 현대화된 국가였습니다. 1960년 당시 농촌거주자는 전체인구의 35%에 불과했습니다. 즉 게릴라 혁명 운동의 대중적 기반인 농민층이 급속도로 도시로 이동해 도시빈민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베네수엘라 연정 체제는 중·상류층을 우대하고 빈민층을 배제시킨 특권체제였지만, 다른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처럼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혁명적 좌파의 무장투쟁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9년의 도시빈민항쟁과 이에 대한 유혈진압 이후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까라까스 라 베가 빈민가 비탈길엔 체 게바라, 차베스, 독립 영웅 사모라의 초상이 보인다. ⓒ박정훈 |
까라까스 빈민 항쟁
지금부터는 1989년부터 1998년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언덕에서 내려온다"는 말이 도시빈민의 항쟁을 뜻하게 된 것은 1989년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면 도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곳은 서울의 달동네처럼 수도 까라까스 서부 지역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언덕들입니다. 1989년은 베네수엘라 현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해입니다. 그 해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에 맞선 도시빈민들의 대규모 항쟁이 발생하였습니다.
1989년에 취임한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이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강요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1989년 2월 26일 정부는 재정긴축 기조에 따라 국가 보조금 지출을 줄이기 위해 유가와 대중교통요금을 각각 30%씩 인상하고 점점 인상 폭을 높여 100%까지 인상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1980년대의 경제위기로 인해 더욱 가난해진, 도시빈민계층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카라카스 빈민 항쟁 (Caracazo)이 발생한 것입니다. 정부 발표 이튿날 1989년 2월 27일, 수도 까라까스까지 원거리를 오가는 위성도시에 거주하는 도시빈민들의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삽시간에 수도 까라까스의 빈민들도 항의 시위에 나섰습니다. 초기의 평화 행진은 곧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인해 폭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성난 군중에 의한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도시빈민의 항의에 맞서 초강경정책을 구사하였습니다. 28일 정부는 '아빌라 계획'이라 불리는 비상사태를 전격적으로 선포하고 정부군의 개입을 승인하였습니다. 폭동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군은 시위 군중에 발포하였습니다. 유혈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3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까라까스 빈민 지역에서는 정부군에 의한 체포,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처형 등 인권 유린도 벌어졌습니다. 2002년 미주인권재판소는 1989년 베네수엘라 정부가 발동한 '아빌라 계획'이 대규모 인권 침해를 낳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빈민 항쟁에 대한 유혈 진압, 공금을 유용한 부패 혐의로 기소된 대통령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는 결국 임기 중 퇴진하였습니다.
1989년 신자유주의 도입에 맞선 카라카스 빈민항쟁(Caracazo) 이후 베네수엘라 정치는 근본적인 변화기를 맞았습니다. 1992년 2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군사쿠데타 시도가 발생하였습니다. 비록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40년간 유지되어온 베네수엘라의 연정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좌파의 등장
1989년 빈민항쟁과 유혈진압은 베네수엘라의 반공 엘리트 연정체제의 가면을 벗겨주었습니다. .
석유 호황기 중·상류층의 고용과 복지를 위해 투자한 베네수엘라 연정체제는 경제위기 시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베네수엘라 빈민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대중교통수단 요금 인상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빈민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요컨대, 베네수엘라 연정체제는 빈민을 배제한 중·상류층 특권체제에 불과했습니다. 인구의 과반수에 이르는 빈민층을 정치적으로 대변할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까라까스 빈민항쟁 이후 베네수엘라 정치에서 벌어진 일 가운데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도시빈민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2006년에 베네수엘라에 방문했을 때 한 빈민지역운동가는 1989년 빈민항쟁을 빈민들의 자생적인 저항운동으로서 베네수엘라 좌파를 충격에 빠뜨렸다고 증언했습니다. 그 이후 베네수엘라 좌파는 도시빈민을 조직하는 풀뿌리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습니다. 코포라티즘 체제에 종속된 노동자계급에게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베네수엘라 좌파 세력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자생적인 빈민항쟁에 참여하였고, 유혈진압 이후에는 빈민지역에서 저소득층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둘째, 베네수엘라에서 처음으로 좌파가 대중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기존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의 사업장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동자 운동 내부의 개혁파들은 물론이고 도시빈민운동 세력, 진보적 지식인들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좌파 정당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게릴라 혁명 노선을 고수하고 있던 베네수엘라 공산당에서 이탈한 좌파들이 사회주의운동당(MAS)을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소련과 쿠바 노선을 비판하면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목표를 제시하였습니다. 라틴아메리카판 유로코뮤니즘 정당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 정당은 1980년대의 경제위기 시대를 거쳐 1980년대 후반 총선에서 10%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1992년 2월 쿠데타를 주도하였던 우고 차베스 공수부대 중령은 1994년 여론의 지지를 업고 석방되었는데 쿠데타 동료들과 민간인 동료들을 규합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해야겠습니다. 첫째, 쿠데타 당시 우고 차베스 공수 부대 중령은 신자유주의 정부의 부패, 군내부의 특권과 부패에 반발한 하층계급 출신 청년장교들을 규합했습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소위 청년 장교들, 민족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장교들의 반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해왔습니다. 초·중등 공교육제도가 보편화되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평균 교육 연수가 6년이 되지 못한 상황)그것은 인종적 계급적으로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인 빈민계층의 자녀들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군사 학교였습니다.
둘째, 당시 도시빈민항쟁을 유혈 진압한 신자유주의 부패정부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았기 때문에 쿠데타라는 수단에 대해 유보적이었던 시민들도 우고 차베스 중령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의 대의에는 동조하였습니다. 쿠데타 당시 거사가 실패했다고 판단한 우고 차베스는 무기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국영방송에 출연해 쿠데타 실패 사실을 동지들에게 알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국영방송카메라 앞에 선 차베스 중령은 쿠데타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볼리바르 계획을 재추진할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훗날 도시빈민지지자들에게 회자된 "비록 지금은"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을 훗날 지지자들은 우고 차베스의 최초의 선거운동이라고 표현합니다.
차베스는 석방 뒤 과거의 쿠데타 노선을 반성하고 민주선거를 통한 집권을 표방하였습니다. 1997년에는 볼리바르혁명운동(MBR)을 제5공화국당(MVR)으로 당명을 개정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채비를 하였습니다.
▲ "2002년 4월 13일 우리가 신헌법을 구출했다. 민주주의여! 영원하라" 48시간 만에 권좌에 복귀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담긴 포스터 ⓒ박정훈 |
차베스 대통령은 19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소속 정당 제5공화국당(MVR)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운동(MAS), 베네수엘라공산당(PCV), 모두를 위한 조국(PPT) 등 다양한 좌파 정당들과 함께 선거연합인 '애국의 중심축(Polo Patriótico)'을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차베스 대통령은 1989년 이후 급속히 정치적 주체로 성장해온 도시빈민계층, 노동조합 운동 내부에서 어용 노총에 맞서 싸우던 노동운동 내 개혁파는 물론이고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방어적 입장에 놓이게 된 공식부문의 조직 노동자들의 지지도 확보하였습니다. 40년 연정 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민주행동당(AD)의 지지기반이었던 베네수엘라 노동조합 총연맹(CTV)의 지도부는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중간층에 속하는 산하 조직 노동자들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1980년대의 경제위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반대, 그리고 40년 연정 체제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던 당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선거운동도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거 운동 당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좌파', '사회주의' 등으로 자신을 규정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3의 길' 노선을 주장하면서 중산층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양복 정장을 입기도 했으며, 제헌의회 공약 설명회 자리에 은행가들과 투자자들을 초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좌파 정치세력의 선거연합, 빈민층과 중산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1998년 우고 차베스 후보는 56.5%의 득표율을 획득하고 승리했습니다. 당시 연정체제에 속한 기존 정당의 지지를 받은 후보의 지지율은 39.5%에 불과했습니다. 베네수엘라 사상 최고의 투표율(약 65%)을 보인 선거에서 사상 최고의 표차로 1958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베네수엘라의 반공엘리트의 연정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렸고 베네수엘라 최초이자 공산주의 몰락 이후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좌파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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