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디네자드는 이날 유엔 유럽본부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스라엘을 지목해 "가장 사악하고 인종주의적 체제"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유럽이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프랑스 대사를 포함한 서방 외교관 40여명이 연설 도중 퇴장했다. 회의를 참관하던 청년들은 아흐마디네자드를 '인종주의자'라고 외치면서 실내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대부분 프랑스와 유럽 유대인학생연합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대회의실 안에 배치된 경비들은 이들을 즉시 밖으로 끌어냈다. 반면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30분간에 걸쳐 고집스럽게 자신의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그의 연설에 연신 박수를 보내며 지지하는 참석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엔 세계인종차별회의에서 강경 발언을 하고 22일 테헤란으로 돌아온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가운데) ⓒ로이터=뉴시스 |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
이란 대통령의 이번 행동은 적절치 않았다. 국제회의 석상에서 특정 국가를 꼬집어 비난하는 것은 그 국가와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할 뿐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보다 외교적인 접근법을 취했어야 했다.
사실 아흐마디네자드의 이스라엘 비난 발언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는 2005년 10월 대통령 취임 두 달 만에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 없애야 한다"며 이스라엘을 겨냥한 포문을 열었다.
지난해 6월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식량안보 정상회의에서 "이스라엘은 조만간 국제무대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이스라엘을 돕는 악마 같은 국가인 미국도 파멸에 직면했다"고 악담을 쏟아 부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가 "조작된 신화"라는 주장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이처럼 이란 대통령은 집권 직후부터 이스라엘을 '악마의 화신'으로 몰아갔다. 중동에서 분열과 전쟁을 초래하는 극악한 세력으로 치부해 왔다. 이에 대해 중동권의 반응은 다양하다.
일부에서는 '이란 대통령이 지나치게 강경한 발언으로 외교적 마찰을 초래하고는 있다'라고 빈정댄다. 특히 이란의 핵 개발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주변 걸프 산유국의 반응은 냉담하다.
사우디 언론은 이번 발언에 대해 일제히 이란 대통령이 "이-팔 분쟁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사우디 정부가 후원하는 범아랍 일간 <알-샤르크 알-아우사트>는 "6번에 걸친 이스라엘-아랍 전쟁(4번의 중동전쟁과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그리고 올해 초 가자 전쟁)에 이란이 참전한 적이 있는가"라고 아흐마디네자드를 공격했다.
그러나 반서방 경향이 있는 일부 국가의 반응은 다르다. 대표적인 예가 시리아다. 시리아의 왈리드 무알림 외무장관은 이례적으로 이번 이란 대통령의 발언에 지지를 보냈다. 제네바 회의에 참석하고 룩셈부르크를 방문 중은 그는 22일 기자회견에서 "상당수 아랍 여론은 이란 대통령의 의견에 동감한다"고 밝혔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범아랍 일간 <알-쿠드스 알-아라비>는 21일 "용기 있는 연설"이라며 이란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이스라엘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서방의 눈치를 보면서 표현하지 못하는 대다수 아랍 지도자를 돌려 비난한 것이다.
아랍도 아닌 페르시아의 대통령이 대다수 아랍인이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관(觀)을 대신 국제사회에 확인해 준 것이라는 평가다.
아흐마디네자드는 왜?
그러면 이스라엘과 직접 전쟁을 하지도 않았고 국경을 접하고 있지도 않은 '먼 나라' 이란의 정부 수반이 왜 이처럼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것일까?
우선 이란의 국내 정치 상황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강경보수파다. 중동의 강경파는 기본적으로 반미 그리고 반이스라엘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과 점령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강경파의 지지를 끌어내 개혁파 하타미 대통령에 이어 대권을 잡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국경을 접한 나라다. 미국의 위협이 코앞에 닥쳐왔던 상황이었다.
이번 제네바 발언은 그의 정권 연장과 맞물려 있다. 6월 12일 예정인 대통령 선거가 불과 5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대선출마를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재선 도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미국 그리고 유럽과 지나친 대립각을 세우는 그의 외교정책으로 일부 국민의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대선을 앞두고 강경파를 다시 집결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카드를 활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란의 거의 모든 신문은 '아흐마디네자드, 유럽의 심장부에서 정의를 외치다'라는 제목으로 이번 제네바 발언을 톱기사로 올렸다.
또 다른 배경은 핵 문제와 관련한 이란의 자신감이다. 서방과 핵 대치를 벌이고 있고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물론 대다수 국민은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란 지도부와 국민이 정당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전력부족이다.
이란은 인구 약 7500만의 대국이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미국의 경제제재를 계속 받아와 석유대국임에도 불구하고 휘발유를 수입하고 있다. 정유시설이 낙후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전력이 심각할 정도로 모자란 상태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최소한 현재 단계까지의 이란 핵 개발은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하고는 다르다. 이란 지도부는 단 한번도 '핵무기 개발'을 언급한 적이 없다.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규정도 평화적인 우라늄 농축 그리고 원전 건설을 허용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며 '자발적으로' 이 권리를 포기하고 비싼 농축우라늄을 수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IAEA가 이란을 강력히 압박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핵무기를 만들 가능성이 높은 '불량국가'이기 때문에 우라늄 농축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명분이 약하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란의 핵 개발을 미국보다 더 나서서 저지하려 하고 비난하는 국가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더불어 이란 국민은 '왜 이스라엘은 핵발전소에 핵탄두까지 가지고 있는데 다른 중동국가는 안되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최근 이스라엘의 이란 핵 시설 공격설이 자주 등장하면서 이란은 상당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다. 22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미국 내 유대인 10명 중 5명 이상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대(對) 이란 공격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1981년에도 이라크의 오시리크 핵시설을 일방적으로 공습해 완전히 파괴시킨 적이 있었다.
지난 2월 이란에 다녀왔다. 이란 혁명 30주년 기념식을 직접 보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만난 한 중년 신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테헤란 인근에 위치한 알보르즈 산의) 만년설이 보이는가? 우리의 혁명 정신은 저 산의 눈처럼 녹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핵발전소를 가질 것이고, 미국이나 이스라엘은 절대 우리를 공격할 수 없다. 7500만 인구 중 건장한 남성이면 모두 침략군에 맞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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