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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사회주의인가 열대 스탈린주의인가

[대결, 차베스와 룰라]<3> 혁명 50년 쿠바(1)

사회공공연구소의 열린강좌 '좌파의 역사실험실, 라틴아메리카' 두 번째 강좌 쿠바편을 두 차례로 나눠 지상중계합니다.

사회공공연구소는 오는 21일 세 번째 강좌 베네수엘라편에서 볼프강 곤살레스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를 초청해 '차베스 집권 10년의 평가와 과제'라는 주제로 특강을 듣습니다.

본 강좌의 진행자인 박정훈 연구위원의 강의에 이어 진행될 곤살레스 대사와의 대화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다양한 쟁점과 궁금증을 풀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포스터 참조 <편집자>

▲ 아바나 항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청년들 ⓒ박정훈

오늘은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두 개의 게릴라 좌파들을 분석합니다. 한 게릴라는 냉전 시대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해 올해 50년을 맞았습니다. 바로 제3세계 민족해방혁명의 모델이 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입니다. 다른 게릴라는 사회주의권이 모두 몰락한 뒤인 1994년 1월 1일 무장 봉기해 올해 15년을 맞았습니다. 바로 마르꼬스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입니다.

중남미 지식인이 게릴라가 된 이유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guerilla)가 등장한 배경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게릴라(guerrilla)'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의미합니다. 19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한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우던 스페인 사람들의 기동적이고 기습적인 저항을 묘사하는 용어였습니다. 그후 게릴라라는 말은 도시의 혁명에 맞서는 농촌의 보수적 반혁명을 연상시켰습니다. 1959년 쿠바 혁명이후에서야 게릴라라는 용어는 사회주의 운동의 어휘가 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사는 1980년대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독재자들의 기나긴 연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리브 해에 위치한 아이티라는 나라의 독재자 뒤발리에는 정치적 적들이 모두 검은 개로 변해 암약하고 있다는 부두교적 믿음으로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검은 개를 잡아 죽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즉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극악한 탄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친미극우군사독재는 두 가지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첫째, 군사독재에 비판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을 모두 좌파로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노동자, 농민 계층의 권익을 위한 개혁조치들은 모두 공산주의적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가령, 과테말라 대통령 하꼬보 아르벤스는 1952년 땅 없는 원주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당시 과테말라 토지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계 유나이티드 푸르트 사(United Fruit Company)와 대지주의 땅을 국유화했습니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는 유명한 과일 가공 식료품 회사로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바나나 농장을 사들이고 저임금으로 현지 주민들을 착취하여 '문어'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회사가 중앙아메리카 나라들을 모두 '바나나 공화국(경제적으로는 바나나 등 1차 산업의 상품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정치적으로는 강대국 미국에 의해 좌우되는 중앙아메리카 소국들을 가리키는 용어)'으로 만들었지요.

자기 나라의 자원을 통제하려던 불가피한 토지 개혁 조치가 미국계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자 미국은 아르벤스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과테말라 군부와 연합해 그를 쫓아냈습니다.

당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미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맞서 노동빈민과 가난한 농민의 권익을 위해 싸웠던 이들은 민족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아르벤스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날 때 과테말라의 수도에 있었는데 그는 미국과 군부에 맞서 아르벤스의 개혁을 방어하기 위해 싸우던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공산주의자로 변해갑니다. 아바나에서 법과대학을 졸업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당이 바티스타 친미군사독재와 타협해 노동자들에 대한 몇 가지 양보 조치에 합의하는 것을 보면서 공산당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했으며 혁명 이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현상은 라틴아메리카 친미극우군사독재는 좌파 엘리트들을 모두 산 혹은 정글로 내몰았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좌파 정당들은 정치적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암살과 실종, 고문 등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고, 그들이 속한 좌파 정당들은 모두 불법화했습니다. 또한 노동자계층이 거대한 코포라티즘(국가가 중재하는 민족산업가-노동조합총연맹 타협체제)체제 속에서 중산층으로 안주한데다가, 라틴아메리카 각국 공산당들도 1962년 10월의 미·소 핵전쟁위기였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노선을 충실히 따르면서 온건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좌파들은 노동자계층에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볼 수 없었고 공산당에게도 혁명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구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극빈층 농민들을 조직해서 게릴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가령, 쿠바 혁명의 예를 좇아 조직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띠 민족해방전선(FMLN)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의 민족해방군(ELN) 등은 물론이고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도 그 시작은 쿠바 혁명에 고무되어 조직되었습니다.
▲ 쿠바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 도미노 게임 ⓒ박정훈

한국인과 쿠바

한국인들은 쿠바에 대한 다양한 판타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쿠바는 미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라틴 댄스와 라틴 음악의 본산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른 생활의 속도 속에서 일 중독이 되어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인생을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느린 쿠바인들의 모습은 강렬한 환타지 대상이 된 듯합니다. 한국에서도 잠시 불고 간 살사 돌풍, 부에나 비스타 소시알 클럽의 다큐멘터리 등이 바로 그 환타지의 문화적 상징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부에나비스타 소시알 클럽의 다큐멘터리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아주 진하게 전합니다. 마치 쿠바의 사회주의 전성기에 대한 노스탤지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들은 실은 1940~50년대 혁명이전의 쿠바 음악입니다. 즉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혁명 이전 아바나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데 관객들은 사회주의 전성기 쿠바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현재의 쿠바에 대한 환타지를 갖게 됩니다.

또한, 제국주의 골리앗의 횡포에 염증을 느끼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쿠바는 미국의 바로 턱 밑에서 싸우는 다윗이라는 인상을 새겼습니다. 저도 중학교 3학년 시절에 미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즈의 책인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쿠바 혁명가들의 목소리를 담아 미국 워싱턴에 써 붙인 대자보 같은 것이었습니다. 직접 현지를 방문한 라이트 밀즈는 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게릴라들의 육성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쿠바가 작지만 당당한 나라라는 인상을 줍니다.

최근에는 무상의료제도, 아바나의 생태 농업 등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진보적인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다큐멘터리스트 마이클 무어의 [식코], SBS의 [맨발의 의사들]이 쿠바 무상의료제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습니다. 또한 몇몇 식자들이 아바나의 생태주의적 실험을 담은 외국 책을 번역하거나 현지에 다녀와 기고 활동을 하며 아바나를 새롭게 재조명하기도 했습니다.

한 외국 언론인은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거짓은 금세 탄로가 나지만, 환상을 쉽사리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환상을 품고 쿠바를 방문한다면 그 크기만큼 환멸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라틴 댄스 실력으로 현지인들마저 놀라게 한 스페인어 전공 여학생은 길거리 곳곳에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음악가들과 춤꾼들의 아바나를 상상하다가 텅 빈 아바나 거리에 크게 실망해 돌아왔습니다. 작지만 당당한 쿠바의 다윗 이미지를 좋아하던 한 출판사 편집자는 아바나의 방파제 너머에 도열한 페인트마저 벗겨져 퇴락한 건물들 앞을 오가는 삐쩍 마른 쿠바인들을 바라보며 쿠바의 빈곤을 실감했다고 합니다.

그는 혁명 이전에는 미국 마피아들의 천국이었고 지금은 외국 관광객들로 붐비는 카리브 해의 휴양지 바라데로에서 마음껏 낭만적 휴가를 즐길 수 없는 심정에 괴로워하다 돌아왔습니다. 또한 생태도시 아바나를 그리며 찾아간 이들은 길거리를 달리는 40~50년대의 미제, 60~70년대의 소련제 낡은 자동차가 길게 쏟아내는 매연에 실망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쿠바의 무상의료제도가 쿠바인들의 건강을 든든하게 책임져주고 있는 것은 맞지만 국가재정의 빈곤이 무상의료제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마음을 비운 채 성급한 환상을 갖지 않은 채 아바나를 방문한다면 섣부른 실망이나 환멸에 젖지 않으면서 쿠바의 민낯도 보이고 쿠바인들이 겪어온 삶의 애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쿠바인들도 한국인들처럼 숱한 오류와 실수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 쿠바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들 ⓒ박정훈

열대유토피아(?)

지난 50년 동안 사회주의 쿠바가 이룬 성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의료, 교육 부문에서는 제1위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쿠바에서는 거리에서 구걸하거나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것은 몇 가지 통계만으로도 금세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의료 분야의 성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쿠바 전체 인구 1100만 명에서 의사 수는 6만 7천명으로 인구 170명당 한 명에 해당합니다. 반면 한국 의사 수는 588명 당 한 명(2003년 기준)에 불과합니다.

쿠바 이처럼 풍부한 의사 인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의료 보장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모든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아주 체계적인 의료제도를 갖춘 것입니다. 쿠바 의료제도는 동심원의 원리로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늘 단결해 사회주의를 방어하자" ⓒ박정훈

첫 번째 원에는 거주지에서 2~3 블록에 가족 주치의가 있습니다. 둘째 원에는 소지역 단위의 종합 진료소(폴리클리닉)가 있고 세 번째 원에는 대지역 단위의 종합병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별의료기관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의료 서비스는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고, 약값의 경우 정부 보조금 지원으로 저렴하게 공급되고 있습니다. 쿠바 의료 서비스에서 제외되는 질병은 없습니다. 단순 두통에서 에이즈, 장기이식, 심지어 성형수술도 모두 무료 서비스 대상입니다.

강력한 의료 보장제도의 효과는 국제기구의 통계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쿠바의 기대수명(77.6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캐나다, 미국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고 유아사망률 통계는 캐나다에 이어 2위로 천 명 중 5명만이 사망합니다.

교육 관련 지표도 좋습니다. 교사 수는 1100만 명 중 22만 명으로 인구 50명 당 한 명 꼴이다. 쿠바 보다 인구가 4배 이상 많은 한국의 교사 수가 쿠바의 2.5배가 못 되는 총 51만 명인 걸 감안하면 얼마나 교사가 많은 지 알 수 있습니다.

쿠바의 청소년들은 모두 실질적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중등과정(한국의 고등학교 과정)까지 모두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보통교육이며 원하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평균 교육 연수가 5.2년, 즉 초등과정 에 해당하는 6년도 안 되는 것을 고려하면 12년의 의무보통교육 수준은 아주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교육 과정이 무상으로 이뤄지며 교과서도 모두 무상으로 제공됩니다.

쿠바 법에 따르면 학교에서 공부할 권리는 아이들의 고유한 권리이므로 보호자는 반드시 이를 준수해야 하며 이를 어길시 "아동 보호의 의무"를 어긴 죄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특수 아동도 교육의 권리는 완벽하게 보장됩니다. 6만 명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특수학교에 입학해 정규 수업은 물론이고 정신 치료, 물리 요법 등의 다양한 서비스도 제공받습니다.

물론 교육의 질적 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게릴라 혁명 특유의 권위주의와 규율은 학교 제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정치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부재한 데다가 나중에 보겠지만 학교 내에서 국가의 공식이데올로기와 다른 견해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갈수록 정보화가 강조되는 있는 세계에서 컴퓨터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지적·정보적 수단을 청소년들이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도 검토대상입니다. 쿠바 경제가 처한 난관은 바로 쿠바 국가 재정에 타격을 주었고 이는 정보화 수단에 투자해야 할 교육 재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쿠바가 처해 있는 정치적· 경제적 고립 등으로 인해 쿠바인들과 외국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또한 쿠바는 굶어죽는 빈민도, 노숙자도 없습니다. 소득 최하위 20%를 위한 강력한 사회적 지원 네트워크를 갖추어 소득 하위 가정에게 생활보조비, 식료품과 의류는 물론이고 가구류까지 제공합니다. 라틴아메리카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리의 아이들'도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멕시코 시티 거리에는 오렌지 혹은 레몬을 돌리는 재주로 구걸하는 아이들, 자동차의 앞 유리를 닦아 주며 손을 내미는 아이들이 무려 45만 9천명(12~14세의 경우만)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만약 쿠바에서 태어났다면 집, 먹을거리, 의학적 치료는 물론이고 대학까지의 교육서비스도 모두 제공됩니다. 고아들, 수감자의 자녀들, 정신적 질병을 가진 부모의 자녀들 등 아주 취약한 아동들도 마찬가지 서비스를 제공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성취는 바로 치안입니다.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평화로운 국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권총이든 칼이든 무장 강도를 만나는 일이 아주 특별한 일이며, 가장 흔한 범죄가 시계나 가방 소매치기이며 그것도 방심했을 때나 발생합니다. 저도 아바나를 세 차례 방문하면서 느꼈지만 한 블록 당 한 명의 경찰이 방범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회 폭력 수준이 낮은 것은 모든 시민들에게 보편적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며 교육 수준도 높고 빈곤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2003년 10월 5일 저는 유럽 의회가 주는 사하로프 인권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쿠바의 반정부인사 오스왈도 빠야를 자택에서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시민권의 보장, 다당제의 도입, 사기업의 허용 등을 쿠바 민중의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쿠바 정부로부터는 "미 제국주의의 최후의 발명품"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16살 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처음 체포된 이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왔는데 그런 그도 쿠바가 이룬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사회 복지 성과는 반드시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직업이 의료기술자인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한국의 최신식 산소순환시스템을 도입했다며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쿠바 혁명 50년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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