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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 좌파가 돌아온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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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라틴아메리카에 좌파가 돌아온 까닭은?

[대결, 차베스와 룰라]<1> 좌파의 역사 실험실, 라틴아메리카(上)

사회공공연구소의 열린강좌 '진보를 향한 두 가지 길, 차베스의 급진주의 vs. 룰라의 현실주의'를 지상 중계합니다.

지난 7일부터 시작돼 매주 화요일 4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강좌는 라틴아메리카 전문기자로 현지에서 7년간 취재 활동을 벌여온 박정훈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이 진행합니다. (☞사회공공연구소 바로가기)

박정훈 연구위원은 이 강의에서 한국보다 먼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난 대륙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는 과감한 대안 실험을 현장감 있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프레시안>은 전체 강연을 2~3일 간격으로 총 7~8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강의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본 기사 맨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늦깎이 졸업생이 라틴아메리카 전문기자가 되기까지

▲ 강사 박정훈 연구위원 ⓒ박정훈
2000년 5월 21일에 대학을 10년 만에 졸업하고 프리랜서 르포 기자가 되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향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99년 여름에 한국 유일의 국제분쟁전문기자 정문태 씨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있는 태국에 가서 아시아 지역을 취재하는 프리랜서로 사숙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원하는 곳으로 가시라 그럼 언젠가 만날 것"이라고 답하더군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그 즈음 읽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 부사령관마르꼬스의 [분노의 그림자]라는 책을 떠올렸습니다. 그 책에는 제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원주민 회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한 발언자가 스페인어로 말을 하면 원주민들은 5분 뒤에 웃고 5분 뒤에 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이유는 스페인어로 된 발언을 6개의 원주민 부족의 언어로 통역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면서도 정작 한국 진보 진영 내에는 다양한 반민주적인 실천이 존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릴라들도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사람들을 존중하는구나. 이 게릴라들을 직접 만나봐야겠다. 이들이 어떤 목표로 싸우고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자 떠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서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기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히나 교전 지역에 적응할 엄두도 나지 않아 멕시코행 비행기의 기수를 서울로 다시 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멕시코에 머물며 편하게 이 대륙에 대해 생각해보자며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2월과 3월 사빠띠스따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대행진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나로서는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고 우여곡절 끝에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원주민 사령관들을 인터뷰하게 되었고 한국 언론에 기고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라틴아메리카 전문프리랜서로 데뷔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7년 동안 멕시코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2002년도 차베스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났을 때는 베네수엘라 수도 까라까스에서 친차베스 시민과 반차베스 시민들을 만났고, 2002년 말 룰라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상파울루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부터 농민지도자, 상파울루 여시장 등을 취재하였으며, 피델 카스트로가 통치하던 쿠바와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한 쿠바를 차례로 방문하여 아바나 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또한 50년 내전의 납치공화국 콜롬비아를 방문해 현지를 취재하였고, 칠레에서 사회당의 두 번째 대통령이자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남녀동수내각을 수립한 미첼 바첼렛 대통령이 취임식이 열리는 발파라이소 칠레 의회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중남미 10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한국으로 영구귀국하게 되었고 라틴아메리카의 취재경험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좌파의 역사 실험실 라틴아메리카"라는 강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좌는 저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제 삶의 일부를 정리하는 일종의 쉼표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저는 중남미에서는 빠블로라고 불리며 정글의 게릴라, 유혈사태의 현장, 쿠데타의 현장을 뛰어다니느라고 분주했습니다. 하지만 1년간 사회공공연구소 사무실에 앉아 연구에 몰두하다보니 야성은 오간데 없고 아주 얌전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질문도 던져주고 야성을 깨우쳐주시면 다양한 얘기로 보답하겠습니다. 오늘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주요 좌파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중남미와 한국 좌파에게 보내는 우화

멕시코 열대 해변에서 읽은 어떤 소설 얘기로 제1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한국인들에게도 [눈먼자들의 도시]라는 기념비적 소설로 잘 알려진 포르투칼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는 [미지의 섬 O conto da ilha desconhecida] 이라는 짧은 우화소설을 1998년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는 왕에게 배를 한 척 청원하는 선원이 등장합니다. 며칠 째 기다린 끝에 왕을 만나 배를 달라고 하자 왕이 무엇을 하려고 배가 필요하냐고 묻습니다. 미지의 섬을 찾아가겠다고 답합니다. 모든 섬이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느냐고 묻는 왕에게 그 선원은 알려진 섬만 지도에 나와 있을 뿐이라 답합니다. 출항을 하루 앞둔 날 밤 선원은 꿈을 꿉니다. 자신이 타고 가는 배가 미지의 섬으로 변하는 꿈을 꿉니다. 이튿날 드디어 출항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은 미지의 섬이 미지의 섬을 찾아간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소련이 몰락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평등세상을 향한 꿈을 회의할 때, 중남미의 진보적인 사람들도 손을 놓고 있었을 때 노 공산주의자 주제 사라마구가 보낸 메시지입니다. 알려진 섬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경험이 아닌 미지의 섬들,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만들기 위해 나서보자는 제안으로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이 사회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섬을 찾아서 떠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콜롬비아의 문호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소련 몰락 이후에 기고한 글에서 1만년 동안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다, 공산주의 혁명까지 다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고 세상이 그리 나아지지 않은 것 같으니 이제까지 안 해 본 일을 해보자면서 이제 세상의 운영을 여성들에게 맡겨보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것도 또 하나의 미지의 섬이겠지요.

라틴아메리카인가 인도아메리카인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를 흔히 라틴아메리카 혹은 중남미라고 부릅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나라는 총 33개국입니다만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들을 제외하면 20여개이 주요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미는 아메리카 대륙의 하체에 해당하는 콜롬비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의 국가를 가리키고, 중미는 아메리카 대륙의 허리에 해당하는 가장 잘록한 부분으로 과테말라에서 파나마까지를 이르는 용어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상체에 해당하는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이 지리적으로는 북미에 속하지만 문화적으로 중미 및 남미와 가깝게 때문에 흔히 중남미라고 할 때 멕시코를 포함합니다.

인구는 4억 5천 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스페인어를 씁니다. 브라질은 포르투칼어를 쓰고, 아이티는 불어, 자메이카와 영국 해적이 빼앗은 유까딴 반도의 벨리스는 영어를 씁니다. 언어는 곧 역사를 보여줍니다. 과거 어느 강대국의 식민지였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중남미 대륙을 흔히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데 이 대륙의 명칭을 둘러싸고 5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논쟁이 벌어져왔습니다. 2008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 대륙을 인도아메리카라 부르자고 제안했습니다. 원주민들인 인디언들의 땅이니 인도아메리카라고 부르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중남미 대륙은 히스패닉아메리카(스페인계 아메리카), 이베로아메리카(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칼 제국의 이베로족의 아메리카)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라틴아메리카(라틴족의 아메리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라는 용어는 프랑스 제국주의가 18~19세기 앵글로색슨의 영국의 부상에 맞서기 위해 북미의 앵글로색슨아메리카와 구분하기 위한 고안한 명칭이었습니다. 그 시절 이 지역에서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문화적 영향력이 아주 강했습니다. 한때는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략해서 괴뢰군주를 내세우기도 했지요. 게다가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을 주도했던 지배엘리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 제국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사연으로 라틴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습니다.

그런데 1924년 중남미 가장 오래된 좌파 정당 가운데 하나인 페루의 아메리카 민중혁명동맹(Alianza Popular Revolucionaria Americana, APRA)의 지도자 빅또르 라울 아야 델 라 또레(Víctor Raúl Haya de la Torre)가 멕시코에서 '인도아메리카'라는 제목의 정치잡지를 창간합니다. 이 잡지는 당시 제국주의 반대, 중남미 대륙의 피억압계급의 단결(빈곤해지는 중간계급, 농민, 원주민 등의 권익 보호)을 옹호하는 입장을 펼쳤습니다. 즉 이제까지의 지배계급의 출신지를 기준으로 이 대륙의 명칭을 지었다면 이제 민중의 입장에서 이 대륙의 이름을 붙이자는 제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멕시코 문호 까를로스 푸엔떼스는 [용감한 신세계]라는 책의 서문에서 중남미 대륙이 다민족, 다문화 대륙임을 고려하여 "인도-아프로-이베로아메리카 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처럼 백인들의 유럽전통이 강한 국가도 있고 브라질과 카리브해의 쿠바처럼 흑인전통이 강한 나라도 있으며 멕시코, 페루, 볼리비아처럼 원주민 전통이 강한 나라도 있으니 이 세 가지 전통 모두가 중남미 대륙의 정체성이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름이 너무 깁니다. 언어의 경제학을 고려한다면 이 용어를 사람들이 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근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 중에 하나는 인도아메리카의 '인도-' 즉 '인디오(indio, 원주민의 스페인어)'라는 단어입니다. 스페인어 사전에서도 인디오(indio)를 찾으면 그 첫 번째 뜻은 바로 '아시아의 인도 사람'입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 신대륙을 인도(당시 인도란 오늘날의 인도, 중국, 일본 등지를 모두 포괄하는 명칭이었음)라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탈식민주의가 유행하는 지금 우리가 인도아메리카라는 용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럽인들의 착각과 편견 속에 형성된 용어와 담론으로 라틴아메리카를 보는 것은 피하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 춤추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베네수엘라 까라까스의 차베스 지지자들 ⓒ박정훈

라틴아메리카를 보는 세 사람의 시각

에콰도르에 속한 갈라파고스 군도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구아나라는 파충류를 보았는데 해변가의 이구아나는 해변의 바위 색을 닮아 검은 색을 띄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속의 이구아나는 즐겨 먹는 나무의 껍질 색을 닮아 금색을 띄었습니다. 또한 해변가의 거북이는 아시다시피 헤엄을 잘 치기 위해 다리가 변했지만 산 속의 거북이는 코끼리거북이라고 불리는데 이 거북의 다리는 코끼리 다리처럼 아주 튼튼하고 육중했습니다. 자연환경에 따라 다르게 진화한 동물들이 즐비한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윈은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그를 인용하면서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봅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물학자 다윈처럼 역사가인 나도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늘 역사 변화의 실험실이었다. 그곳에선 늘 짐작과는 다른 일이 벌어져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대부분의 통념을 밑동부터 흔들었다" 에릭 홉스봄 자서전 [미완의 시대]

서유럽의 상식과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유럽의 지식인으로서 에릭 홉스봄은 유럽인의 시각과 판단으로 라틴아메리카를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의 콜롬비아 출신 세계적인 문호이자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현실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도식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고, 우리를 더욱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으며, 우리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백년의 고독]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노벨상 수상 연설

정작 라틴아메리카 대륙 내부의 사람들도 유럽 혹은 미국에서 빌려온 도식으로 자신들을 들여다보려고 했다는 고백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설명하는 고유한 이론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저는 한국의 유명한 진보적 정치학자인 손호철 교수가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쓴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라틴아메리카 전문가는 아니지만 진보적 지식인이 대부분 그렇듯이 공부를 하면서 라틴아메리카를 이론적 고향으로 삼아왔습니다. 종속이론, 관료적 권위주의이론부터 이른바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종속적 파시즘론, 최근에는 시장중심의 세계화, 97년 경제위기와 뒤따른 경제개혁과 관련된 종속적 신자유주의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설명하고자 빌려온 이론 틀이 대부분 라틴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호철의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정작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서유럽의 도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다양한 이론적 틀을 개발해왔는데 한국의 진보진영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도식으로 한국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한국인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한다는 것

2003년 10월 쿠바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호세 마르띠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중남미 여느 나라와 달리 짐꾼(짐을 나르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팁을 받는다)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쿠바는 여느 중남미 국가와 달리 허가 없이 개인의 영리 행위를 할 수 없는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항 입구를 나서는 외국인들 앞으로 다가와 가방을 들어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중년 남성을 보았습니다.

공항입구에서 저를 포함한 외국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국영관광버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곳까지 짐을 날라준 쿠바 중년 아저씨에게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국영버스를 타고 호텔로 갈 한 멕시코 관광객이 200페소(약 20달러, 당시 약 2만원 상당)를 쾌척했습니다. 그러자 쿠바 중년 남성은 뛸 듯이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멕시코 사람은 "자연환경 좋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나라에 살면서 왜들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며 논평을 하더니 쿠바 중년 남성의 시선을 피해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 중년 쿠바 아저씨는 매일 아침 8시마다 공항에 나와 관광객의 짐을 나르는 '불법적인 일로' 하루벌이를 하는 실업자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쿠바 평균 임금은 15달러 정도 되는데 그 분은 한 번의 수고로 20달러를 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뻐했던 것입니다. 반면 절 보며 쿠바 아저씨에 대해 논평한 사람은 멕시코 북서부의 꼴리마 중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좌파 교수였습니다. 한 쪽엔 실업자이자 쿠바인인 현지거주자의 입장이 있습니다. 다른 쪽엔 지식인이자 외부인인 일시체류자의 입장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중남미를 취재하는 프리랜서 기자로서 제가 영원히 그 두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은 이들에게는 늘 이방인이고 관찰자일 수 밖에 없겠다. 그렇다고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을 가깝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에 속시원하게 이방인이 될 수도 없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말하자면 인류학자들처럼 '참여관찰자'의 위치라고나 할까요.

저는 취재를 현지 사람들의 삶의 일상을 참여하며 관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정색을 하고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는 삶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과 견주어보면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취재 경험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콜롬비아의 부통령도,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원주민 사령관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 공식적인 대표자들 그러니까 정부의 지도자든 게릴라 지도자이든 그들의 말보다 평범한 시민, 게릴라 사병과의 대화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훨씬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공식적인 대표자들은 뻔한 얘기, 정제되고 엄선된 발언만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범한 시민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의견을 펼칩니다.

둘째, 아주 상식적인 소리겠지만 너무 자주 지식인들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식적인 담론과 발언에 너무 열광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인의 지식인들도 중남미 좌파의 공식적 담론과 정책에 쉽게 열광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담론과 발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실천하는지 어떤 행위를 하는지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론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실제 라틴아메리카에는 현재 세 명의 한국인 기자가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취재하는 연합뉴스 특파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취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인터뷰 기사도 르뽀 기사도 보기 힘듭니다. 조선일보와 KBS가 2006년 이후에 처음으로 특파원을 파견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3인의 한국 언론 특파원들이 현지어를 구사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 특파원들은 주로 영미권의 통신사 뉴스를 참조하여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영미권의 관심사와 프레임에 따라 접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대륙 현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다루는 프레임도 대단히 협소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집권 도미노 현상

대학 시절 [칠레전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70년 민주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미국과 공모한 쿠데타 군에 의해 대통령궁에서 살해되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 칠레의 정치적 격변을 다룹니다. 칠레 사회주의 정부 붕괴, 그 이후의 인권 탄압은 한국의 광주민중항쟁을 떠올리게 했지요.

그런데 그 시절과 지금의 라틴아메리카를 비교하면 새삼 격제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2009년 3월 현재 중남미 대륙의 70% 이상의 면적이 좌파가 집권한 국가들입니다. 혹자를 이를 가리켜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발생했다"고 논평했습니다. 좌파 집권 국가의 수는 총 11개국에 이릅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끈 게릴라 혁명의 나라이자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원로인 쿠바(1959), 군사반란 혐의로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 민주 선거로 당선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1999), 30년 전 살해된 아옌데 대통령의 정당 사회당의 라고스가 집권한 칠레(2000), 자격증이라곤 오직 선반공 자격증뿐이었던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노동운동가 룰라가 집권한 브라질(2003), 2001년 국가부도사태 이후에 좌파 정부가 집권한 아르헨티나(2003), 다양한 좌파 세력의 연합 정당인 확대 전선(Frente Ampilo)의 바스께스 대통령이 집권한 우루과이(2004), 국민다수가 원주민인 나라 최초로 탄생한 명실상부한 원주민 대통령 볼리비아(2005),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수학한 좌파 경제학자 꼬레아가 집권한 에콰도르(2006), 해방신학자이자 카톨릭 신부였던 파라과이(2008), 중미의 니카라과(2006)는 산디니스따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유명한 게릴라 조직이 정당으로 변신했는데 그 정당 소속 후보가 당선되었고 엘살바도르(2009)에서도 파라분도 마르띠 민족해방전선이라는 과거 게릴라 조직이 변신한 정당의 후보가 집권하였습니다.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 2개국을 제외하고 중남미 주요 정치경제대국 모두가 좌파 집권 국가들입니다.

멕시코에서는 2006년도에는 0.58%의 차이로 좌파 후보가 석패한 곳입니다. "투표소마다 한 표씩만 잘못 개표했어도 당선자가 바뀌었을 정도"의 박빙의 차이였습니다. 선거부정으로 유명한 이 나라에 대해 [뉴욕타임즈]조차 재검표를 하는 것이 승자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부분적인 재검표만 이뤄졌습니다. 콜롬비아는 잘 아시다시피 약 50년동안 좌파 게릴라와 정부 사이의 내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좌파가 집권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고립된 쿠바(1959), 미국과 공모한 군대에 의한 정부가 붕괴된 칠레(1970), 민주선거를 도입한 이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권력을 상실하여 우파가 재집권한 니카라과(1979) 등의 경우는 대략 10년에 한 번꼴로 이뤄진 간헐적인 사건이었고 고립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반면 현재의 집권 현상은 1999년~2009년까지 사이 21세기 초반 10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벌어지고 이웃 국가끼리 영향을 주는 도미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쿠바 아바나 내무성 외벽의 대형 체 게바라 초상 ⓒ박정훈

좌파 집권 도미노의 첫 번째 이유: 신자유주의의 거짓 약속

어떻게 해서 좌파들이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집권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시장만능주의의 약속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를 '신흥종교'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수사나 비유가 아니라 현실에 가깝습니다. 때론 비유가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입니다.

이 대륙에서 신자유주의는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처음 등장합니다. 민주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 아옌데를 살해하고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는 이른바 '죽음의 비행'이라 부르는 가공할 만한 인권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아옌데 대통령을 지지했거나 쿠데타를 반대하는 수많은 시민들을 잡아가두고 살해했는데 그 살해방식이 아주 잔인했습니다. 고문에 지친 시민들에게 몰핀을 주사하고 마대자루에 넣은 뒤 헬리콥터에 실어 태평양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몇 개의 마대자루가 칠레의 태평양 연안에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칠레 산띠아고에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은 철로를 2미터 이상의 크기로 끊은 뒤에 마대자루에 묶어 태평양의 심해에 던진 것입니다. 몇 년 전 칠레의 과거사 진상 규명에 앞장선 인권 검사와 변호사들이 직접 태평양을 수색하여 철로를 찾아내 비야 그리말디라는 과거에는 민주인사를 잡아가두고 고문한 곳이고 지금은 '기억의 박물관'이란 이름의 인권센터로 변한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도 바로 그곳 그리말디를 방문하여 그 철로를 직접 보았습니다.

바로 그 같은 모든 반대세력에 대한 극악한 탄압을 배경으로 신자유주의가 라틴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칠레에 도입됩니다. 그래서 극우 독재 피노체트와 시카고보이스(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들)의 동맹으로 들어온 이 신자유주의를 '기관총으로 무장한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신자유주의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대된 것은 1982년 외채위기 이후였습니다. 금리가 저렴할 때 외채를 빌려 쓰다가 금리가 치솟으면서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를 갚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남미 각국이 차관을 요청하자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등)들은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강요합니다. 모든 나라에서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가 강도 높게 추진됩니다. 그때부터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는 신자유주의 대륙으로 변하였습니다.

흔히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성장시킨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는 성장이 멈추었는데 1980년과 2000년의 라틴아메리카의 1인당 국내총생산(1980년 3739달러, 2000년 3952달러)은 사실상 정체상태였습니다. 장하준 교수도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이는 수입대체산업화시대(1950~1980)보다도 더 낮은 성장실적이었습니다.

또한 이 대륙은 가장 불평등한 대륙으로 변하였습니다. 국제연합개발계획의 1999년 통계로 소득 최상위 10%와 최하위 10%의 격차는 27.4배, 2002년 통계 소득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55%, 소득 하위 20%는 전체 소득의 4.71%에 불과했습니다. 1980년 소득 격차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 통계는 없지만 아르헨티나의 예를 들어보면 1980년 소득 최상위 10%와 최하위 10%의 소득격차가 12배에서 2001년 국가부도사태 직전의 30배로 벌어집니다.

게다가 이 대륙의 빈곤도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국제연합의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경제위원회(CEPAL)에 따르면 1980년에서 2002년 사이에 빈곤인구의 비중은 40.5%에서 44%로 증가하였고 빈민의 수도 1980년 1억 3,600만 명에서 2002년 2억 2천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빈곤 인구 증가 폭에 비해 비중 증가 폭이 적은 것은 그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 내내 특히 1990년대는 외환위기의 연대였습니다. 이 대륙은 한국 사람들도 아예 경제 위기 대륙으로 기억할 정도입니다.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 1999년 브라질 외환위기, 2001년 아르헨티나 국가부도사태 등 라틴아메리카 대륙은 늘 경제위기에 시달렸습니다.

한마디로 성장의 결과물이 흘러넘치는 이른바 '떡고물효과'를 주장하며 분배의 공정성을 위한 여러 제도들, 복지제도를 붕괴시켰던 신자유주의는 흘러넘치기는커녕 성장조차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좌파들은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해왔습니다.

좌파 집권 도미노의 두 번째 이유: 되찾은 민주주의

둘째, 신자유주의 20년은 되찾은 민주주의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정치구도가 극우독재-좌파 게릴라 구도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극우 군사독재자 피노체트 vs 게릴라 혁명의 쿠바의 대립구도였습니다. 이것은 60~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전형적인 정치적 대립구도였습니다. 하지만 1989년 피노체트는 실권하게 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선거민주주의가 회복된 것입니다.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게릴라 좌파의 시대가 가고 민주적 좌파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좌파들 즉 노동운동가(브라질)였든 게릴라 전사였든(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등) 정치정당으로 변신하였습니다.

반면 게릴라 운동은 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페루에는 아주 유명한 농민게릴라조직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이 있었습니다. 이 게릴라 조직은 후지모리 정부의 강경책도 있었지만, 폭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보복 폭력을 자행하면서 원주민 농민들로부터 고립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마약 게릴라, 납치 게릴라라고 불리는 콜롬비아혁명군(FARC)은 최근 지도부 궤멸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혁명군은 정부와 평화 협상의 결과로 얻은 비무장지대에 납치인질들을 가두었습니다. 대통령 후보를 직접 납치하기도 했는데 얼마전에 구출된 베탕꾸르뜨 후보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 시절에 많은 기업가들이 납치되었는데, 한 기업가의 친구인 변호사가 구출협상에 참여했다가 그 변호사도 납치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콜롬비아 변호사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변호사는 땅을 파서 자기를 구덩이 속에 가두어 놓고 열 서너 살의 소년 게릴라가 자기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지구가 둥근 게 아니라 네모지다고 생각하더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풀어주겠다고 해서 이제 정말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살려주기는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콜롬비아 정부군의 대게릴라 진압부대의 한 청년 병사를 인터뷰한 적도 있습니다. 소년 병사들도 죽이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콜롬비아 정부군은 이스라엘제 구형 무기를 쓰지만 게릴라 소년 병사들은 미제 최신무기를 들고 싸운다면서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답하더군요.

물론 게릴라 군의 피해자들의 인터뷰이기 때문에 균형 감각이 부족하다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은 한 콜롬비아 사람은 제게 게릴라를 만나거든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꼭 질문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콜롬비아 혁명군의 민주화의 시대에 방향을 전환하지 못해 이념의 미아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평화협상을 하여 자치지역도 인정받고 비무장지대도 설정해놓고도 무기를 놓지도 민주화된 세상에 적응할 새로운 전략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시민들로부터의 정치적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투쟁을 벌이는 '직업 게릴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이들 게릴라들이 수많은 농민 가족과 그 가족의 자녀들을 먹여 살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년 전만 해도 정부 군 병사의 월급보다도 더 많은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그렇게 게릴라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고 이를 위해 기업가 납치와 코카 판매 및 코카인 생산 등의 일에 손을 대게 된 것입니다.

한편 멕시코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무장한 개혁주의자'라고 불렸습니다. 한국에는 이들이 게릴라 집단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이들은 무장투쟁을 일시적인 전술로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봉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국내외 시민들의 시위와 압력으로 당시 멕시코 살리나스 대통령이 전투 중지 명령을 내리게 되는 데 그때이후로 사빠띠스따의 거점인 치아빠스 지역에서 군사적 긴장은 늘 높았고 간헐적으로 정부군의 공격이 있기는 했지만 사빠띠스따들이 먼저 군사 공격을 감행한 적도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사빠띠스따들이 무장봉기 당시에 세운 군사적 목표는 1994년 1월 1일 주요 군청소재지를 점거하여 봉기 사실을 공표하고 신속하게 퇴각해 라깐돈 정글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사일을 1994년 1월 1일로 한 것은 멕시코가 '선진국의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하고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의 발효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월 1일을 봉기일로 잡은 또 다른 이유는 12월 31일이 바로 멕시코 사람들의 축제일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밤 자정이 되면 12개의 포도알을 먹으면서 1년 열두달의 소원을 재빠르게 비는 시끌벅적한 행사로 온 멕시코가 난리입니다. 하지만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꼬스의 증언처럼 예의 그 멕시코 특유의 시간관념으로 인해 봉기 시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등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지요.

그런데 다른 지역과 달리 한 군청 소재지 오꼬싱고에서 예기치 못한 경찰의 격렬한 반격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교전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른바 '오꼬싱고 도살장'이란 이름의 교전 사태로 인해 많은 원주민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바로 그 병사들의 존재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장 상태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 상태가 형편이 없었습니다. 목총을 들고 나선 사람도 있는 등 손에 잡히는 무기는 닥치는 대로 들고 나선 것입니다. 애시당초 자신들의 목소리를 정부가 듣게 하도록 무장봉기 사실을 알리고 평화협상에 나서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성명서에는 멕시코 시티로 진군하겠다고 적혀 있고, 저 또한 그 말을 믿고 멕시코 시티로 향했습니다. 멕시코 시티로 떠나기 전인 1999년 저는 술자리에서 멕시코에 왜 가느냐는 질문에 주유소를 차리러 간다고 농담조로 답하곤 했습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체 게바라의 쿠바처럼 멕시코시티로 탱크를 몰고 진군하면 그 탱크에 주유를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멕시코시티로 진군하지 않았고 저 또한 주유소를 차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수도로 진군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자신들의 목표가 권력 장악이 아니라고 주장해왔습니다. 2001년 마르꼬스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와 대담에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이 혁명군으로 변하는 것은 곧 우리의 실패라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강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007년 사빠띠스따는 무기를 내려놓겠다며 무장투쟁 중지 선언을 했습니다.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은 이제 더 이상 게릴라 집단이 아니며 원주민 자치라는 더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민간 자치운동조직으로 변신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의 사빠띠스따의 사례는 비제도권 좌파가 민주화한 세상에서 자신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버릴 것과 지킬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시기에 집권한 우파 정부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실망현상을 낳았습니다. 소위 광범위한 데셍깐또(desencanto, 스페인어로 정치적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는 현상으로 라틴아메리카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심리적 현상을 지칭)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심지어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는 비판이 등장하였고 국제연합개발계획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라틴아메리카 18개국 시민들의 50% 이상이 생활수준이 향상된다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평등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민주주의를 심화하기 위해 각 국의 좌파들은 꾸준히 노력해왔고 그로 인해 좌파들이 성장한 것입니다.

좌파 집권 도미노의 세 번째 이유: 사회적 위기의 증폭

셋째, 신자유주의 20년은 사회적 위기를 증폭시켰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시민들의 저항운동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1989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식료품 및 공공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하였습니다. 가령, 버스 요금이 하루 일당만큼이나 뛰어오르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정부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철폐하자 운수회사들은 마음껏 요금을 책정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같은 요금 폭등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게 된 것은 수도 까라까스 외곽에 거주하며 까라까스로 출퇴근하는 가난한 빈민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그러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 거리를 왕복하기 때문에 가장 많은 요금을 내야 했던 것입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버스에 불을 지르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까라까스 외곽에서 시작된 빈민들의 폭동은 까라까스 시내의 빈민가로 번졌고 수많은 빈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경찰과 군대에 맞서 싸우고 상점을 약탈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까라까소'라고 불리는 카라카스 빈민 폭동입니다.

바로 그때 군대가 빈민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는데 당시 군인이었던 현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그 진압 광경을 지켜보았지요. 빈민 가정의 자식인 청년 병사들이 형제들인 빈민들을 죽이러 가는 사태를 보고 분노하며 그전부터 준비해오던 군사반란 계획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994년 멕시코 치아빠스에서는 원주민 게릴라 조직인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이 북미자유무역협정 발효일에 맞추어 무장봉기하였습니다. 보조금을 받은 미국의 싼 옥수수가 대량으로 수입되면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멕시코의 원주민 농민들은 모두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의 사전 조항으로서 정부가 멕시코 혁명의 유산이었던 토지 국유화 조항을 철폐하고 토지를 매매할 수 있는 물건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토지가 국유였지만 지주들이 존재하였고 그들이 좋은 땅을 독차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달리 대규모 토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2000년에는 볼리비아 꼬차밤바에서 원주민들이 물 민영화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벡텔을 비롯한 초국적 기업의 상수도 민영화로 인해 상수도 요금이 급증하자 이에 맞서 원주민 저항이 발생하였고 이 싸움을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현 원주민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였습니다. 2003년에는 '마지막 천연자원'이라 불리는 천연가스 민영화에 맞선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고 당시 대통령은 원주민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허가했으며 이로 인해 유혈사태 발생했으며 대통령이 중도에 하야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2001년에는 아르헨티나 국가부도사태로 인한 대규모 시위로 유혈사태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하자 정부가 은행예금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부자들과 해외투자자들의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은 막지도 못하였고 심지어 금융기관이 이들의 자본유출을 도왔다는 의혹마저 제기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빈민 계층의 은행 예금은 인출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에 맞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이 같은 사회적 저항은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계층은 지속적인 저항 주체였습니다. 한데 새로운 저항 계층이 등장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첫째, 베네수엘라가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도시 빈민 계층들의 폭발적인 투쟁이 눈에 띕니다. 이들은 실업자이거나 비정규직 노동자이거나 가난한 영세상인들이었습니다. 둘째, 멕시코와 볼리비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원주민운동의 폭발적인 신장이 눈에 띕니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조직이 성장하고 원주민 차별에 맞선 사회적 저항이 급 성장하였습니다.

좌파 집권 도미노의 네 번째 이유: 탈냉전의 시대

넷째, 라틴아메리카에서 드디어 냉전의 시대가 가고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속해 있던 이 대륙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미국의 뒷마당'이니 '뒤뜰'이니, 혹은 '하느님으로부턴 너무도 멀고 미국으로부턴 너무도 가까운 곳'으로 불리던 이 대륙에서 미국은 땅을 빼앗거나 병합시키고(멕시코와 푸에르토 리코),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 새우기도 했으며(칠레,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 군대를 직접 파견해 침공하기도 했으며(도미니카, 파나마), 아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파나마).

냉전이 붕괴되면서 이른바 공산주의-자본주의가 대립하는 '진영' 구도가 붕괴되어 라틴아메리카는 일종의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할 여지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미국의 세계 전략의 변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정치군사적인 직접 개입의 지배전략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요를 통한 경제적 지배전략으로 선회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2001년 9.11 테러 사건이후 미국의 외교력은 대테러전쟁으로 인해 대중동외교에 집중하였고 대중남미외교는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중남미 좌파 도미노 현상이 심화되던 시기에 부시행정부(2001~2009)는 시대착오적 대중남미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서반구 담당 즉 라틴아메리카 담당 차관보에 냉전시대 인물만을 기용했습니다. 오토 레이치라는 인물은 이란에 무기를 팔아 중앙아메리카 게릴라에 맞선 우익 콘트라게릴라를 후원한 전력을 갖고 있는데 2002년 반 차베스 대통령 쿠데타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후임자인 로저 노리에가도 지속적인 반쿠바 정책과 반차베스 정책을 고수하였습니다.

이 사정은 중남미 좌파들이 각 국에서 집권할 때 미국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2002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 맞서 베네수엘라 특권층과 미국의 암묵적 지지로 발생한 우익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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