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지 않는 한 국토는 없으며 깨닫지 않는 한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길을 찾는다. 내가 길을 새롭게 하는가. 길이 나를 새롭게 하는가."
박태순씨는 국토기행의 체험을 한마디로 '부드러운 국토'의 발견이라고 내세웁니다. 딱딱한 국토, 혼란스런 국토, 난해한 국토의 면모들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럴수록 이를 부드러운 국토의 문화원형을 통해 접근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소설집 외에 국토기행문집으로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에 이어 최근 <나의 국토 나의 산하> 전3권(한길사)을 펴냈습니다. 그와 늘 동행하며 작업한 국토사진가 황헌만씨가 함께 했습니다.
▲ 산은 강을 강답게, 강은 산을 산답게...나를 키워준 우리 국토. ⓒ황헌만 |
박태순씨는 이러한 국토기행에 뜻을 같이 하는 독자 여러분도 참여하는 답사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름하여 국토학교. 그가 교장선생님을 맡았습니다. 우리 땅의 답사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신나는 문화공동체로,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움직이는 학교> <길위의 명강의 학교>입니다.
올해 국토학교 제1강은 4월 넷째 주말인 25-26일 1박2일로 열립니다.
답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경유시간이 표시된 곳을 중심으로 답사하며, 현지 사정상 일정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강의 제목 :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
4월 25일(토요일)
08:00 서울에서 출발(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백화점 옆 주차장, 유진여행사 경기76아 9111)
<남한강 뱃길 배경>
남한강 뱃길은 끊어져버렸고 영남대로 옛길은 사라져버렸다.
전통시대에 상경과 하향의 고속도로였던 남한강 뱃길 답사는 불가능하지만, 동강동강 나버린 나루터들의 꼭짓점을 어렵사리 찍어볼 수는 있다. 남한강 개념도가 어찌 되나.
동호와 두모포
두모포(豆毛浦)는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포구라 하여 '두뭇개(두물개)'라 부르던 데에서 나온 지명이다. 뚝섬과 저자도가 상류 쪽을 가려주고 있었으며 중류에는 '독서당'과 맞은편 쪽으로 '압구정'이 마주 보고 있었는데 벼슬아치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하여 특별휴가를 내주어 '사가독서'를 시키던 곳이었다.
경치가 좋아 '동호(東湖)'라고도 했다. 오늘에 동호대교는 있고 '독서당길'은 있지만 옛 자취는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서울숲'이라는 곳마저도 고급아파트촌이 되고 있을 뿐이다.
동호는 한강의 내륙 수운 터미널이 되고 노량진은 내륙 육로의 시발지가 되고 그리고 서강은 외해로 나가는 항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 경강(京江)의 동호, 노량진, 서강의 구실이 모두 사라지고 서울 속의 한강은 상하수도의 수로 노릇일 따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를 비롯하여 조선 성리학자들의 온갖 사연들을 담은 시서화를 통해 문서상으로나마 특히 두모포 경관을 재구성해볼 수 있다.
덕소, 팔당
경강의 중상류 지역이 더욱 난개발의 양상을 드러낸다. 광나루(광진), 덕소, 팔당 일대로 뻗는 도심 외곽 교통의 혼란 상황이 가중되고만 있다.
다산 정약용 생가 일대(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한강 수운 경관의 첫 꼭짓점으로 찍어볼 수 있다. 다산 생가 덕분에 강변 풍경이 간신히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홍대용과 박지원의 스승 격이던 김원행의 '석실서원'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다.
다산 생가를 통해 '성호 좌파'라 부르는 남인 계통 학맥의 '경기실학(근기학파)'을 짚어볼 수 있다. 노론 학맥에서 갈라져 나온 이용후생 학풍의 배양지(기호학파)를 살피고, 그리고 후대의 척사위정 의병활동 루트를 더듬어볼 수 있다.
09:00-9:30 양수리(두물머리)
양수리(두물머리)는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수머리가 되는 큰 포구였는데 남양주시 쪽도 양평군 쪽도 옛 자취가 없다. 다만 운길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에서 녹차를 마시며 옛 시편과 기행문들을 통해 두물머리의 물굽이가 어제에서 오늘로 어떻게 흘러왔는지 조망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강변 풍광은 시인묵객들의 유람시편들로 얼큰하였다. ⓒ황헌만 |
10:30-11:30 이포나루, 파사산성
이포나루(여주군 금사면 이포리)는 북한강과 작별한 남한강 수로가 본격적으로 곡창 평야지대의 젖줄이 되어주고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유서 깊은 포구이다. 인근의 파사산성은 남한강을 차지하는 자가 한국사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고대사의 군사요충지였다.
이포나루는 김안국이라든가 이황 등의 자취가 스며있는 곳인데 썰렁한 정자 하나가 재건축되어 있을 따름이다. 여주까지 강변 드라이브 코스로는 제격인데 시인묵객들의 유람 시편들이 얼큰하였다.
여주 신륵사, 조포나루
여주 일대의 남한강은 옛 시절 제방을 쌓아볼 수 없는 환경이어서 홍수 범람 방지를 위해 신륵사를 풍수 비보의 사찰로 조영하여 수자원 관리를 하였다. 여주의 '여(驪)'라는 글자는 검은 말을 가리킨다. 여주는 그 전에는 황려(黃驪)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홍수와 태풍을 일으키게 하는 황마와 흑마의 두 말을 옛 사람들이 어떻게 길들였는지 신륵사의 영원루에서 '전설 따라 삼천리'의 사연들을 새겨볼 수 있다.
조포나루는 고려 시대 이후 남한강 5대 강항의 하나로서 세곡운반과 물자수송의 물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황후라든가 한말의 민비 등은 여주 일대에 대농장을 운영하여 서울 경제권의 배후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1963년 10월 23일 남한강의 대홍수 범람으로 조포나루 참사가 일어난 후에 여주대교가 건설되었다.
13:00-14:00 점심식사
▲ 남한강은 원삼국시대부터 이미 '코리아의 소울(soul)'이었다. ⓒ황헌만 |
14:00-15:00 고구려 유적 중앙탑, 국원성, 중원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의 중앙탑 호수공원은 고구려가 남방경략으로 국원성을 설치했던 곳이고 신라가 이를 탈환하여 중원경을 건설하기도 하였던 중원쟁탈의 핵심을 이루던 강항이었다. '고구려 중원비', '고구려 반가사유상', '누암리 고분군' 등의 역사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당연히 '국원나루'라 명명해야 할 것임에도 충주시는 엉뚱하게 '탄금호'라는 작명을 하고 있다.
국원나루는 계립령이라는 군사요충지를 확보하면서 속리산 방향의 백제와 소백산 남쪽의 신라를 겨냥하는 정치지리학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고 남한강 수운을 통해 교통 교역의 중심지가 될 입지조건을 구비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충주시 당국은 그냥 조정경기장 조성에나 관심을 쏟는 무신경의 역사의식을 보여줄 따름이다.
남한강 본류와 달천(달래강)의 합수머리가 되는 곳의 탄금대의 역사경관 또한 어지럽게 방치되고 있다. 국토 토건사업으로 남하강의 '대운하계획'이 시행된다면 탄금호 일대의 문화역사경관이 우선 초전박살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16:30-19:00 옥순봉, 구담봉, 장회나루
신라의 17세 소년왕 진흥왕이 소백산을 넘어 남한강 일대를 장악하기 시작하였을 때 '하림궁'을 짓고 우륵의 가야금을 들으며 남한강 대하 러브 로망을 펼쳤던 절경지이다(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구담봉과 옥순봉이 조그만 반도처럼 돌출되어 강물이 돌아나가는 경승지이자 군사요충지였다.
48세의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7세의 관기 두향과 장회나루 일대에서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었다는 현대소설들의 상상력이 참으로 터무니없이 한심하기도 하다. 산길을 따라 두 봉우리에 올라갈 수도 있고 유람선을 타고 물길을 따라 일주를 해볼 수도 있다.(천하절경 옥순봉 트레킹합니다. 왕복 4.6km인데 대부분 평지이고 0.9km를 올랐다 내려옵니다. 걷기 불편하신 분은 장회나루 주위를 산책하거나 유람선을 타고(1만원 부담) 옥순봉, 구담봉 경승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
충주댐으로 수몰지역이 된 옛 청풍 관아의 건축물들과 누정들을 이전시켰고 다른 수몰지역의 한옥과 초가 및 문화재들을 모아 조성했는데 나름대로 품격을 지닌 민속문화촌이라 할 수 있다(제천시 청풍면).
청풍명월의 본향인지라 풍광이 좋아 부근에 드라마 세트장이 조성되어 있고 고급 리조트가 자리 잡고 있다. 금수산 산자락에 놓인 정방사(淨芳寺)의 조망이 일품이다.
▲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주댐으로 수몰된 옛 청풍 관아의 건축물과 누정 등을 이전시켰다. ⓒ황헌만 |
(이상 남한강의 중류 지역까지 그 문화역사경관의 얼개를 간추려 보았는데, 남한강의 상류 지역인 단양 도담삼봉에서 영월의 동강 서강, 정선의 아우라지 배나드리, 평창의 평창강 오대천 및 남한강 발원지 등의 문화역사기행은 별도의 기획으로 답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임)
19:00-21:00 저녁식사 및 정리모임
21:30 월악산 송계계곡 숙소(월악산유스호스텔…다인실) 도착, 취침
4월 26일(일요일)
06:00 기상
07:00 출발
07:30-08:30 아침식사
<영남대로 옛길 안내>
백두대간은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치켜세우다가 삼척 지경에서 방향을 돌리는데 내륙지역을 가로지기로 솟구게 한다. 서남쪽으로 뻗으며 태백산, 소백산, 도락산, 황정산을 올려놓는다. 이어서 다시 방향을 돌려 서북쪽으로 올라가는데 남류하던 남한강이 단양 지경에서부터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수세와 백두대간의 산세가 맞물린다.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백화산, 이만봉, 군자산, 속리산, 민주지산, 덕유산은 국토의 허리띠를 바짝 조여 놓고 여기에 남한강, 금강, 낙동강, 섬진강이 달라붙어 대협곡지대를 형성한다. 국토 중앙지대의 남북 왕래가 까다롭게 되고 동서 횡단이 원활하지 않게 되니 '산전수전'의 상황이 벌어진다.
영남대로 좌로, 중로, 우로
영남대로는 남성성의 백두대간과 여성성의 남한강 및 낙동강, 금강이 오락가락, 갈팡질팡하며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행로의 형국과 유사하다. 영남대로는 원래 세 개라 할 것이니 좌로의 죽령, 중로의 새재, 우로의 추풍령이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에 '도로공원' '도로박물관'으로 새재의 녹색환경이 복원됨으로써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길의 새재길이 영남대로를 대표하는 옛길처럼 되었다.
월악산 송계계곡
미륵사지가 있는 충주의 미륵리에서 월악산을 끼어 협곡이 형성되어 '월악나루'라 부르는 남한강 강변까지 뻗어 있는데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일대의 이 골짜기를 송계계곡이라 부른다. 고려시대까지 남북왕래의 요충지였으니 남한강 수운으로 월악나루에 닿아 송계계곡의 회랑을 지나 하늘재를 넘어 남행을 했다.
월악산 산행 들머리가 되는 송계계곡에는 고려시대의 산성과 사찰들을 비롯해 역사유물들이 산재하고 있으나 국립공원 지역이 되어 자연보호, 사람보호, 역사보호가 그저 시들하기만 하다.
09:00-10:30 미륵사지~하늘재(왕복)
미륵사지(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는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남매가 신라부흥을 위한 아지트로 지은 절터라는 전설이 있으나 실은 왕건과 그의 사돈인 충주 호족 출신 유긍달 장군이 경주 석굴암을 모방하여 호국사찰로 지은 것이 확실한데, 거대 석불의 사연들을 박태순 기행문에서 추적했다.
하늘재(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는 서기156년에 신라가 닦은 '계립령' 옛길의 루트임이 확실한데,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역사문화 생태로로 숲길을 조성해놓았다. 문경읍 관음리의 고개마루까지는 자동차가 다니지만 충주시 미륵리 지경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숲길이 마련되어 찻길을 차단시킨다. 하나의 고개임에도 남쪽에 '관음'과 북쪽에 '미륵'을 건사하는 이런 국토 아리랑 고개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 미륵사지의 석불. 고려 초기 충주 호족세력이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황헌만 |
11:00-13:00 문경새재 트레킹 6km(내리막길·편도)
'새재'는 조선 태종 때 새로 닦은 관도(官道)였기 때문에 이런 지명을 얻었다 하기도 하고 억새풀이 많은 지역인 데에서 유래된다는 설, 새도 울고 넘어가는 고개라는 데에서 연유된다는 설이 있으나 실은 그 종합편이다.
국토 한복판에 녹색 도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산악인들의 등산로로서도 제격이지만 문화역사지리학 탐구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더 많아야 할 것이다.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의 제3관(조령관)~제2관(조곡관)~제1관(주흘관)이 복원되어 있고 최근에는 선비길, 과거길로 이 고개를 지나다녔던 시인묵객 선비들의 시비를 도처에 세워놓고 있으며 드라마 세트장으로 관광객이 몰리기도 한다.(걷기 편한 내리막길입니다. 각자 약간의 간식과 식수 준비하기 바랍니다).
13:00-14:00 점심식사
14:30-15:30 진남교반, 고모산성, 토끼벼리길(토천)
예전에는 문경 새재 못지않게 험하다던 험로였다. 고모산성이 세워져 있는 오정산(805m)이 벼랑을 이루어 가은천(속리산 방면에서 내려오는 하천)과 조령천(주흘산 방면), 신북천(운달산 방면)이 합수되는 영강과 맞부딪게 한다. 고모산성의 남문으로 진남관을 세우고 하천에 진남교라는 다리를 놓은 이 일대를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 하여 경북 제1경의 승경지로 꼽았다.
고모산성에서는 최근에 신라가 6세기경에 쌓았던 산성의 흔적을 찾았다. 토끼벼리는 토끼나 지나다니던 곳에 길을 낸 바위너덜 벼랑길이었다. '관갑천(串岬遷)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하천을 꿰고 산허리를 파헤쳐 간신히 뚫어놓은 오르막길이라는 뜻이다.
▲ 진남교반의 토끼벼리. 오랜 세월 토끼나 다닐 길을 사람 발자국이 만들어내었다. ⓒ황헌만 |
그러나 이 영남대로 옛길 일대는 근대기술공법의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국도 및 지방도로가 서로 바짝 다가붙어 경관을 흠집 내고 병목 현상마저 일으키고 있다. 역사지리의 요충지를 복구하거나 복원시킬 방식은 없다. 인근에 있는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의 희양산과 견훤 출생 설화가 서려 있는 농암면의 농바위 일대가 승경지이기도 하다.
(이상 하늘재와 새재 그리고 토끼벼리 일대의 영남대로 진입로 쪽의 루트를 개괄해 보았거니와 죽령 쪽의 영남대로는 다른 답사계획이 필요할 것임.
참고로, 상주시 공검면의 공검지(공갈못)는 식민시대에 매립되었는데 저수지의 일부를 연못으로 조성하여 복구시키기도 했지만 김제의 벽골제, 제천의 의림지 등과 함께 가장 오래 된 관개 농업의 발상지였다. 새재와 진남교반의 협곡지대를 벗어나서 낙동강과 함께 대평야지대가 전개되는 경관을 볼 수 있는데 가야 왕릉이 지금껏 남아 있다.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물돌이동 마을인 회룡포는 봉화에서 발원하여 영주를 거쳐 흘러오는 내성천(낙동강 지류)이 크게 똬리를 틀고 있는 곳에 형성된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접전을 벌인 '원산성(圓山城)'이 이곳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청정의 생태환경이던 곳이 최근에는 오염이 심해져 가고 있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는 안동 하회마을 쪽에서 흘러오는 낙동강 본류와 영주 쪽의 내성천, 그리고 새재 쪽에서 남류하는 금천의 세 강이 합류되는 곳이어서 삼강나루가 물화 번성하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삼강주막마저 폐가가 되고 말았지만 관광지로 조성해보려는 상업주의가 다시 이 일대를 개조시키려 하고 있다.)
15:30 서울로 출발
이번 제1강 참가 규모는 30명이며 자세한 안내와 문의는 huschool.com 또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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