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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꿈이 그냥 '부자'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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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꿈이 그냥 '부자'인 이유

[민들레 교육 칼럼] 문제는 교육의 과잉 상품화다

시험을 잘 보는 것과 공부를 잘한다는 것

30여 년 전에 어느 일간지에 실린 네 컷짜리 만화가 생각난다. 과외 공부를 열심히 하는 어느 고등학생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왜 과외를 하니?"
"대학 가려고요."
다시 어른이 묻는다.
"대학 가서 뭐 하려고?"
"과외 하려고요."

짧은 대화 속에 함축되어 있는 교육 현실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대학의 교육이 부실한 한 가지 주요 원인으로 교수들이 수험생들의 과외 수업을 해주는 데 많은 시간을 쓰기 때문이라고 지적된 적이 있었다. 엄청난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 진학하지만, 정작 대학에 와서는 교수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학부모든 학생 본인이든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 진학의 목적이 전문적인 능력의 습득보다 학위 취득에 있기 때문이다. 졸업장만 받을 수 있다면 부실한 수업이 심각한 손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보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는 풍토에서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과외 '알바'다. '일류대생'일수록 사교육 시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다. 입시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과 함께, '일류대생'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수험생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학습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의 몸값을 높인다. 공식적인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대학생 단계에서 자신의 상품 가치를 먼저 깨닫게 되는 곳이 비공식적인 사교육 시장이다. 이런 상황은 1970년대 무렵부터 생겨났다.

▲ 기사의 내용과 관계 없음. ⓒ연합뉴스
모든 상품화가 다 잘못된 것이 아니듯, 교육의 상품화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공교육으로 부족한 것을 메워주는 기능을 사교육이 어느 정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과외 같은 경우도 대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지금 사교육이 중대한 쟁점이 되는 이유는 우선 그 규모가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데 있다. 즉 교육의 '과잉 상품화'가 문제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사교육 시장이 고도로 전문화되어 오다가 선행학습이라는 신종 상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상품이 히트를 치고 모든 학생의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면서, 사교육비가 가계에 막중한 부담을 주고 계층 간의 격차가 학력 격차로 이어졌다.

교육의 과잉 상품화가 불러일으키는 또 한 가지 중대한 폐해는 아이들의 지적 성장이 왜곡된다는 점에 있다. 나는 20년 이상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는데, 최근 십여 년 사이에 학생들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낀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고 삶에 대해 매우 불안해한다. 취업난이라는 객관적인 현실이 1차적 원인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십대 시절에 결핍된 무엇인가가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경험의 빈곤'으로 사회적 지능이나 다양한 리얼리티에 대한 구체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무언가에 도전하고 부딪쳐보면서 깨닫게 되는 자아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을 희생해서라도 공부 하나 잘해서 '일류대학'에 들어왔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따져보아야 할 것은, 정말로 공부를 잘하는가 하는 점이다. 시험을 잘 보는 것과 공부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능력 아닐까.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점점 짙어지는 의문이자, 대학생들이 스스로 토로하는 바이기도 하다. '일류대생'들조차 자신의 지성을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매니저 엄마'가 짜준 촘촘한 사교육으로 공부해왔고, 출제자 의도는 물론 문제와 정답 유형을 재빠르게 간파해서 고득점을 따는 학생들이 많아지는 추세에서 엘리트의 실속은 점점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시험을 위한 학문은 사람의 마음 쓰는 법을 파괴한다. 옛날 소위 학교에서는 예절과 음악을 배웠는데 이제는 예(禮)도 깨지고 악(樂)도 무너졌으니, 학교 교육이 독서에 그치고 말았다."

다산 선생의 말이다.

상품화되면 하락하는 가치

교육열이 대학 입시로 집중되는 현실에서 교육의 과잉 상품화는 불가피할 듯하다. 인생의 승패를 대학의 서열로 매기는 집단의식,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경쟁에 올인하는 사회에서 게임 요령을 알려주는 사교육은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해 교육 당국은 EBS 강의를 최고급 수준으로 만들고 수능 문제를 그 교재들을 중심으로 출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한 줄 세우기로 등급을 매기는 평가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결국 편차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은 완화되지 않는다. 사교육 시장에서 개발된 내용들을 국가가 탈상품화하여 공공재로 내놓아도, 그것을 넘어선 점수 획득을 위한 노하우가 또다시 상품화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과잉 상품화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입시를 넘어선 지적 성장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서 일차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품성과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 때, 대학 입학이라는 단기 승부만으로는 결코 체득할 수 없다. 그리고 교육을 상품화하는 데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주입하는 교육 상품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확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고력을 키우고 다양한 체험을 정교하게 조직한 프로그램도 '상품'이라는 형태를 띨 때, 그 본질이 왜곡되기 쉽다.

몇 해 전 논술학원계에서 신화적인 명성을 누리던 강사가 과로사했던 일이 있다. 그 업계를 잘 아는 어느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강사는 논술 과외 수요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에는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면서 거의 두 달 이상을 버텼다고 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대형 강의가 이어졌고, 강의가 없을 때도 쉬지 못하고 강의 개발과 회의 등 강행군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한 강좌에 몇 천만 원이 들어오니 잠을 줄여 한 시간이라도 강의를 더 하고 싶었으리라. 한 달에 몇 억씩 벌어들이던 그 강사는 몸이 보내는 SOS 신호도 무시한 채 내달리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교육의 과잉 상품화는 수요자뿐 아니라 공급자의 삶도 파괴한다. 유능하든 무능하든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뽑아내는 '자기 착취'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봄직한 문제는 그렇게 과로와 스트레스에 찌들어 있는 선생으로부터 학생들이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수강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지 않으려 노심초사하면서 행하는 논술 강의에서 어떤 정신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은 어떤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성과 감성을 연결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후자가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며, 그 과정은 타인과 제약 없는 소통과 교섭을 통해 이뤄진다.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과 하는 상호작용에서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상품화되기 어렵다. 사람을 고귀하게 하는 것일수록 돈이 개입될 때 그 가치가 훼손된다. 예를 들어 존경이나 우정, 배려 같은 것을 상품화할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내게 얼마를 받는 조건으로 나를 존중해준다면? 위로나 격려를 사고팔 수 있다면? 용서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한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런 마음의 작용들은 본질적으로 상품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품화되는 순간 그 가치는 사라진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대부분 무상으로 주어진다.

교육에서도 그러하다. 인간의 성장을 돕는 자양분들은 시장 바깥에서 더 많이 공급된다. 이해관계나 보상 유무를 떠나서 오로지 타인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만이 생명력을 갖는다. 지식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권유는 가르침과 배움에서도 적용된다. 시험 점수나 자격 획득을 위해 수단화된 지식은 그 쓰임새가 사라지면 함께 소멸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앎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배움은 우리 자아 깊숙한 곳에서 나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그런 배움이 진정한 의미의 공부이고, 그 영역이 넓어지는 만큼 교육은 상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삶과 배움의 복원을 통한 탈상품화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정성스럽게 만들고, 물건을 조사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일,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부이다.' (연암 박지원)

대학생들의 스펙 가운데 하나로 한자 급수가 있다. 대학 입시 과목에서 제외되어 있기에 학습지 등의 형태로 공부해온 학생들 아니면 한자를 거의 읽지 못한다. 대학에 와서 별도의 시간과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상용 한자를 마스터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중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당시 보통 아이들의 한자 실력이 지금의 우수한 대학생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해서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생활 속에서 한자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과 국어 교과서에 한자가 가득했고, 한자로 제목이 쓰여 있는 책들이 집 안에 굴러다녔다. 그리고 길거리 간판에도 한자가 많이 쓰여 있었다. 더욱 결정적인 차이는 한자로 새겨진 이름표다. 출석부에도 이름이 한자로만 적혀 있었다. 그래서 3년 동안 200명 정도의 이름을 한자로 익히게 된다.

그렇다고 다시 한자를 그렇게 상용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지만, 치러야 할 대가들을 면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한글 전용이 되면서 정보·지식의 민주화가 빠르게 진척된 것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다만 학습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할 뿐이다. 지금 대학생들이 많은 비용과 노력, 시간을 들여서 수업이나 학습지로 공부하는 것보다 우리 세대가 훨씬 더 효율적으로 한자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환경 자체가 지닌 속성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속성은 여러 영역에 걸쳐 일상 세계 속에 언제나 담겨 있었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다. 예를 들어 지금 아이들이 컴퓨터나 휴대폰을 조작하는 능력은 일상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재미 삼아 또는 필요에 의해서 조작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깨우친 것이다. 이른바 '경험에 의한 학습(learning by doing)'이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 사이에 상호 학습도 이뤄지기 때문에 격차도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책이나 수업을 통해서 익혀야 했다면 무척 고역스러운 학습이 되었을 것이고, 아이들 사이에 수준차도 대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들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교육을 탈상품화하는 한 가지 방향으로, 일상생활 자체에 학습 요소들을 주입하거나 복원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리적인 환경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환경이다. 예전에 마을이라는 것이 살아 있었을 때는 아이들이 마을 안에서 수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목격할 수 있었다. 동네 어른들의 다양한 직업 활동이나 이웃 사이의 유대나 갈등이 자연스럽게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보다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라이프 스토리들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었다. 옛날이야기를 해주시고 때로 꾸중도 하시던 옆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생애를 길게 투시할 수 있었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삶 자체가 공유되는 것만으로도 마을은 훌륭한 교실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능력이나 태도의 상당 부분은 그 교실에서 터득한 것이다.

예전 같은 형태로 마을을 복원할 수 없는 지금, 지역 안에서 학습이 저절로 이뤄질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평생학습도시'를 자리매김해볼 수 있다. 평생학습은 단지 시간적으로 학습 시간을 연장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평생학습은 공간적으로도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삶의 현장 곳곳을 학습 장소로 변환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제반 사물과 경험에서 학습의 계기를 발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배움의 인연(진정한 의미의 학연)'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일상의 여러 장면들에서 호기심이 발동하여 흥미로운 질문과 대답들이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경이로운 학우로 만나게 되는 것이 평생학습도시의 비전이다. 그 비전이 제대로 실현되는 만큼 교육은 탈상품화될 수 있다.

성장의 내적 동력 함께 북돋아주기

지난해에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교회와 사찰에는 수험생 어머니들의 기도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수능 당일에는 시험 시간에 맞춰 기도회가 열린다. 1교시에 시작해서 4교시까지 정확하게 시험 시간에 맞춰 기도회가 이뤄지고 중간에 20분씩 휴식시간이 있다(하느님도 부처님도 입시철에는 힘드니까 수험생들과 같은 호흡으로 쉬어가면서 일하셔야 하나 보다). 자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종교 기관들은 참으로 영특하게 의례화한다. 그런데 수많은 종교 기관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기도빨'이 잘 먹히기로 유명한 사찰들이 있는데, 그 기도의 효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느 사찰 주지스님의 말씀은 무릎을 치게 한다. 당신이 보기에, 어머니들이 기도하느라 허구한 날 집을 비우기 때문이란다. 즉, 옆에 붙어서 잔소리하고 닦달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시험 공부를 잘한다는 뜻이다. 웃자고 한 이야기였겠지만,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을 듯하다.

▲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지난해 11월, 서울 성북구 우이동의 한 사찰에서 '대입 합격 100일 기도'를 하고 있는 학부모들. ⓒ연합뉴스

수험 공부조차 저마다의 리듬을 따라서 자율적으로 해나갈 때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요즘 아이들 가운데 그 정도의 자기 관리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사교육의 확대와 악순환 관계로 맞물려 있다. 교육의 상품화는 학습 주체의 왜소화를 유발하고, 이는 다시 교육의 상품화를 촉진한다. 학원의 주요 기능이 아이들의 몸을 책상에 붙들어놓는 것, 그럼으로써 부모들에게 당장의 근심을 덜어주고 아이와 겪게 되는 갈등을 피하게 해주는 것임을 학원 강사들은 잘 알고 있다.

교육의 과잉 상품화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심각한 결과는 아이들이 자기 안에서 솟아오르는 배움과 성장의 욕구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 나름의 생애를 설계하고 그 긴 여정을 한걸음씩 밀고 나가는 내공을 쌓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돈만 있으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다(초등학생들 가운데 장래 희망을 그냥 '부자'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또는 적어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노스페이스' 등의 물신이나 외모 꾸미기, 아니면 폭력과 패거리 짓기로 자기를 방어하려 한다. 그러한 내면의 허약함은 교육 상품이 번식하기에 매우 좋은 토양이 된다.

프랑스에서 걷기 운동을 보급하는 단체로 'Seuil'('문턱'이라는 뜻)이 있는데, 그곳에서 추진하는 한 가지 획기적인 프로그램이 있다. 수감 청소년들에게 3개월 동안 2000킬로미터를 걸으면 석방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조건은 하나도 없다. 파트너로 지정된 한 어른을 멘토 삼아 함께 걷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긴 거리를 자기 발로 걸어서 석방된 청소년들의 재범률은 15퍼센트라고 한다. 평균 재범률이 85퍼센트라고 하니, 이른바 교정 측면에서 대단한 효과를 입증하는 셈이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삶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스스로 뭔가를 성취해가면서 확인된다. 그리고 타인과 의미 있는 교섭을 통해 신장된다. 교육이 상품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배움과 성장의 기운이 생동해야 한다. 내면의 깨우침과 약동이 일어나는 사회적 계기들이 다양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서로 존재를 지지하고 틔워주는 관계 속에서 공부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가 그런 자리가 될 수 있을까.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이 학교의 기원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는 교육의 과잉 상품화 시대에 숙연한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학교는 어느 나무 아래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교사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 학생인 줄 모르는 몇몇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오간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하고, 이 사람 앞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이들에게도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바라던 공간이 세워져 최초의 학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건립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학교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즉 우리들 바람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동의입니다.

* 위의 글은 <민들레>84호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교육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김찬호 교수의 글입니다. (☞ <민들레> 바로 가기)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쓴 책으로는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 펴냄), <사회를 보는 논리>(문학과지성사 펴냄)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에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J. 파머 지음, 글항아리 펴냄)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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