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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 무(武) = 유라쿠 천황 = 곤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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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 무(武) = 유라쿠 천황 = 곤지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7〉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인 까닭 ③

(2) 왜왕 무(武) = 유라쿠 천황 = 곤지왕

현재 일본에서는 왜왕 무(武)가 제 21대 유락쿠(雄略) 천황이라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 중기의 국학자였던 마쯔시다겐린(松下見林)이 왜왕 무(武)가 유라쿠 천황이라고 말한 이래 이설이 없습니다.18) 그러면 결국 유라쿠 천황이 곤지왕이 되는데 역사적 사실에 문제가 되는 것은 곤지왕이 개로왕의 동생인지 아들인지 하는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송서』「왜국전」에 나타난 국서의 내용과 왜왕 무를 곤지왕으로 본다면,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드님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일단 왜왕 무라고 인식되고 있는 유라쿠 천황에 대해 알아봐야겠군요.

▲ 유라쿠 천황과 천황능[高鷲丸山古墳(雄略天皇陵古墳)]
[大阪府羽曳野市 소재 : 원분(円墳) - 지름75m 높이9m]

이제부터는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유라쿠 천황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봅시다. 즉 일단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가정을 보류하고, 유라쿠의 일대기를 보면서 곤지왕과의 공통점을 찾아서 이중으로 검증을 하도록 합시다.

첫째, 유라쿠 천황의 성격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유라쿠 천황은 매우 포악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유라쿠 천황이 신하의 아내가 더 없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고 그 아내를 후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건은 마치 『삼국사기』열전에 나타난 개루왕(또는 개로왕)의 '도미설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일본서기』유라쿠 천황조를 보면, 유라쿠 천황이 등극한 후 6년에야 비로소 정치적인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유라쿠 천황의 행적이 주로 사냥·엽색·전쟁 또는 살인 등으로만 묘사되어있을 정도입니다.

유라쿠 천황이 난폭하다는 문제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유라쿠 천황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유라쿠 천황은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등극하였기 때문에 매우 난폭한 인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은 자신의 형들을 포함하여 경쟁자들을 살해하고 즉위했습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이 엄청난 정치적 격변은 반대세력의 일시적 소탕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야마토 지역에 머물렀던 사람이 바로 곤지왕입니다. 곤지왕은 주로 군사적인 업무를 담당한 군벌 세력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군군(軍君)으로 묘사된 것 같습니다. 한족식(漢族式)으로 말하면 무제(武帝)와 같이 그 묘호(廟號)에 무(武)가 들어가는 식입니다. 어떤가요? 이제 왜왕 무(武)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사정이 어떠하든 유라쿠 천황과 같이 강고한 인물이 곤지왕이 아니라면, 야마토 지역에 이 두 사람이 15년 이상 아무 탈없이 공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둘째, 유라쿠 천황이 백제왕을 임명하여 반도로 보낸 문제입니다. 즉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라쿠 천황은 곤지왕의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인 마다(末多)를 백제에 보내 동성왕(479~501)이 되게 합니다. 이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반도 사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을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만약 유라쿠 천황이 반도부여(백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기록 자체가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만약 유라쿠 천황이 부여계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면 이 기록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 됩니다. 당시 백제는 멸망하고 개로왕도 잡혀서 죽고 문주왕 - 삼근왕이 4~5년 사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백제왕을 지명할 사람은 역사 기록상으로는 곤지왕이 유일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라쿠 천황이 백제왕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인물은 동일인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두 인물이 동일인이 아니면, 야마토의 왕이 백제에 무슨 권한이 있어 왕을 지명합니까? 백제가 일본의 조공국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후에 보겠지만 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이 시기까지 중국으로부터 백제가 일본열도보다도 서열이 낮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곤지왕은 자기의 장성한 아들을 백제(반도부여)로 보내어 다스리게 한 것이죠.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21년 즉 476년에 "천황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파멸되었다고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 : 熊川 또는 공주)를 문주왕에게 주고 그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라고 합니다. 이 기록은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긴 합니다. 즉 『삼국사기』에는 문주왕(475~477)이 곤지왕의 형님으로 나타나는데, 한성백제가 멸망한 상황이니 일본의 곤지왕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강했음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개로왕 사후 반도부여(백제)의 권력 변동(문주왕의 등극)을 왕위계승 서열 2인자인 곤지왕이 이를 인정했다는 의미로 봐야할 대목입니다. 그리고 문주왕이 477년경 서거합니다. 그런데 478년경에 나타난 왜왕 무의 국서에서는 "아버지와 형님의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타나 모든 사건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죠.

당시의 정황이나 기록으로 보더라도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부흥시킬만한 실질적인 세력은 곤지왕밖에 없죠.

따라서 곤지왕 = 유라쿠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유라쿠 천황과 곤지왕이 동일인이 아니면 『일본서기』의 기록이나, 『삼국사기』, 『송서』,『위서』등의 기록이 모두 뒤틀려 오리무중에 빠지게됩니다. 그러나 곤지왕이 유라쿠 천황이 되면 이 기록들은 고도의 정합성(일치성)을 가지게 됩니다.

▲ 초기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서울 천호대교 옆)
(붉은 선은 토성의 성벽)

유라쿠 천황은 열도 쥬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일본의 역사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 유라쿠 천황 시대에 궁정조직이 크게 정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보다 세련된 정치 조직들이나 체계가 제대로 이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왕권을 구성하는 씨족이 바뀌어 중소 부족의 족장들이 권력의 중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여성 최고 사제는 폐지되었으며, 원초적인 신료집단(臣僚集團)이 형성되었고, 형벌 관련 전문 행정조직인 물부집단(物部集團 : モノノトモ)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5세기 후반의 유라쿠 천황이야말로 일본 최초의 궁정군주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19)

유라쿠 시대에 이 같이 급격한 정치조직의 변화가 나타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개로왕의 도미설화와 유사한 형태의 설화가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부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곤지왕이 열도로 갈 당시에는 담로제도에 기반한 부여계 통치조직의 수장은 개로왕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그러니까 『일본서기』유라쿠 천황의 초기 비공식적인 기록은 개로왕의 기록이라고 봐야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곤지왕이 야마토 지역에서 정권을 장악하여 그 곳에 머물면서 왜왕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로 탈바꿈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백제가 멸망하면서 이제 열도를 중심으로 부여계의 정권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전에는 야마토가 백제(반도부여) 행정구역의 일부이었겠지만 곤지왕이 백제왕의 전권을 위임받아가면서 야마토 지역은 백제왕으로부터 좀더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왕의 아들(또는 동생)이 왕의 자식과 왕비를 데리고 간 것은 강력한 자율 정치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즉 개로왕이 곤지왕에게 임신한 아내를 하사하여 열도로 보낸 것은 '부여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즉 백제의 멸망을 예견한 개로왕은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담로의 하나인) 비교적 안전한 열도로 보내면서 자신의 사후에도 부여의 국체를 유지하라는 명을 내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개로왕이 자신을 대신하여 곤지왕이 나라를 세우고 부여의 국체를 이어가라는 하나의 소명이자 유언(遺言)이었습니다. 다만 그 시작은 개로왕 자신이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백제에서 곤지는 왕자이거나 좌평이었고, 열도에서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열도에 있어서의 정치적 자율성이 백제가 멸망(475)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유라쿠 시대의 정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극단으로 향하던 부여 위기의 시대가 다시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탈바꿈하게된 중심에는 곤지왕이 있었던 것이죠.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교수는 "연대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그대로의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의 유라쿠 천황기(4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기저기 보인다."20)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유라쿠 천황부터 제대로 된 야마토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히라노 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야마토에 의한 일본 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 왜왕 무(武) 즉 유라쿠 천황부터라고 주장하면서21) "왜왕 무의 상표문은 간토(關東)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가라(加羅)의 군사적 정복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히라노쿠니오교수는 이 유라쿠 천황의 시기에 국토의 통합이 획기적으로 진척된 것이 분명하다고 봅니다.22) 즉 유라쿠 천황의 시기에 일본 열도는 야마토 왕권을 중심으로 통일작업이 매우 크게 진척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요약하자면, 유라쿠 천황 이후 일본의 변화는 일본에서 부여계 고유의 담로제가 약화되면서 새로운 왕조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임신한 왕의 부인을 보낸 것도 이제는 이해할 수가 있겠군요.

그러니까 곤지왕 이전에는 열도부여의 왕 즉 왜왕은 반도부여의 왕이었다면 이후에는 열도부여의 제왕은 왜왕 또는 천황으로서 나타나게되는 것이죠. 따라서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 등의 왜5왕 가운데 찬(讚), 진(珍), 제(濟), 흥(興)은 모두 백제왕이었다는 얘기죠.

지금까지의 분석을 토대로 본다면 곤지왕은 일본의 유라쿠 천황이며 그는 한편으로는 멸망한 반도부여를 중흥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도부여를 고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이 왜 5왕의 가족 관계와 관련 사항들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봅시다.

필자 주

(18) 岩波書店『日本書紀』(上) (1967) 626쪽.
(19) 山尾幸久「日本古代王權の形成と日朝關係」『古代の日朝關係』(塙書房 : 1898)
(20) 末松保和『任那興亡史』(1956) 22쪽.
(21) 平野邦雄 『大化前代政治過程の硏究』(1980) 222쪽.
(22) 平野邦雄 『大化前代政治過程の硏究』(1980)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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