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태도가 교류와 대화를 재개하는 쪽으로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북한이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내용이 혼재되어 있어 북한의 수용 여부는 미지수다.
당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강조하고 있는 2000년 6.15공동선언과 2007년 10.4남북정상선언에 대해 "당연히 존중한다"라며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지난달 29일 발언을 언급했다.
김하중 장관은 당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남북간 합의 중에는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6.15선언, 10.4선언도 있는데 이행되지 못한 것도 많다"며 "앞으로 현실을 바탕으로 상호 존중의 정신 아래 남북간 협의를 통해 실천가능한 이행방안을 검토해 나가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장관의 이같은 말은 이명박 대통령의 3월 26일 통일부 업무보고 발언과 비교할 때 적잖은 변화라는 해석을 낳았다. 이 대통령은 당시 남북기본합의서만을 강조하고 6.15선언과 10.4선언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후 북한은 두 선언의 이행을 강조하며 대남 공세를 취해왔다.
김 장관의 발언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에 또 한 번 대화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본다"라고 해석했고, 유명환 장관은 1일 이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유 장관은 인터뷰에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발전을 위해 언제든지 북측과 진지한 대화를 할 준비가 돼 있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라며 "6자회담 추이를 봐가며 시급한 수요가 있는 사안을 중심으로 진정성있고 실효적인 대화를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도 말했다.
유 장관은 이날 북한대학원대학교 개교 10주년 국제학술대회 연설에서도 핵폐기 과정에 진전이 있으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 구상인 '비핵·개방 3000'을 실천하기 위한 남북협의를 시작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남북협의의 전제조건이 비핵화의 완료가 아닌 '핵폐기 진전'임을 또 한 번 강조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이같은 태도 변화는 북한과 미국의 핵협상이 진전을 보이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측이 보여주고 있는 통미봉남(通美封南)적 자세를 의식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달 방미 중 남북 연락사무소를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작년 남북이 합의한 6.15선언 8주년 기념행사를 허용한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채찍
그러나 연락사무소 제안이 그 즉흥성으로 인해 북한의 외면을 받았듯 고위 당국자들의 대북 발언에는 '가시'가 숨어 있어 현재의 경색 국면을 풀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유명환 장관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정식 참여 문제는 사실 조금 필요 이상으로 의미가 확대되는 부분이 있어 조금 걱정스럽다"라며 "세계 86개국이 참여하고 있고 국제법 원칙을 준수해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지 상대국 배를 공해상에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의 반발을 의식해 현재 8개 항목 중 5개에만 참여하고 있는 PSI에 정식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PSI를 '전쟁 행위'로 여기고 있는 북한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남측과 대화를 재개하긴 어려워 보인다.
유 장관은 또 북한의 요청이 와야 인도적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이 재고될 수 없냐는 질문에 "유엔도 인도적 지원은 상대방의 요청이 있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쌀·비료 등의 지원은 북이 먼저 달라고 해야 지원 여부와 규모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유 장관은 또 북한대학원대학교 강연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북핵 문제 외에 인권 등 북한의 다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설령 핵 문제가 해결된 뒤에라도 또 다른 '북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의미로 북한의 반발 소지가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채찍과 당근'이 뒤섞인 대북 메시지가 북한을 움직이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연일 대남 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북한의 태도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북이 받을 수 없는' 유화 메시지를 보내는 게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진정한 대북용이 아니라 단순한 명분쌓기용이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의 분명한 메시지
반면 미국의 대북 태도는 사뭇 다르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달 24일 북한과 시리아 핵협력을 '확신한다'고 발표하고 30일에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다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핵협상 이행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는 1일 "(북한의) 영변 핵시설 불능화 및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서 제출과 연계해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고 대 적성국교역법 적용 중단 의사를 의회에 통보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날 북한대학원대학교 행사에서 이같이 말하고 "북한이 약속을 지키면 우리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지난 달 8일 '북미 싱가포르 회동'의 양해 사항을 바탕으로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하는 시점에 맞춰 미국도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명확한 약속이다.
미 행정부가 특정 국가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려면 해제 45일 전에 의회에 통보해야 하며 적성국 교역법은 의회 통보 의무가 없다. 유명환 장관은 인터뷰에서 "미 행정부가 의회에 명단 삭제 방침을 통보하는 날부터 사실상 해제의 효력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유 장관은 또 6자회담 다음 단계인 핵폐기 논의가 잘 될 경우 "비핵화 문제를 포함한 여러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6자회담 틀내에서 평양과 워싱턴에 양측의 상주사무소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은 북미간의 최근 협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비록 비핵화 협의가 표면상의 목적이지만 평양과 워싱턴에 상주사무소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양국관계의 정상화에 적잖은 의미를 담을 것으로 보인다.
버시바우 대사는 또 "우리(미국)는 북한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북한과 지원품의 분배에 대한 모니터링 방안에 합의하면 인도적 지원 절차를 시작할 것임을 내비쳤다. 미국은 현재 북한에 쌀 50만 톤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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