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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은 '반칙'이다"

[민들레 교육 칼럼] 반칙을 부추기는 사회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참고서와 학원

칠팔십 년대 대표적인 초중고 참고서 두 가지를 꼽는다면 <표준전과>와 <필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표준'과 '필승'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 주도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국가 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계도 사람도 대체가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표준화가 지향하는 바다. 이러한 대체가능성은 학교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학기 중에 교사가 바뀌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참고서는 사실상 교사용 지도서 역할도 해서, 많은 선생님들이 참고서를 참고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과는 전 과목을 한 권에 다 담아 부피가 상당했는데, 이 한 권만 있으면 시험 걱정을 덜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교사들이 전과에서 시험문제를 뽑거나 비슷한 문제를 냈다. 하지만 두꺼운 전과 한 권 값이 만만찮아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사기가 어려웠다. 중·고등 참고서는 과목별로 나뉘어 있어 다 구입하자면 꽤 부담스러워 대개는 국·영·수 정도만 사거나 취약한 과목 위주로 구입했다. 학원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참고서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셈이다.

<수학의 정석>과 <핵심 영어>는 차원이 다른 참고서들이었다. 교과서 수준을 뛰어넘는 고급 과정의 학습서였다. 사실상 대학 본고사를 위한 참고서들이었는데,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그 가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에게는 필수 참고서들이었다. '정석'과 '핵심'은 학원에서도 인기 강좌 아이템이었다. 몇 개 되지 않던 대도시 학원들에서는 이 참고서를 교과서 삼아 인기 강사들이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또 개인과외를 하는 대학생들도 이 책을 교재로 그동안 투자한 걸 밑천 삼아 학비를 벌었다.

학원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면서 점점 일반 참고서들이 하던 역할을 학원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참고서를 사놓고도 거의 보지 않던 학생들이 학원 강사의 족집게 강의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내신 성적을 보장하는 것이 학원의 역할처럼 되면서 학생들은 학원 도움 없이는 시험 준비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신 성적을 위한 시험 준비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위해서는 한 달 남짓만 준비시키면 되므로 학원 입장에서는 나머지 기간 동안 아이들을 끌어들일 상품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다름 아닌 선행교육이다. 다음 학기에 배울거리를 방학 때 미리 떼 주던 수준에서 나아가 일 년, 이 년 앞당겨 교육하는 풍조가 학원들 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학원이 공급 초과 현상을 보이자 차별화된 상품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일종의 고급화 마케팅 전략으로 심지어 11년 짜리 선행학습 영어 상품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아이들은 '선행'하면, 선행(善行)보다 선행(先行)학습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참고서를 구입하는 데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 이들에게 참고서는 아주 기본 장비에 속한다. 또 골목까지 학원이 들어서면서부터는 학원도 기본 장비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고급 장비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시장은 이를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선행학습도 기본 장비가 되다시피 했으니, 다음에 등장할 고급 장비는 과연 무엇일까? 시장의 상상력과 기획력이 자못 기대되는 시점이다.

참고서나 보습학원 같은 보조 기구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빼앗는다. '원숭이 꽃신' 이야기처럼 신발에 길든 연약한 발바닥 때문에 신발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된 원숭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꽃신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산업화 시대가 저물면서 교과서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참고서가 왜 필요한가라는 물음을 던질 만도 하건만, 설상가상으로 새롭게 쏟아지는 교육 상품들의 홍수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교과서와 참고서, 다시 말해 국가와 시장이 손을 잡고 표준화와 경쟁시스템을 통해 체제 순응형 인간을 양성해온 셈이다. 진도와 시험에 맞춰 학습계획을 짜고, 국가와 시장이 원하는 인간으로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매진하도록 몰아왔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표준전과>만도 못한 표준화된 교사들을 국가가 길러 냈다면, 권력이 점차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교사와 교수들은 스스로 지식을 파는 상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와 학원이 상보관계에 있듯이 국가와 시장 역시 상보관계에 있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지만, 아이들이 학교보다 학원에 더 의지하기 시작했듯이, 이제는 시장이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더 갖기에 이르렀다.

반칙을 용인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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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 84호 ⓒ민들레
인간 사회는 불평등한 사회다. 동물의 왕국도 불평등하지만, 그 불평등은 대개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인간 사회는 사유재산 제도가 확립되면서 유전적 요인에 더해 제도적으로도 불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유전적 불평등은 종족 번식과 진화를 위해 자연이 하는 일이니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미남미녀에게 세금을 더 물리자는 얘기도 있지만, 유전적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권투 경기에서 체급별로 시합을 하게 하듯이 유전적 불평등을 감안한 사회제도를 만들 수는 있다. 더욱이 사유재산의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평등이므로 제도적으로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권투 경기 수준의 보완책도 갖추지 못한 사회가 아직 대다수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한 제도이지만 이를 도입한 사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유전적인 불평등에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까지 더해지면서 인간 세상은 사실상 반칙을 용인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칙의 정도가 심한 사회일수록 후진 사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헤비급 선수와 플라이급 선수가 한 링에서 맞붙도록 방치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이급 선수더러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헤비급 선수는 보호 장비까지 갖추고 있는 마당에. 많은 플라이급 선수들이 아예 링에서 퇴장해버리는 것도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재미없는 경기다.

인간 세상에서 그나마 반칙이 용인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스포츠 세계일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감각이 내재해 있어 반칙에 대한 반감은 세계 공통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이 반칙을 눈감고 넘어갈 때 관중의 야유를 피하기 어렵다. 유일하게 반칙이 용인되는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의 세계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 스포츠라기보다 쇼에 가깝다. 프로레슬링에서 반칙은 의외성을 낳아 경기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반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의외성 때문이다. 더욱이 약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행하는 반칙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공부를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가 살짝 커닝을 하는 것처럼.

불평등한 관계에서 약자의 반칙은 어느 정도 용인되기도 한다. 불합리한 규칙에 반발하여 이를 어기는 행위는 실정법상에서는 반칙이지만 자연법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일 수 있다. 홍길동이나 로빈후드 같은 반칙왕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것은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반칙이 판치는 세상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역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는 강자가 공공연히 반칙을 하는 것이 다반사이고, 심판도 강자 편을 들기 일쑤여서, 약자의 통쾌한 반격은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현실에서는 얻어맞다 링 밖으로 퇴장하는 것이 대부분의 약자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이 불공평한 게임을 보완하는 장치가 교육제도인 것 같지만, 실제로 교육판의 룰도 불공평하기는 매일반이다. 격변하는 사회에서는 교육이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수록 교육은 계급재생산의 확실한 통로가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해주기보다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교육 현장은 오히려 일찍부터 반칙에 대한 무감각을 훈련하는 곳이 되다시피 했다. 그 옛날 전과에서 시험문제를 내던 교사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세상은 전과를 살 수 있는 아이와 살 수 없는 아이로 나뉘어 있고, 게임 규칙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70년대만 해도 담임선생이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개인 과외를 하는 일이 흔했다. 반칙행위가 반칙인 줄도 모른 채 다들 순진한 얼굴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선행학습이 사실상 반칙행위라는 사실을 아이들도 부모도 교사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너도나도 하기에 안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아이들에게 정정당당함을 가르쳐도 아쉬운 마당에, 뻔뻔함과 비겁함을 길러주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 현실이다. 아이들 힘으로 할 수 없는 숙제를 내고 그걸 검사하는 교사는 사실상 반칙을 조장하는 셈이다.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아이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고, 엄마 도움으로 숙제를 하고는 자기가 한 양 시치미를 떼는 아이에게는 비겁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인터넷 서핑으로 자료를 긁어다 짜깁기하는 숙제를 내는 교사도 마찬가지다. 정보 검색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검색하는 능력이 사고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남이 애써 정리한 자료를 도용하는 뻔뻔함을 길러줄 따름이다.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고 보자는 심리가 팽배한 사회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피로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경쟁이 경쟁력을 보장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서서 보기 시작하면 뒷줄에 앉은 사람들도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 쓸데없이 모두가 피곤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따름이다. 선행학습 붐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다.

감각이 무디어질 대로 무뎌진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룰에 심판은 강자 편을 드는 게 다반사이지만, 반칙이 반칙인 줄도 모를 정도로 도덕성이 무딘 사회는 드물다. 반칙을 공공연히 용인하고, 반칙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당당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참으로 '후진' 사회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를 위해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양성해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운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봉오리도 맺지 못한 채 시들어갔다. 그나마 그렇게 표준화된 인적자원을 양성하여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키웠고 생활의 질은 높아졌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더 떨어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국가경쟁력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쫓아가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따라와야 한다. 국가 차원의 교육정책에서 국가경쟁력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과연 무엇이 국가경쟁력을 높여주는지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수만 명을 먹여 살릴 1퍼센트를 길러내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이 저마다 자기다움을 꽃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것이 국가 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어야 마땅하다. 공동체성이 결여된 1퍼센트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란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이기 이전에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회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약자를 밟고 올라서는 사회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또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의 선의와 배려를 기대하기보다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추진 중인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법률' 같은 것이 제정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가진 자의 자유, 자본의 자유가 국가에 의해 견제되면서 평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한다.

공생 사회가 지속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적자생존이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법칙이고 경쟁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는 세상의 일면만 본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적자생존 논리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진화론의 본질은 '최적자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st)'가 아니라 '적자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r)'는 것이다. 최적자 1등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조금 더' 적합한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1등 외에는 모두 도태된다는 최적자 생존 이론은 실제 자연계에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공생 관계를 많이 맺는 생물일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생태계의 속성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배타적인 듯하지만, 두 가치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사회의 지속가능성도 높아진다. 해방 후 남한 사회가 자유를 기치로 삼았다면 북한은 평등을 기치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의 본질은 이 두 가치를 융합시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경쟁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한 이 과제는 달성할 수 없는 꿈으로 남을 것이다. 설령 물리적인 통일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사회의 분열은 가속될 것이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꼭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 심화되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약자들의 역반칙이 빈발할 수밖에 없다. 반칙 없는 세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조금 더 공평한 세상은 우리 힘으로 만들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룰 때 사회도 평화로울 수 있다. 물론 평화롭기만 한 사회가 반드시 좋은 사회인 것은 아니다. 갈등을 지혜롭게 조정하는 가운데 성숙하고,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기다움을 꽃피우기 위해 정진하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가 꾸는 꿈이라면, 교육 현장은 그 꿈의 보이지 않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 위의 글은 <민들레>84호 "교육, 시장에서 길을 잃다"에 실린 글입니다. (☞ <민들레>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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