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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애환 서린 간도에도 봄이 오건만 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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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애환 서린 간도에도 봄이 오건만 북에는…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12>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여덟째 날 오전] 두만강 하류 : 옌지(延吉)→투먼(圖們)→훈춘(琿春)→팡촨(防川)

조선인의 간도 이주역사

이번 우리 답사단의 마지막 기착지인 옌지(延吉)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이지만, 원래 간도(間島)의 중심이었다. 간도는 바다나 강 가운데 있는 섬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만주 내륙의 두만강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土門江) 사이의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숙종 38년(1712년), 조·청간 합의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에 두 나라는 서쪽으로는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을 국경으로 삼는다고 적혀 있다.

이후 두만강 건너편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라 했지만, 대체로 북간도를 간도라고 했다. 간도는 옌지(延吉), 허룽(和龍), 룽징(龍井), 북한과 접경한 투먼(圖們), 러시아와 접경한 훈춘, 그리고 이번 우리 여정에는 포함되지 않은 둔화(敦化) 안투(安圖) 왕칭(汪淸) 등을 묶어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이 중에서 우리는 내일 투먼, 훈춘, 팡촨(防川)에서 두만강 건너 북한 지역을 보고, 북·중관계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 북한의 최근 움직임에 대한 소식을 듣기로 했다.

옌볜, 간도가 지금은 북·중 접경지역이 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사실상 우리민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의 간도 이주 역사를 간단하게 살피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1779년 프랑스의 P. 산티니가 제작한 고지도. 사진의 적색 테두리까지 한국의 영토로 규정하여 간도를 한국 영토로 포함시켰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가 박물관 규정에 따라 1990년 경매로 나온 것을 프랭크라는 이름의 호주 고지도 전문수집가가 구입했다. ⓒ뉴시스
우리 민족의 간도 이주 역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아편전쟁(1842)에서 영국에 패배한 청나라가 서양 제국주의 열강(列强)의 먹잇감이 되면서 대내통치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청나라 건국 이후 철저하게 지켜져 왔던 봉금령(封禁令: 청나라의 발원지인 만주지역에 대한 이민족의 출입을 금지한 조치)이 잘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도 청나라의 봉금령을 존중하여 조선인들의 도강월경(渡江越境)을 금지해 왔었지만, 1869∼1870년 연거푸 흉년이 들면서 먹을 것과 농토를 찾아 강을 건너 간도 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백성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조선 사람들의 간도 이주 정착이 상당히 진척된 이후인 1883년, 청나라 조정이 조선인의 간도 철수를 요구해왔다. 이때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숙종 때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토문(土門)이 어디를 가리키는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조선은 정계비에 쓰여진 토문(土門)은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土門江)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토문(土門; 중국어로는 투먼)은 투먼(圖們)이며 그것은 곧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국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억지라는 것은 중국어 발음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土門과 圖們은 중국어에서 똑같이 '투먼'으로 발음한다고 하지만, 두만(豆滿)은 '떠우만'으로 발음한다. 圖們을 豆滿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경계선에 대한 엄청난 해석 차이 때문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가는 것을 막을 힘은 청나라에도, 조선에도 없었다. 이러는 와중에 조선인들의 간도 거주는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간도 귀속' 문제 발생 경위

청나라가 1885년에 북간도 남부를 조선족개간구역(朝鮮族開墾區域)으로 정한 후, 북간도는 다시 청·러·일 세 나라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겁박하여 '을사협약'을 체결하고 옌지에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다. 명분은 조선의 외교권을 위임받은 일본이 북간도 거주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들의 활동을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항해서 청나라도 국자가(局子街)에 길림변무공서(吉林辺務公署)를 설치했다. 이렇게 간도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던 일본과 청나라는 1909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결정하는 '간도협약(間島協約)'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뒷날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건설의 기반이 된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따내기 위해 조·청간의 문제였던 간도의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겨버린 것이었다.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협약'을 근거로 일본이 청나라에 간도를 넘겼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간도 귀속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간도 귀속 문제는 "강박에 의한 조약의 효력은 무효"라는 국제법 이론에 비추어, '을사협약' 자체가 무효이고 무효인 '을사협약'을 근거로 한 청·일간 '간도협약'도 당연히 무효라는 것이다.

조선조 말 먹고살기 위해서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간도는, 이런 이유로 일제시대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의 이주지역이 되었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역할을 했다. 1919년 경성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간도지역에서도 3월 13일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에는 항일 무장투쟁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의 봉오동전투, 김좌진(金佐鎭)장군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그리고 훈춘사건(琿春事件) 등이 모두 옌볜을 거점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간도에 조선인 중심으로 '간도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이 물러간 중국의 지배권을 놓고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간에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벌어졌다. 국민당이 연길에 '중국국민당 길림성 연길판사처(延吉辦事處)'를 설치하자, 공산당도 '연변 행정독찰전원 공서(行政督察專員 公署)'를 설치했다. 이 와중에서 간도임시정부는 중립노선을 취했다.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마감되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자 옌볜에서는 중국공산당 연변위원회(延辺委員會)가 간도임시정부를 접수했다. 이 위원회는 연길, 훈춘, 화룡, 왕청 그리고 안도 등 5개 현을 관할했고, 간도시를 옌지시로 개명하여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다. 200만에 이르던 조선인 수가 1945~46년 사이 100만 명 수준으로 감소되었는데, 이는 100만 명 정도가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간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족자치주인 옌볜지역은 이미 조선조 말부터 사실상 조선인들의 거주지였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인들의 항일운동 거점이었기 때문에 '조선'(일제시대까지는 한국이라는 국명이 없었음)이 기득권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북한 정권 수립 후, 김일성, 최현, 최용건 등 북측 지도부는 중국과의 면담 때마다 일본이 청나라에 넘긴 '간도'지역을 다시 돌려 달라고 중국에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역사 때문에 '간도'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흰 저고리를 입고 멋쩍은 미소를 머금은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가난을 피해 이국땅에서 고생하던 우리 선조들의 애환에 가슴이 시려온다. 또한 같은 흑백사진이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꼭 다문 입매의 결의에 찬 우리네 독립투사들의 모습에서는 뜨거운 조국애가 느껴지면서 힘이 불끈 솟는다.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역사와 중국 내 위상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지구 자치에 관한 정령'을 제정하여 50개가 넘는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에 자치적인 행정단위를 설치했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옌볜지역에는 조선족자치구(自治區)가 설치되었다. 자치구(區)가 가장 윗급이고 그다음이 자치주(州), 자치현(縣), 자치향(鄕), 자치진(鎭)의 순서라고 한다. 지역 전체인구 중 소수민족의 비율에 따라 '자치' 타이틀이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자치'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상상하면 안 된다. 중국에서 자치라는 말이 붙는 곳에서는 상점 간판이나 문서 등에 소수민족의 언어를 공용어로 쓸 수 있고, 행정책임자를 소수민족 출신이 맡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1952년 9월 3일 옌지에 대표자들이 모여 옌볜조선족자치구(延辺朝鮮族自治區)를 창립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1954년 새 헌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옌볜조선족자치구(自治區)를 한 단계 낮은 자치주(自治州)로 바꾸고 국무원의 승인을 받아 1955년 4월 이를 공표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2월 옌지에서 개최된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회의'가 자치주(自治州)를 선포하고 주장(州長)에 조선족인 주덕해(朱德海)를 선출했다.

1952년 옌볜의 조선족 인구는 자치주 총인구의 74%였고, 조선족 간부는 총 간부 수의 78%를 차지했다. 그런데 1962년에는 조선족 수가 50.04%로, 조선족 간부 수는 64%로 떨어졌다. 문화혁명으로 옌볜의 사정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1971년에는 많은 조선족 간부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조선족 간부의 비율이 크게 줄었다. 이후 사정은 점차 개선되어 1992년까지 지역 행정 수반인 주장(州長)은 물론 공공기관 간부 40% 이상이 조선족이었다.

자치주로 성립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자치주의 민족언어라고 한다. 옌볜이 중국 일부이기 때문에 중국어를 국어로 삼지만, 옌볜에서는 중국어 대신 조선말(한국어)이 공용어이다. 예컨대 옌볜의 조선족들은 1953년부터 종래 한자(漢字)를 섞어 쓰던 것을 취소하고, 대신 공공단체의 간판에서 조그만 간판이나 상표에 이르기까지 한글과 중국어 두 문자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동북3성의 조선족이 정체성 위기를 맞고 있다. 중국 전체에서 조선족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조선족자치주에 한족을 이주시켜 상대적으로 조선족 비율을 낮추고 있는 중국 당국의 정책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중수교 이후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취업을 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기업들이 진출한 중국 내 타 지역으로 일하러 나가고 있어 옌볜의 조선족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선조 말부터 간도에 거주해온 조선족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라고 한다. 자치구였던 옌볜이 자치주로 격하되었는데 다시 자치현으로 격하되는 일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훈춘의 위상이 느껴졌던 커우안(口岸)

얼다오바이허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옌지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특별한 행사 없이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는 훈춘으로 향했다. 훈춘으로 가는 도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 다른 지역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웅장한 커우안(口岸) 앞에 내렸다. 커우안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국경도시 중에서 훈춘의 위상이 그만큼 높고 역할도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중간의 관문인 커우안은 사람과 차가 다니는 다리 초입에 세워져 있었고, 대개의 경우 노란 선이 그어진 다리 중간 지점까지 걸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 훈춘 커우안 ⓒ황재옥

그런데 오늘은 훈춘 커우안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공안들의 경비도 삼엄했다. 늘 그래 왔듯이 어제까지도 다리 출입이 허용되었는데, 오늘 갑자기 문을 닫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출입통제는 아마도 북한 쪽에서 요청한 것 같다는 설명도 있었다. 웬일인지 궁금했지만, 더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커다란 관광버스에서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이 커다란 봇짐을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중국에서 훈춘 해관을 통과하여 러시아로 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커우안 주변 상점에는 중국 상품과 러시아 인형들이 매대에 놓여 있었다.

옌볜조선족자치주 소속인 훈춘지역은 20여 년 전부터 인구 100만 규모의 공업도시로 육성되어 왔으나, 북한 나선(나진·선봉)의 개발이 늦어지면서 덩달아 개발이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나선의 개발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전기, 수도, 도로와 같은 인프라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라고 한다. 또한 러시아, 중국, 북한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개발이 늦어지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중국의 훈춘은 북한의 나선과 연계되어 개발되고 있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중국은 동북3성의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 주도하에 나선지역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고 한다. 일차적으로 중국은 북한과 연결되는 도로건설에 중점을 두고 있다. 훈춘 관내에 있는 췐허(圈河)의 강 건넛마을 원정에서 나선까지 72km 구(舊)도로를 52.9km로 직선화하였다. 두만강 접경지역의 중국 도시들은 압록강 접경지역 도시들보다 더 활기차고 역동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두만강 하류에 이르자 북한 중국과 더불어 러시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 훈춘 개발을 알리는 간판 ⓒ황재옥

중국의 아픔이 배어있는 팡촨(防川)의 토자비

훈춘 커우안을 뒤로 하고 러시아‧중국‧북한 3국이 맞닿아 있는 팡촨(防川)으로 향했다. 훈춘에서 팡촨 가는 중간에 있는 췐허(圈河) 커우안도 훈춘의 커우안처럼 초입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췐허(圈河)를 거쳐 중·러 국경도시 팡촨(防川)까지 가는 도로도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길은 훤하게 뚫려 있었으나 교통량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한적할 정도였다. 앞으로를 내다보고 만들어 놓았으니 현재는 한가할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였다.

훈춘에서부터 내리던 비는 팡촨에서 더 굵어졌다. 비오는 날임에도 관광버스들이 제법 많았다. 3국의 경계선이 맞닿아 있다는 점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필자인 나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전망대에 오르니 거기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 퐝촨 전망대 ⓒ황재옥

정방형의 옥상 4면 중 3면에 각각 '日本海(일본해)' '朝鮮(조선)' '俄罗斯(아라사)'라는 명판이 붙어 있었다. '아라사'(러시아)라고 쓰여 있는 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봐도 중국이나 북한과는 다른 형태의 서양식 건물들이 넓은 들판에 듬성듬성 서 있었다. 들판 너머 저 멀리에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고 한다. '일본해'라고 쓰여 있는 쪽을 보니 동해로 흘러들어 가는 두만강 하구가 보였다. 그리고 '조선'이라고 쓰여 있는 쪽을 바라보니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멀찌감치 북한의 산들이 보였다.

▲ 토자비 ⓒ황재옥
우리뿐만 아니라 전망대에 올라와 있는 중국 관광객들은 비가 오는데도 내려갈 생각들을 안 하고, 망원경으로 열심히 이 방향 저 방향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망대를 내려오니 비가 그쳤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동해 쪽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선임을 표시하는 토자비(土字碑)가 서 있었다. 토자비에 광서(光緖) 12년 4월에 이 비가 세워졌다고 쓰여 있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청나라가 망한 후 훗날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된)의 연호(年號)가 광서이고, 광서 12년은 1886년이다. 1886년은 러시아의 동방진출 정책이 한창 전개되던 시점으로, 청나라를 만만하게 본 러시아가 영토문제를 일으키던 때였다. 팡촨의 토자비는 이런 상황에서 결정된 중⁃러 국경선을 알리는 비석이었다. 국운이 쇠잔해가던 중국의 아픔이 배어있는 국경 표지석이었다. 오전 일정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약속된 점심장소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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