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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굴욕… 美 경기침체 원흉으로 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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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굴욕… 美 경기침체 원흉으로 전락

"서브프라임 위기'는 '그린스펀이 만든 위기'

미국의 경제가 연착륙이 가능한 경기둔화(slowdown)를 지나 이미 경착륙이 불가피한 경기침체(recession)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온 가운데, 미국 역사상 최고의 중앙은행장(1987~2005년)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그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관련 기사:미금리 대폭인하는 '그린스펀의 음모' ? - 美기업.금융기관 파산 막기 위한 고육지책)

미국 경제 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늪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가 그린스펀의 재임 기간 중 잉태됐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은 지난 2000~2005년 저금리 기조를 지나치게 오래 유지하면서 부동산 거품을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지속적인 금리 인하 끝에 지난 2003년 6월 연방기준금리를 45년래 가장 낮은 1%까지 내린 뒤 이를 1년간이나 유지했다.
▲ '세계의 경제대통령'으로 군림했던 그린스펀. 하지만 그가 FRB 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미국의 경제위기를 후대에 떠넘겼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블룸버그 "붕괴를 기다리는 다음 거품은 그린스펀의 명성"

미국 월가의 대표적인 금융매체 <블룸버그>는 10일(현지시간) "붕괴를 기다리는 다음 거품은 그린스펀의 명성"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미국 금융투기의 역사를 천착해온 베스트셀러 작가 에드워즈 챈슬러도 "그린스펀은 가계소득 증가 덕분에 거품이 잔뜩 낀 명성을 얻었지만, 가계 소득이 줄어드면 슈퍼스타의 위상도 흔들릴 것"이라고 거들었다.

과거 그린스펀에 후한 평점을 매겼던 학자들마저 이제는 평점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FRB 부의장 출신으로 프린스턴대학 교수인 앨런 블린더, 카네기 멜론 대학의 앨런 멜처 교수, FRB 관료 출신으로 브랜다이스 대학 교수로 있는 스티븐 세체티 등도 그린스펀이 금리를 너무 오랫동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해 주택 시장 거품을 조장한 건 맞다고 시인했다.

이에 앞서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통제되지 않는 금융 세계화에 지속적으로 경고해온 스티글리츠 콜롬비아대 교수는 지난해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의 원인을 조성한 그린스펀의 2가지 실책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미국의 가계소득 증가는 자산 거품에 기댄 부채였으며, 금융당국은 이를 방치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린스펀은 부시 행정부의 세금감면을 지지했으며, 저금리 기조로 과잉유동성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버냉키, 1월말 큰 폭의 금리 인하 강력 시사

그린스펀의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공식적인 경기침체 기간이었던 2001년(3~11월) 이후 당시의 경기 부양을 위해 문제를 미래로 떠넘기는 무리수를 둔 것이며, 현재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통화정책으로 경기를 조절하는 것은 이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3~3.5%인데 2008년 경제성장률이 1.5%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면서 마이너스 성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착륙이나 마찬가지라며 경기침체 가능성을 기정사실화했다. 차라리 성장률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경기침체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가 더 중요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월가의 주요은행인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 모간스탠리는 잇따라 미국 경제가 이미 경기침체 국면에 진입한 상태라는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관련 기사:골드만삭스 "올해 美 경제성장률 0.8%" )

투자은행의 최강자로 불리는 골드만삭스는 9일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이 0.8%에 불과할 것"이라면서 지난해 9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1%에 달하는 금리 인하에 이어 현행 4.25%인 기준금리가 1월말 3.75%, 나아가 3.4분기까지 2.5%까지 대폭 내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린스펀에 이어 2005년 10월에 FRB 의장에 취임한 벤 버냉키는 초기에는 저금리로 인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추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부실사태로 인해 경기하강 조짐이 뚜렷해지자 급한 불부터 끌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었다.

FRB는 지난달 11일 0.25% 포인트라는 통상적인 수준의 금리 인하 조치를 취하자, 뉴욕증시는 2%가 넘는 폭락사태로 반응했다. 미지근한 조치로 수습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급기야 버냉키 의장은 10일 통상적인 금리 조정 수준의 두 배인 0.5% 포인트 추가 금리 인하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버냉키 의장의 이날 발언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경제 성장을 지탱하고, 경기가 하강할 위험에 적절한 보험을 제공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대응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FRB가 경제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는 모호한 표현을 넘어 '경기둔화'와 '인플레이션' 중 어느 한 쪽 방향으로 리스크가 쏠려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버냉키의 발언은 해석할 필요도 없다"면서 0.25% 포인트이냐 0.5% 포인트이냐로 갈렸던 금리 인하 폭을 둘러썬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너무 솔직한' 버냉키 "이코노미스들은 경기침체가 지나야 확인"

오히려 버냉키가 너무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은 오히려 경기 전망에 대해 당황한 모습을 보여 시장의 심리를 동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모호한 발언'으로 시장을 차분하게 이끌었던 그린스펀의 세련미에 훨씬 못 미치는 다급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너무 늦은 얘기"라는 냉소마저 나오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버냉키 의장의 발언은 이달말 FRB의 금리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금리를 0.5% 포인트 추가 인하할 것을 확실하게 해준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뉴욕증시는 1%도 못 미치는 반등세를 보였을 뿐이다.

월가 일각에서는 버냉키의 발언에 대해 FRB가 사실상 경기침체 국면임을 시인하고 이 기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본격적인 통화완화정책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로 버냉키는 이날 연설에서는 "FRB가 현재 경기침체가 아니라 경기둔화를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연설 후 가진 질의응답에서 "경기침체가 언제 일어날지를 예측하는것은 어려운 일이며, 이코노미스트들은 경기침체가 지나간 후에야 침체를 확인하곤 한다"고 솔직한 답변을 했다.

그린스펀 "해외의 과잉 저축이 미국 자산 거품 초래" 반박

그린스펀은 후임자인 버냉키를 이처럼 시련에 빠뜨린 장본인이라는 비난에 잠자코 있지는 않았다. 저금리 정책 때문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들에 과도하게 쌓인 저축이 미국에 흘러들어와 자산 거품이 형성됐다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통화 정책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항변이다. 하지만 그린스펀의 명성에 걸맞는 해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린스펀은 이번 위기가 자신의 재임 때보다 대처하기 어렵다는 점을 '디스인플레이션'의 관점에서 지적하기도 했다. 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하락에 따른 경기 위축을 의미하는 디스플레이션에 빠지는 부작용 없이 어느 정도 물가 수준을 유지하면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정책이 가능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린스펀이 이런 정책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값싼 제품을 쏟아내는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등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꾸로 중국이 과열경제로 인플레이션을 선진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진원지가 되고 있다.

그린스펀은 지난해말 미 <ABC> 방송에 출연해 "디스인플레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미국의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 고물가)의 초기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버냉키가 이끄는 FRB가 이번 위기를 잘 수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큰 것도 이때문이다.

나아가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번 위기가 금융 세계화가 본격화된 시대에 선진국발 위기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20세기 말 개발도상국들을 휩쓴 금융위기는 단순하고 치유도 비교적 손쉬운 편이지만, 선진국발 위기는 사전에 대처하기도 어렵고, 처방도 어렵고, 충격의 범위도 휠씬 넓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부실 덩어리가 세계화 물결을 타고 도처에 팔렸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그린스펀이 만든 위기'이며 최악의 상황에서 미국을 넘어 전세계에 먹구름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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