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선고와 파산선고
어쩌면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민주화운동은 연이은 사망선고에 이어 마침내 이번 대선으로 확실한 사망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른바 진보정당 문 앞에는 명백한 파산선고장이 날아들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이제 없다. 민주화 20년, 민주정부 10년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사회정의가 확립될 수 있다는 벅찬 희망의 시기로 출발해 극단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된 참담한 절망의 시기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창당과 합당, 해산을 기록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이른바 온건민주개혁 정치세력은 이제 낡은 수구세력으로 전락, 소멸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2004년 총선에서 13%의 지지율로 10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했던 민주노동당 또한 3%의 지지율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내 권력을 장악한 이른바 종북주의 자주파 비판과 청산, 배제 논의가 뜨거운 주제로 수면 위로 급부상하였다. 민노당은 그야말로 존폐의 갈림길에서 전면 쇄신을 통한 재출범이냐 아니면 이들을 제외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냐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시민사회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 또한 명백히 의미있는 대안의 사회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되는 데 실패했다. 2000년 총선 당시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의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면서 총선에 미친 놀라운 결과를 생각하면 이번 대선 국면에서는 과연 시민사회운동 세력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전국 351개 시민사회단체가 만든 2007대선시민연대나, 그렇게 비판했던 기존 정당의 이합집산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어지럽게 이름이 바뀐 '미래구상'의 활동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시민사회운동이 추구했던 의제와 가치, 영향력은 거의 실종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경부대운하 공약에 대해 강한 문제 제기와 심층 분석을 통해 그 허구성과 위험성을 널리 알린 환경연합 등 환경운동 단체의 활동 정도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노동운동은 아예 뒤죽박죽 잡탕의 정치활동 쇼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암담한 퇴행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군사독재 시절 중앙정보부가 만들고 중앙정보부가 길러낸 관변단체로서 커왔던 한국노총의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이야 원래의 뿌리로 되돌아간 회귀의 행태로 그렇다고 칠 수도 있다. 이미 비정규직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받아 온 민주노총은 계급투표 추진을 통한 민노당 '배타적 지지'를 천명하긴 했지만 과연 민주노총이 민노당 후보의 득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의문이 제기되면서 오히려 감표요인이었다는 회의의 평가가 강하게 등장할 만큼 초라한 정치 지도력을 노정했을 뿐이다.
신박정희 체제의 승리
한마디로 이번 대선은 신박정희 체제가 낡은 87년 체제에 거둔 완벽한 승리였다. 낡은 수구민주개혁, 낡은 수구진보, 거기다 낡은 수구보수까지 신보수를 표방하는 세력에게 무참하게 패배하고 쓰레기통으로 처박힌 선거였다.
일부에서 이명박 후보의 승리라기보다 노무현 정권의 패배, 개혁진보세력의 패배라고 규정하며 패배라는 데 강조점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정부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과감하게 혁파하고 사회정의가 확립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어떠한 미래사회 대안도, 대안의 초안조차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른바 진보진영과 시민사회운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시민사회운동은 막연한 신자유주의 반대의 구호만 길거리에서 열심히 외쳤을 뿐이다.
개혁과 진보를 부르짖는 모든 세력은 100만 명의 청년실업자, 260만에 이르는 신용불량자, 850만 명으로 늘어난 비정규 노동자, 이태백, 삼태백, 장미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더욱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일반 인민들의 삶에 대해 어떠한 애정도 어떠한 현실의 희망도 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집단으로 낙인 찍혀졌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오직 박정희식 경제성장만이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은 지금 근본에서부터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재출발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파산을 파산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결단코 시민사회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의 미래는 없다. 일반 대중들은 이미 명확하게 평결을 내렸는데도 판결문을 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붕괴 일보 직전의 삼풍백화점 안에서 실내장식과 간판만 바꾸어 달고는 요란하게 신장개업하겠다면 그 뒤에 일어날 사태는 눈에 훤하다. 지금은 붕괴를 붕괴로 인정하고 폐허 위에서 다시 새로운 집을 짓는 결단과 당연한 의지가 필요한 때이다.
그럼에도 왜 이번 대선을 평가하는 수많은 논의 가운데 시민사회운동이 한계에 부딪혔다거나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실패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1987년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민주화세력이 왜 결국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만 것일까. 왜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은 민주화 이후 더 악화된 불평등 사회, 부익부 빈익빈의 극단에 가까운 양극화 사회를 만들고 말았을까. 왜 부국강병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시장전체주의 아래 거대 국가와 거대 재벌,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무력한 개인들의 사막사회를 만들고야 말았을까.
우리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민사회운동과 이른바 개혁진보정당 운동은 대선의 의미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 한국사회를 근본에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로 바꾸기 위해서 도대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천착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해 왔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단순한 부정과 배제의 종북주의 논란에서 벗어나 긍정과 연대의 의미있는 행동, 의미있는 현실주의의 시각으로 사회와 국가,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의 재구성을 기획할 수 있다.
적녹청 동맹의 정당정치운동이 지금 가장 실현가능한 정치운동이다
위기는 기회이다. 오히려 거꾸로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나름의 문화 토양을 밑거름으로 자본주의 극복의 새로운 미래 기획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최적의 호기일런지도 모른다. 적녹청 동맹의 새로운 정당정치운동이 시민사회운동, 풀뿌리 공동체 형성 운동과 3자 정립의 운동으로 출발할 수 있다면 호혜와 평등, 상호부조,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 사회는 실현가능한 현실로 바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올 수도 있다.
노동운동은 노동이 착취-피착취의 이윤극대화의 도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단순한 임금협상, 단체협약 투쟁 위주에서 벗어나 노동조건 개선 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의 우애공동체를 형성하는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농민운동은 수입개방 반대, 한미FTA 반대를 넘어서서 저항과 함께 다가오는 에너지-식량위기를 준비하는 지역 자립과 자치의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풀뿌리 기초공동체를 지향하는 적색과 녹색의 동맹은, 지속가능한 미래사회를 열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 또한 국가형 시민사회운동에서 벗어나 새롭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시각 확립과 함께 공동체 형성 시민사회운동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회원-활동가라는 이원구조의 시민사회운동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엘리트주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푸른색의 시민사회운동이 직접 민주주의와 직접 행동의 녹색 공동체 가치와 함께 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적녹청 공히 그동안의 정당정치에 대한 막연한 불신감과 함께 현실의 정당정치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과 공식 지지관계를 맺고 있으나 이마저도 이번 대선에서 드러나듯이 민주노총 전 조합원의 지지와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기껏해야 상층 연대, 정책연대 정도에 그치고 정당정치 활동은 적녹청 공히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져 있는 상태이다.
이제 그런 애매한 관계 설정이나 정당에 대한 불가근 불가원 식의 불투명한 대응에서 벗어나 풀뿌리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 직접행동과 연결되고 이를 근거지로 한 정당정치운동으로의 전환과 분별 정립을 적녹청 운동 모두 처음부터 직접 모색해야 한다. 정당정치와 지역정치를 활성화시켜야만 지금의 패거리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으며 노동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사회운동, 지역자립자치 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과 염원을 대변하는 노동조합 공동체와 정당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청년실업자와 수많은 무주택자들의 간절한 희망을 실현하는 정당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에너지와 식량만이라도 자립하는 지혜의 정당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전망과 의지이다. 시민사회운동과 정당정치운동의 방향 전환과 풀뿌리 공동체에 시각을 맞춘 전망의 확고함 여부가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의 낡은 의식과 뿌리 깊은 서구 근대에의 의존이다. 지난 시기 서구화, 산업화, 근대화가 지고지선의 가치였던 시기에 뼛속 깊이 체질화된 서구모델 모방과 추종의 노예의식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에까지 미쳐 그저 우선 먼저 서구 이론과 서구 국가의 현황부터 찾아보게 되는 뿌리깊은 노예의식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식민지 노예의식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도 가야만 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스스로 자립과 자치의 발걸음을 옮겨 곧바로 실천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지속가능한 사회를,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다시 재기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적녹청 동맹의 새로운 정당정치운동과 새로운 공동체운동,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이다.
이 글은 우리 사회가 물신교 사회에서 새로운 '인간의 사회'로 어떻게 전환해 갈 수 있는지 모색해보는 하나의 어설픈 시론이다. 우리 사회의 진지한 변화를 성찰하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하고도 수많은 견해와 주장들이 있다. 더 넓고도 날카로운 논의와 논쟁이 있어야만 더욱 의미있는 미래사회의 대안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매서운 비판과 반론은 이 글이 간절히 희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런 치열한 논쟁이야말로 지금 이 시간에도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며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 청년실업자, 이주노동자, 농민, 빈곤여성, 영세 일반 자영업자 등 대다수 인민들의 삶에 동참하는 길이다.
이 글은 이런 순서의 주장과 논의로 이어진다.
첫번째로 먼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제한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면 늘 허구화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제한과 극복의 기획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한하거나 극복하는 동력, 자본주의 극복의 정당정치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풀뿌리 공동체이다.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의 기초는 풀뿌리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관점의 회복이 필요하다.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운동은 풀뿌리 공동체의 형성과 건설이라는 시각으로 새롭게 재정립되어야 한다. 그런 풀뿌리 공동체는 직접 민주주의의 근거지이자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대안 경제질서(우클라드 uclad)의 보육원이다. 간접 민주주의는 이런 직접 민주주의의 근거지가 없다면 늘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시민사회운동은 이같은 풀뿌리 공동체 형성의 운동으로 시각이 전환되고 재편되어야 한다.
네 번째, 적녹청 동맹의 새로운 사민주의, 생태주의 정당은 풀뿌리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를 불쏘시개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늘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만들어야 하며, 의회정치와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실현하는 조직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다섯 번째, 이를 토대로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등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각종의 정치개혁을 해나가야 한다. 나아가 한국사회 자체의 전면 재기획을 추구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민주주의
먼저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늘 허구의 민주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특히 선거민주주의란 풍요와 부국강병 이데올로기의 수많은 '히틀러들', 다양한 '박정희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통과의례, 금권선거 잔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대선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 지상주의, 시장전체주의, 황금만능주의가 개개인의 삶 깊숙이 유전자처럼 골수에 박힌 사회이다. "성공하세요"라고 외치는 대통령 후보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면 부자 됩니다"라는 어느 교회의 광고와 마찬가지로 그런 자본주의 성장 이데올로기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수당 1억 원, 출산수당 3천만 원, 노인수당 매월 50만 원이란 대선공약을 내건 후보가 인기를 끄는 세태를 달리 무엇이라고 설명하겠는가.
문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가 과연 무엇이 있느냐라는 일반 시민들의 질문에 어느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해왔다는 사실이다. 경제성장지상주의란 이제는 청산해야 할 가장 주요한 마몬의 바벨탑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실현가능한 대안 사회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암환자에게 치료방법을 얘기하지는 않으면서 암을 극복해야한다는 말만 주문처럼 외우는 안타까운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환상일런지 모른다. 서구 자본주의가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인민들의 고혈을 착취해 자국의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풍요를 떡고물로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 자본주의 또한 이미 제3세계 인민들을 착취해서 풍요의 떡고물을 일부 대중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체제 위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위기가 닥치고 성장과 넘쳐나는 풍요가 사라진다면 부국강병과 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취약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선거 민주주의가 어떤 체제로 치달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를 근본에서부터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 기획을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인민 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어떠한 민주주의도 순식간에 그냥 신기루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폭력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사회주의 혁명 실험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폭력에 의존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새로운 폭력사회를 낳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선택해서는 안되는, 전혀 바람직스럽지 못한 방식이다. 오직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인민 대중의 깨어 있는 선택만이 유일한 사회전환의 길이다. 때문에 일반 인민들의 인식의 전환이 없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의 극복은 그런 인식의 전환을 이룬 인민들의 손으로 선거혁명을 통해 이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도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경제 질서(우클라드uclad)가 일반 인민들 속에서 굳건히 성장해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여나가면서 새로운 경제질서를 창출해 나가는 비폭력 평화운동, 도처에서 싹을 틔우는 유기농 방식의 자본주의 극복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공동체를 파괴한 자본주의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제 한국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살벌한 경쟁만이 젊은이들의 교육과 학습 지표가 되어 버린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이웃이 없는 인간관계 단절의, 도저히 사회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그저 임시수용소같은 숙소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명백히 무리생활을 하는 사람의 본성에도 어긋난다.
물론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거리에는 각종의 기기묘묘한 상품이 넘쳐 흐르고 사람들은 의식주 모든 면에서 역대 어느 제왕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다만 돈이 없으면 이런 풍요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돈을 벌기 위해 스물 네 시간을 다 쓰고도 모자라 온몸과 영혼까지 다 갖다 바친다. 돈이 곧 왕이자 법이다.
도처에 넘쳐나는 게 남아도는 사람들인지라 돈이 없거나 적은 극빈층과 노인, 실업자, 비정규직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잉여인간 취급을 받는다. 거리의 노숙자는 아예 쓰레기 취급도 받지 못한다. 물론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대접받는 정도를 넘어 제왕처럼 섬김을 받으며 산다. 우리가 왜 이런 사회에 살아야만 하는가.
이런 사회를 만든 주범은 물론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농업공동체를 파괴하면서 태어난 괴물이자 암세포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 개개인의 근육을 남김없이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와 지구생태계 자체도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활성화시켜 고갈시키는 놀라운 증식력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를 암세포라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철 지난 맑스와 공산주의를 거론하려는 고문관이 있는가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에는 자본주의를 불변의 체제, 어쩔 수 없는 숙명의 체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역사상 아주 짧은 시간에 등장한, 만고불변이나 만병통치라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문제투성이에다가 인간의 선함과 공동선, 사회정의마저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잔인한 제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때문에 현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제한하거나 또는 나아가 과감하게 극복해가는 새로운 청사진을 늘 기획하고 이를 실험하는 희망의 실천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자유로운 개인'을 만들어 내야만 성립되는 체제이다. 말이 자유로운 개인이지 실상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유일한 자유란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든지 굶어죽든지 양자택일하는 자유밖에는 없다. 자본주의는 결국 끊임없이 수많은 잉여 인력, 실업자들을 방패로 일회용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붕괴된 건물의 시멘트 조각처럼 파편화된 저임금 노예들을 양산하는 노예 체제이다. 노예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불성설이며 노예의 신세로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꽃피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자본주의의 최대 목적은 오직 하나, 이윤의 극대화이다. 자본의 증식, 곧 암세포의 증식이다. 무슨 인간에 대한 배려니 이웃의 정이니 공동선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가치는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최고로 극성하고 있다는 표지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장전체주의, 시장만능주의이다. 게다가 금융자본주의가 만개한 오늘날에는 아예 생산과는 전혀 별개로 오로지 집적된 금융자본만을 가지고 순식간에 한 나라의 전체 부를 빼앗아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IMF 사태가 한 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조 달러에 이르는 국제 투기자본이 세계 각지에 빨판을 들이대고 흡혈귀처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본주의 경제성장은 사실 길게 보면 전혀 지속불가능하다. 깨어있는 인민이라면 이는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상식이다. 자본주의 산업화의 극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석유문명은 이제 석유정점(Peak Oil)과 동시에 확연히 다가오는 화석연료 고갈, 모든 자원의 정점-고갈과 함께 종말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종말의 쓰나미와 경고음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석유중독자의 삶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간명하고도 명확하다. 극도의 개인주의와 극도의 이기주의, 극도의 살벌한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우리의 대안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협동해나가는 상호부조와 호혜,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 건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란 없다. 기업은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 기업은 노예노동자들을 부속품으로 돌려 화폐를 찍어내듯 이윤을 짜내는 거대한 압착 기계일 뿐이다. 사람이고 자연이고 기업의 눈에는 이윤을 보장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오늘날 파리목숨보다도 못한 수많은 직장인들을 보라.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위협할만한 인간의 공동체가 성장하면 가차없이 공격해서 무너뜨려 버린다. 노동조합을 자본가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기회만 있으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삼성의 이병철과 이건희가 대를 이어 무노조 경영을 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온갖 파렴치한 범죄행위까지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노동조합은 다름아니라 노동자들이 노예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체가 되어 만든 평등과 우애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길게 보면 자본주의의 최대 위험요소인 협동과 자치의 공동체 정신을 퍼뜨리는 진앙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공격을 극복하면서 이같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다가오는 에너지 고갈, 자원고갈, 식량위기와 기후변화의 쓰나미 앞에서 그나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의 가족, 이웃과 더불어 함께 생존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평화의 길이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의 존재야말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는 터전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전쟁과 폭력의 불길한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도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다양한 우애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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