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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ㆍ성폭행에 무방비 노출된 재중 탈북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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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ㆍ성폭행에 무방비 노출된 재중 탈북여성들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8>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넷째날 오후] 탈북여성들의 인권-김정숙군-혜산

재중 탈북여성들의 인권문제

탈북해서 중국 남자와 결혼하고 밀수를 하다가 처형당한 북한출신 며느리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탈북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내내 차창 밖의 경치를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북한 인권문제를 공부해온 필자로서는 압록강을 따라오면서 틈틈이 강을 건너오는 탈북자들의 인권문제를 생각했지만 북한출신 며느리의 가슴 아픈 얘기를 직접 듣고 나서는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압록강 상류 쪽으로 오니 강폭이 갈수록 좁아지고 강 건넛마을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강변 가까이에서 미역을 감거나 고기 잡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 정도로 가까우면 몰래 강을 건너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감시와 경계가 더욱 심해졌다고 하니 탈북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으로 넘어오는 탈북자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경계가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의 수는 그다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2003년 미국의 북한 전문가, 앤드루 나초스가 쓴 <북한의 기아(飢餓)>라는 책을 번역 출간한 적이 있다. 이 번역서를 통해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때문에 북한에 기아가 발생했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밀려드는 탈북과정에서 탈북여성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음을 우리 사회에 전달한 적이 있었다. 탈북여성들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것이 두려워 중국 농촌 남성들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신변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중국 남편의 학대에도 도망을 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중국 남성들은 북한여성을 감금하거나 폭행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식을 낳은 뒤 내쫓아 버리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이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최근에는 인신매매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중국 농촌 남성들에게 팔려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북한 농촌 여성들에게 "돈벌이 잘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속여 중국에 인신매매한다는 것이다. 북한여성들이 중국으로 인신매매되어 강제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하면서는 폭력에 시달리는 사례들이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북한 사람이 중국 사람과 짜고 북한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인신매매한다는 얘긴데 북한당국은 인신매매에 대해 공개처형과 같은 극형을 실시한다고 한다. 단순 도강(渡江)을 도와주는 안내인에 대해서도 처벌은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인신매매를 한 경우나 마약 및 골동품 밀수 등의 혐의가 있는 경우에는 공개처형을 한다고 한다. 인신매매도 인권유린이고 공개처형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권유린이다. 그러나 문제는 탈북여성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인 식량난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월 4일 자 두 번째 답사기에서 잠시 소개한 적도 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북한의 식량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평양을 제외한 지역의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실정이라는 것은 이제 새로운 정보도 아니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의 감시와 경계가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탈북행렬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일행 중 한 분이 관포지교(管鮑之交: 아름다운 우정을 일컫는 고사성어)로 더 유명한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재상 관중(管仲)의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는 말을 인용하면서 "배고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뛰어넘게 만든다"는 코멘트를 했다. 이 말대로라면 탈북의 근본 원인인 식량난이 해결되지 않는 한 단속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탈북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탈북행렬 중 다수를 차지하는 탈북여성들의 인권유린을 막을 길도 딱히 없다는 얘기가 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재중탈북자 문제는 중국 당국에 골치 아픈 사안이다. 북·중 관계, 한·중 관계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국제사회도 중국의 재중탈북자와 관련하여 중국에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북자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국으로 건너오는 탈북자들의 인권은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 강제 송환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자건 여자건 강제송환을 모면하더라도 일단은 숨어 지내야 하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불이익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탈북남성들보다 탈북여성들의 인권침해 가능성이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운이 좋아 빠른 시간 내에 제3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들어오면 천만다행이지만 운이 나쁘면 그들은 결국 인신매매, 성폭행, 성매매 등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북한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문제를 안고 있는 국가인데 거기서 탈출하고서도 더 험악한 인권유린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재중 탈북여성들인 것이다. 한계상황에서 여성의 인권침해는 남성의 인권침해보다 더 심각하고 성적인 수치감으로 인한 인성의 파괴는 여성에게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로 남게 된다.

깔끔하게 정돈된 김정숙군

우리는 창바이(长白)를 향해 가다 12따오거우(道溝) 부근에 잠시 머물렀다. 강 건너편이 량강도 김정숙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위도 식힐 겸 간식 삼아 바이산(白山)에서 사온 수박을 쪼개 먹으면서 강 건너 김정숙군을 바라보았다.

▲ 김정숙군 전경 ⓒ황재옥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창바이 현과 접해 있는 김정숙군은 원래 '신파군'이었으나 1981년 김일성 처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건너다보이는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다른 북한 마을에 비하여 건물들의 페인트칠 상태도 좋았고 마을 안길도 깔끔하였다. 동네 가운데 김정숙 동상으로 보이는 조형물도 서 있고 중국 쪽에서 바라보이는 정면에는 관공서로 보이는 큰 건물도 있었다. 김정일의 어머니 이름을 딴 곳이라서 김정숙군은 다른 곳에 비해 특별히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였다.

김정숙군에 세워진 구호 입간판은 다른 곳보다 페인트칠도 더 완벽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사실 오는 중간에 보였던 북한의 구호 입간판 중에는 페인트칠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던 곳들도 많았었다. 김정숙군에 세워진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동지 만세" 입간판도 다른 데 비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건너다보이는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더 또렷한 것은 분명했다. 사람들이 주거하는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볕에 말리려고 이불들이 널려 있었다.

김정숙군도 2011년에 중국 창바이 현에 기반을 둔 '변경무역 수출입총회사'와 김정숙군에 있는 대규모 석영(石英)광산을 공동개발하는 협약을 체결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채굴된 석영은 물론 중국이 사들인다고 한다. 북한의 광물자원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대단하다. 지안-만포간 철교 부근 벽보에 "조선의 목재와 광물자원은 중국 기업에 매력적이다"라고 쓰여 있던 대목이 새삼 상기되었다. 중국이 북한의 지하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black hole)'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북한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목재와 광물자원 같은 원자재들을 가공하여 부가가치 높은 상품으로 만들어 팔 일이지, 그걸 원자재로 그냥 팔아 넘겨버리니 북한경제가 쉽사리 나아질 수 없는 일이다.

혜산의 두 얼굴: 파스텔 톤의 패션과 밀수꾼

김정숙군을 잠시 건너다보고 난 우리는 압록강 수계 상류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량강도 도청 소재지인 혜산을 보기 위해 창바이로 향하였다. 혜산이 신의주보다 작지만, 신의주는 압록강의 강폭도 넓고 단둥의 지형 지세도 높지 않아서 신의주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998년 8월에 왔을 때 기억으로는 창바이와 혜산은 그야말로 가까워서 망원경 없이도 충분히 건너다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혜산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예전에 비해 좀 나아졌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오감(五感)으로 체험할 것이다. 혜산이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 혜산시 전경 ⓒ황재옥

드디어 강 건너로 혜산이 또렷하게 보이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짐도 풀지 않고 일단 혜산을 초벌이라도 살피기에 모두들 바빴다. 혜산은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 혜산이 압록강 변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기도 하지만, 강에서 내륙 쪽으로 멀리 떨어진 산 밑자락까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량강도 도청 소재지답게 일반 가옥보다 공동주택 형태의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많았다.

혜산과 마주하고 있는 창바이는 요즘 교통의 요지로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백두산 관광의 전진기지로서 한국 관광객은 물론 중국 관광객들도 많이 방문할 뿐만 아니라, 창바이-혜산을 잇는 다리를 통해 북·중교역이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측 해관으로 보이는 비교적 큰 건물과 연결되는 다리 위에는 창바이와 혜산 간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큰 트럭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 건너 둑길 위로 덤프트럭 같은 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혜산에는 북한 최대 구리 광산인 청년동광(靑年銅鑛)이 있는데, 아마도 그쪽에서 동광 원자재를 싣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 창바이와 혜산을 오가는 트럭이 멀리 보인다 ⓒ황재옥

강 건너 혜산의 둑길 위에 승합용인 SUV 차량 5,6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다른 데보다 훨씬 많았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다른 강변 마을에 비해서는 활기차 보였다. 우리가 강가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5시여서 그런지 강가에는 물놀이 하는 아이들과 미역 감는 남자들, 그 사이에서 바위 한두 개를 차단막 삼아 여자들끼리 미역을 감는 모습도 보였다. 그쪽에서는 남녀구간이 구분되는지 몰라도 창바이 쪽에서 건너다 볼 때는 구분이 안 돼서 사실상 혼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구조였다. 한여름 4-5시면 대낮인 셈인데 그런 모습들을 보니 우리가 오히려 민망했다.

그런데 강에서 물놀이하는 어린이들이 수영복을 입고 빨간색이나 노란색의 비닐 튜브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제법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튜브를 가지고 있었다. 도청 소재지라서 높은(?) 사람들의 자녀도 있을 것이고. 중국과 가까워서 그런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신이 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강 건너까지 들려왔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소리까지 여느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 혜산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 ⓒ황재옥

둑길을 산책하는 여성들의 패션이 이전과는 달랐다. 신의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북한 여성들의 옷 색깔이 한층 밝아진 것이다. 원색은 물론 파스텔 톤의 옅은 연두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도 눈에 띄었다. 분명 예전에 비해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 시절인 1990년대 후반보다 물심양면으로 나아졌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98년 8월 북·중 국경지대 답사 때는 혜산에도 강가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강변의 돌 축대는 널어놓은 울긋불긋한 빨래들이 마치 패치워크(patchwork)해 놓은 조각보 같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패치워크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간혹 빨래하는 아낙네들도 보이기는 했으나 돌 축대에 빨래를 널어놓은 광경을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미역을 감으면서 강 건너 우리를 보고 웃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 미소가 이전처럼 그리 짠해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아마도 미역 감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내게는 그 미소가 예뻤다.

혜산시 뒤쪽 산 중턱에도 여지없이 '경애하는 김정은 장군님 고맙습니다' '위대한 김정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구호 입간판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말씀을 무조건 철저히 관철하자'는 김정일의 유훈 관철을 독려하는 구호 입간판도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김정숙군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구호 입간판의 페인트칠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전 같은 북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혜산시의 구호는 김정일의 '일' 자를 '은' 자로 고친 흔적이 역력하였다. 김정일이 사망한 지 반년이 넘은 시점에도 페인트칠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혹시 김정은은 인민들을 예전처럼 닦달하지 않는 것인지, 북한을 연구한 우리조차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북한에 변화가 있는 것인가? 여하간 예전과는 뭔가 달랐다. 이는 앞으로 좀 더 검증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혜산을 바라보면서 강을 따라 걷는 동안 국경지대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강에서 미역 감는 사람처럼 검은색 팬티만 입은 남자가 물 속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중국 쪽 강기슭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강 건너 혜산 쪽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신호는 오고 갔는데 접촉의 타이밍을 못 잡아 안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행 중 한 분이 "저게 바로 밀수꾼인데, 상대방을 기다리는 중인 것 같다"고 설명을 했다. 허커우(河口)조선족 진 식당 앞에서 만났던 오토바이 조선족 남자가 생각났다. 조선시대 때 공무역은 호시(互市)라 하고 밀무역을 후시(後市)라고 했다는 설명을 한 바 있지만, 혜산에서 '소규모 후시' 또는 '모바일(Mobile) 후시'의 현장을 목격할 뻔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북한 쪽 상대 밀수꾼과 거래 현장을 못 본 것이 좀 아쉬웠다.

▲ 혜산 야경 ⓒ황재옥

해가 지고 난 뒤에서야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혜산을 떠나기 전에 '밤의 혜산'은 어떤지 보기 위해서 다시 강가로 나왔다. 그동안 창바이를 여러 번 다녀간 분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도시 전체가 어둡고 침침했었는데 작년부터는 아파트나 일반주택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그럼 2012년의 '밤의 혜산'은 무엇이 변하였을까? 이번에는 주택의 조명은 물론이려니와 길가의 가로등이 밝혀져 있는 것이 작년과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1998년 바라보았던 혜산은 불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칠흑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그런대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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