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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는 저렴한 특목학교가 아닙니다"

[민들레 교육 칼럼] 혁신학교와 대안학교

경기도에 역사상 처음 진보교육감이 탄생하면서 혁신학교라 불리는 새로운 유형의 학교가 등장했다. 이어서 서울형 혁신학교를 비롯해, 전국 여섯 개 자치단체에 각종 혁신학교들이 설치되고 있다. 서울·경기에만도 백 개가 넘으며, 내년에는 두 배로 늘어날 예정이다.

그런데 정작 혁신학교가 어떤 학교이며, 무엇을 지향하는 학교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사실상 어떤 공통점도 가지지 않거나, 심지어 서로 정반대의 지향을 가진 학교들까지 일률적으로 혁신학교라고 불리는 상황이다. 진보교육감이 있는 6개 시·도의 혁신학교들도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심지어는 같은 시·도의 혁신학교끼리도 큰 편차를 보이기도 한다. 경기도의 경우 특히 학교 간 편차가 심해서 '혁신학교'라는 단일 범주로 포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서울의 경우는 편차를 줄이려다 보니 혁신학교 지정 과정이 까다로워져 양적 확대가 더뎌지기도 한다.

요컨대 '혁신학교'라는 용어에는 분석적 가치가 거의 없다. 이름만으로는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그려낼 수 없으며, 그 학교가 공교육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판단할 수 없다. 이렇게 용어의 의미가 정립되지 못하다 보니 갖가지 오해가 보태져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혁신학교의 위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혁신학교에 대한 이런 혼란을 정리하고 특히 대안학교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만드는 일

혁신학교는 종종 '공교육의 대안'으로 불린다. 실제로 혁신학교 운동에 나선 교사들이나 교육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일종의 공립 대안학교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혁신학교를 주도하는 교사들은 수업 방법이나 학교 운영 방법 등을 여러 대안학교 실험에서 많이 차용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도심형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의 역할이 컸다. 또 진보교육감이 있는 지역의 대안학교들은 교육청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밀접해졌으며, 연수원이나 각종 자율적 연수·연구 활동을 통한 교류도 늘어났다. 이런 흐름이 혁신학교의 발전에 기여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 속에 대안학교와 혁신학교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비교적 널리 알려지고 규모가 큰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런 현상은 2011년 4월에 경기도 교육청이 개최한 '세계혁신학교 박람회'에서도 드러났다. 이 학교에 초청된 외국 학교 관계자들은 사실 대안학교 관계자들이 많았다. 타이틀을 '세계대안학교 박람회'로 고쳐 달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핀란드 등 북유럽의 경우에만 비교적 혁신학교 타이틀에 걸맞은 공교육 종사자들이 초청되었다. 서울형 혁신학교의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은 송순재 서울교육연수원장 역시 다른 쪽에서는 대안학교의 대부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경험이 있기도 하지만 혁신학교와 대안학교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여러 유형의 혁신학교가 있지만 모두 공교육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성열관·이순철 <한국교육의 희망과 미래 혁신학교>(살림터 펴냄, 2011)). 혁신학교는 말 그대로 기존의 공교육 학교를 혁신하는 것이지, 그 외부에 어떤 대안적인 교육체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목표에 동의하기 어렵거나 다른 교육 욕구가 있어서, 혹은 특별한 교육적 조치가 필요한 특수한 집단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혁신학교는 보편을 지향하는 학교다. 대안학교가 공교육 체계 외부에 또 다른 선택지라면, 혁신학교는 공교육 체계 내부에서 이를 자극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학교다(성열관·이순철<한국교육의 희망과 미래 혁신학교>(살림터 펴냄, 2011) ; 곽노현 「21세기에 걸맞는 공교육으로 진화시키겠습니다」, <국회혁신교육포럼기념 토론회 자료집>(2012) ; 김상곤 「민선교육감 2년을 통해 본 초중등교육의 혁신과제」, <국회혁신교육포럼기념 토론회 자료집>(2012)). 대안학교는 "이런 학교 어때?" 하고 손짓하는 학교지만, 혁신학교는 "이런 식으로 바뀌어야 해" 하고 제시하는 학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토 마나부가 말한 파일럿 스쿨(pilot school), 시범학교의 의미다.

이는 사회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파일럿 스터디와 그 위상이 비슷하다. 사회학자들은 여론조사나 통계조사를 할 때 1500~2000명의 표본에게 설문지를 뿌리기 전에 30명 정도의 작은 집단에게 먼저 설문지를 돌려서 통계처리를 해보는데, 이를 '파일럿 스터디'라고 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설문지의 적합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파일럿 스터디를 거치지 않으면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배포한 다음에서야 이런 저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연구가 되거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막대한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혁신학교도 이와 같다. 혁신학교 운동의 기본 전제는 '새로운 학교가 필요하다' 수준이 아니라 공교육 체계 전체가, 즉 모든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일거에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우선 가능한 학교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서울을 예로 들어보자. 서울에는 약 1300개의 학교가 있다. 그런데 이 1,300개의 학교를 특정 방식으로 한꺼번에 바꿨는데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회적 비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학교를 바꾸는 일은 섣불리 시도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각오를 충분히 하고 준비가 된 교사들이 있는 학교를 중심으로 우선 30개, 다음 해에는 60개, 이런 식으로 점차적으로 바꿔 나가자는 것이 혁신학교의 취지다.

이렇게 혁신학교 수를 점차 늘려가는 과정은 '복잡성 과학'에 기반하고 있다. 복잡성 과학에 따르면 세상의 변화와 모든 진화과정은 선형적이지 않다. 혁신학교의 수가 30개씩 늘어나면 1300개 학교를 바꾸는 데는 40년이 걸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혁신학교를 경험한 교사들이 늘어나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학교 전체가 예기치 못한 속도로 일거에 바뀌게 된다. 혁신학교 운동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60개라도 장차 1300개가 될 것을 기대하고 시작하는 일이다. 곽노현 교육감은 이를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했다(곽노현, 2012).

혁신학교의 현 단계는 공교육 정상화다

그렇다면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이 왜 필요하며, 모든 학교가 바뀌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은 여태껏 공교육이 목표로 해왔던 것조차 달성할 가망이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경우에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나라 공교육 목표 어디에서도 입시교육을 명문화 한 곳은 없다. 또 초중등교육법, 교육공무원법 어디를 뒤져 보아도 교사가 교육이 아닌 행정업무에 시달리도록 되어 있는 규정은 없다. 그런데 학교 현장은 이와 전혀 다르다. 현재 우리나라 공교육은 법령이 규정해놓은 것마저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왜곡된 상황이다. 이런 파행적 상황이 너무도 오래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비정상이 오히려 정상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진보교육감들의 교육정책들을 흔히 급진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구현하고자 한 것은 공식적인 교육과정,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의 목표와 규정대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다. 법대로 해도 급진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리나라 공교육의 왜곡이 공고했던 것이다.

이는 잘못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여 근육이 굳어버린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잘못된 자세가 계속되면 결국 등이나 척추가 더 큰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장 바른 자세를 취할 때마다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잘못된 자세를 고수하게 된다. 그러니 이 자세를 한 번에 고치려 하지 말고, 통증을 덜 느끼는 부위부터 조금씩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나라 학교체제를 자세가 잘못된 몸이라고 한다면, 혁신학교는 자세 교정을 먼저 시작하는 부위라고 할 수 있다. 혁신학교는 굳어진 파행을 바로잡을 때 수반되는 고통을 먼저 감수함으로써 바로잡기 위한 용기와 전범을 다른 학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는 혁신이라기보다는 '정상화'의 의미에 가깝다(성열관·이순철, 2011).

현재 우리나라 혁신학교의 상당수는 아직 이 정상화의 단계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몸에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교육체제는 새로운 운동기술을 배우기에는 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우선 바로잡는 단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 단계를 지나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돼야 새로운 동작을 익히는 단계, 즉 혁신의 단계가 시작된다.

혁신학교의 배경은 사회변동이다

타일러(Ralph W. Tyler)는 공교육의 교육과정이란 사회적 요구와 교육철학, 그리고 학습심리학이 어우러져야 한다고 했다. 지난 정권 때 학생과 학부모가 교육수요자라는 잘못된 믿음이 전파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공교육의 수요자는 사회다. 학생은 학습자이며, 학부모는 교사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교육자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사회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교육을 요구하며, 그들의 자녀가 사회가 지정한 교육기관에서 생산한 교육을 받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의무교육이 탄생한 것이다. 공교육 기관으로서 학교가 사회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 듀이(John Dewey)가 말했듯이 "한 사회는 그 사회에 걸맞은 학교를 갖는다".

그런데 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동하는 복잡계다. 사회가 변하면 사회가 공교육에 요구하는 바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변동하면 공교육도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회는 계속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구성원을 재생산하게 되며, 결국 퇴행·몰락하고 말 것이다.

에컨대 농경사회에서 목표로 하는 인간상과 산업사회의 인간상이 같을 수는 없다.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이 달라지면 교육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산업사회가 마무리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지금 공교육이 목표로 하는 인간상 역시 바뀌고 있으며, 이는 교육의 내용, 방법, 그리고 시·공간도 모두 바뀌어야 하는 일이다. 즉 기존의 학교가 분산·네트워크·녹색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학습공동체로 진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진화과정이 그렇듯, 모든 개체가 일거에 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먼저 변하는 학교들, 즉 혁신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사회 변동뿐 아니라 교육학 이론의 변동도 혁신학교의 중요한 동기다. 1960~70년대 때 전성기를 이루었던 행동주의와 타일러-테이바Tyler-Taba 모형에 기반한, 이른바 학생에 대한 '의도적·과학적 조작'으로서의 교육관은 이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금은 학생을 교사의 개입·조작의 대상이 아닌 함께 성장해갈 학습공동체의 일원으로 바라보는 교육관이 보편적으로 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장·발달과 학습을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도 바뀌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교육을 설명하는 적절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던 학설들이 이제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정해진 법칙의 발현으로 여겨졌던 성장과 발달의 개념이 전면적 발달의 개념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는 학생이 교사와 동료를 포함한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가능성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계속 우리나라 교육계를 지배해왔던 분석적이고 환원적인 학습 과정과 이론도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인지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전체는 부분의 단순 합 이상이다. 따라서 학습할 내용과 그 맥락을 분리한 뒤 요소별로 잘게 자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학습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습은 동료, 그리고 교사와 능동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심지어 오늘날 마음은 각자의 두뇌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동료와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관계망 속에 깃든다는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의 학설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인지과학적 발견은 그동안 우리가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사실상 고통스러운 시간 낭비였다는 뼈아픈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학습이론, 인지과학에 기반한 교수학습, 즉 수업 혁신에 대한 강력한 요청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회 변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근대 산업사회는 환원론적·분석적 사고와 작업이 요구되는 사회였으며, 개별 자본가들과 개별 노동자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발전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학교도 그렇게 편성되고, 학습과정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수학이 교과목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으며, 다른 교과목도 수학적인 엄밀성에 기반하여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는 분산적·협력적·창의적 사고와 작업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이러한 능력들은 위계적인 관료제 학교의 칸막이 쳐진 개별적인 경쟁학습을 통해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으며, 지금처럼 예술교육이 홀대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소위 국가경쟁력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혁신학교는 교육과정과 교수학습, 그리고 평가 전반에 걸친 혁신을 목표로 한다. 혁신학교들이 경쟁 대신 협력의 교육, 요점 정리 문제풀이 대신 문예체 수업을 중심에 두는 것은 단지 교육적 실험이 아니라 세계 변동이 요구하는 바에 응답하기 위해서이며, 장차 한국 공교육이 이런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혁신학교는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혁신학교는 공교육을 바꾸기 위한 파일럿 스쿨이다. 혁신학교는 파행적으로 운영되어온 학교를 정상화하고, 사회변동과 새로운 교육학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학교다. 따라서 혁신학교는 덧셈이 아니라 뺄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학교를 파행으로 이끌었던 굳어버린 낡은 관행과 각종 잡무들을 과감하게 털어내는 것이 혁신학교의 출발점이다.

흔히 혁신학교라고 하면 뭔가 남다른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학교라고 생각하기 쉽고, 그런 학교가 적지 않게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혁신학교라기보다는 '연구·시범학교', 혹은 이주호 장관이 곳곳에 예산을 뿌렸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한 각종 '창의·인성학교'에 더 가깝다.

혁신학교는 결코 기존 학교에 어떤 새로운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혁신학교는 우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과감히 덜어냄으로써 학생들에게는 자발적인 학습의 여유를 주고, 교사들에게는 자신의 교육을 성찰하고 동료들과 함께 전문성을 함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해준다. 이렇게 학생과 교사의 자발성이 살아나고 협력할 태세가 갖추어지면 새롭고 창의적인 프로그램은 저절로 생겨나기 마련이다(성열관, 이순철, 2011).

혁신학교에서 자발성과 협력의 풍토가 자리를 잡으면, 기존의 학교교육과정, 교수·학습, 그리고 평가의 혁신 과정에 들어선다. 이는 자신을 전문직으로 여기는 교사들의 협의와 공동 연구를 통해 이뤄지며, 이를 통해 학교가 전반적으로 바뀌어나간다. 즉, 특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정규 교육과정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혁신학교는 변화된 세계와 교육학을 반영하여 공교육의 새 표준을 제공하고자 하는 학교다. 정규 수업시간을 낡은 표준에 따라 진행한 뒤, 별도의 프로그램을 통해 혁신을 꾀한다는 것은 눈가림이며 기만이다.

따라서 혁신학교에서 교사들이 '혁신적으로' 과로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혁신학교는 오히려 교육 본령에 어긋나는 각종 과외활동, 행사, 사업 등을 정리하고, 정규 교육과정의 혁신에 집중하려는 학교여야 한다. 교사들은 교육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연구와 학습에 할애해야 하지만, 이는 교육 외의 업무를 제거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사들은 오히려 피로감을 덜 느끼게 된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자신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특별해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기 위해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시간에도 교사들이 초과근무로 피곤에 절어 있는 학교는 보기 좋은 방송용 학교일 뿐 진정한 혁신학교가 아니다. 이런 학교를 어떻게 모든 학교가 따라야 할 표준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많은 학부모들, 그리고 심지어 혁신학교를 주도하는 진보교육자들조차도 혁신학교가 뭔가 특별한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또 상당수의 학부모들이 혁신학교를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교사들이 천리마 운동처럼 동원되는, 아이들을 긴 시간 맡겨둘 수 있고, 교육효과가 높은 학교로 생각하고 있다. 혁신학교 때문에 집값이 오른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정규교육과정의 혁신 외에 특별한 과외활동이 없었다면 혁신학교를 바라보고 이사까지 하는 맹모들이 이렇게 몰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혁신학교는 일종의 저렴한 특목초, 특목중, 특목고였던 것이다. 진보교육감과 혁신학교 관리자들은 이런 잘못된 인식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는커녕 혁신학교 홍보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은연중에 방치하는 경향까지 보이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혁신학교와 대안학교

논의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면, 대안학교 운동가들은 더 이상 혁신학교와 대안학교가 혼동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새 표준을 만들기 위한 파일럿 스쿨의 길을 가기에 공교육 체계 외부에 또 다른 대안적 교육체제를 선보이고자 하는 대안학교와는 그 출발점부터 다른 셈이다.

혁신학교가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공교육 기관이 혁신학교처럼 바뀌었다 하더라도 대안학교는 여전히 필요하다. 대안학교가 반드시 담당해야 할 역할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공교육이 목표로 하는 인간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따라서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이런 사람들의 교육권도 무시되어선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을 공교육 기관에서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교육적 표준을 제시하는 대안학교가 필요하다. 이 대안학교가 공립이라 해도 그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둘째, 공교육의 목표에는 동의하나 공교육의 표준적인 방법으로 교육하기가 어려운 독특한 특성을 가진 학생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다양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다양한 대안학교가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가장 중요한 역할인데, 표준을 벗어난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하고 싶은 교육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의 실험정신은 교육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실제로 혁신학교의 많은 부분들이 대안학교의 실험적 실천 성과를 응용한 것이며,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의 공교육 기관은 이전 시대의 대안학교에서 그 모델을 따왔다. 예컨대 근대 초기의 코메니우스의 학교나 페스탈로치의 이페르돈도 당시엔 일종의 대안학교였지만, 근대 공교육 학교 모델의 기반이 되었다. 프뢰벨이나 몬테소리의 실험적인 유아교육은 오늘날 주류가 되었다. 존 듀이가 시카고에 세웠던 실험학교는 당대 보수파들의 압박에 의해 문을 닫아야 했지만, 오늘날 급진적인 학교는 물론 과학고 등 엘리트 학교에서도 존 듀이를 내세우고 있다.

공교육은 아무리 급진적인 교육감이 있다 해도 빠르게 변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분출하기에는 여전히 덩치가 크고 둔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공교육의 위상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사회구성원들의 동질성과 연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교육에 어떤 이질적인 요소가 공급되지 않는다면 공교육은 결국 끊임없이 어제만을 재생산하는 낡은 기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창의적으로 분출하는 다양한 대안학교는 바로 이렇게 굳어 있는 공교육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교육이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생산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따라서 대안학교의 위상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공교육이 품지 못하는 사람들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교육기관이다. 다른 하나는 공교육 너머를 사유하면서 교육의 변경을 넓혀가는 교육적 프론티어들의 창의적인 실험장이다. 이 중 후자가 더욱 중요하다. 혁신학교는 이렇게 이미 확장된 변경을 영토화하기 위한 선도 학교로서 대안학교와는 그 목적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안학교가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공교육은 적절한 자극을 받지 못해 혁신학교 자체도 만들어지지 않거나, 만들어지더라도 창의 · 인성 학교와 다를 바 없는 전시용 학교가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혁신학교가 없다면 대안학교의 다양한 창의적 교육실험들은 항상 탐색으로만 끝나고 이 모험적 교육자들이 꿈꾼 변화를 교육계에 퍼뜨리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혁신학교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도 혁신학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후보는 전국적으로 혁신학교를 널리 보급하겠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혁신학교가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면 오히려 대안학교의 필요성이 커질 것이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혁신학교가 된다면 역설적으로 그들은 더 이상 혁신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혁신학교가 다시 필요해질 것이며, 이때 필요한 혁신의 동력과 아이디어는 결국 다양한 대안학교들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위의 글은 <민들레>83호 특집 "空교육의 대안은 公교육"에 실렸던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권재원 연구원의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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