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평화의 신화' 입에 물고 나는 작은 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평화의 신화' 입에 물고 나는 작은 새

[기고]우스리스크의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 국제전

2007년 2월 20일 새벽 설날을 쇠자 마자 짐을 꾸렸다. <동아시아평화의 신화전>을 치르기 위해 연해주로 향했다. 팜플렛을 편집하고, 전시 작품을 손질하고, 주문한 플래카드를 찾아다가 여행짐을 꾸렸다. 네 덩어리의 무거운 보따리를 끌고 들고 메고 혼자 가는 길이다.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은 지난해 여름 비킨강 오롤·크라스나야르 <우데개 마을 신화답사>에 이은 2차 행사인 셈이다. 동북아평화재단의 송상윤 간사가 공항 가는 마포 리무진 버스정류장까지 새벽길을 배웅해주었다. 공항으로 달리는 나는 젊은 시절 조국을 떠날 때와 다르게 가슴 설레임이 별로 없다. 아내가 원주에서 나보다 전화를 먼저 했다. 잘 다녀오라고….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블라디보스톡 공항이다. 비행기 창밖이 눈으로 하얗다. 한국은 올 겨울 눈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여기는 겨울답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한국과 연해주의 겨울만 비교해도 실감이 난다. 연해주도 예년에 비해 겨울이 너무 따듯했단다. 시베리아는 지구가 따듯해지면 더 좋은 땅이 된단다. 살기 좋은 땅이 되고 돈 있는 남반부 사람들이 몰려 올 테니 개발도 하고 땅값도 오를 것이란다. 러시아 푸틴은 이래저래 요즘 기분이 좋겠다. 조상이 열심히 땅을 넓혀 놓은 덕분에 에너지 자원, 관광자원만 팔아서도 잘 살 것 같다.
▲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이 열린 우스리스크 '화가의 집' 갤러리(좌), 전시 개막준비를 하고 있는 화가의집 관장 올가와 동북아평화재단 연해주사무국의 고려인 조 이레나(우). ⓒ프레시안

도착하자마자 우스리스크 화가의집 갤러리로 달려갔다. 벌써 둔가이와 조개라심이 나와서 그림을 걸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4인 국제전이라고 알고 있었을 텐데 이미 둔가이는 갤러리 벽면 절반에 자기그림을 걸어 놓고 있었다. 또 이상한 일이 있다. 조게라심은 자기 그림을 풀지도 않은 채 바닥에 놓아두고 초대 한 적이 없는 고려인 화가의 작품이 떡하니 벽에 걸려 있었다. 좀 황당한 일이다. <동아시아 평화신화전> 4인 국제전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 황당한 상황부터 수습해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 양국의 말로 인쇄해 간 팜플렛부터 보여 주었다. 4인전이라는 사실, 초대 받은 자의 그룹전이라는 사실을 환기했다. 다행히 모두 수긍하며 나의 판단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 우스리스크 전시 팜플렛. ⓒ프레시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려인 화가 조 게라심은 전시에 자신이 없어서 다른 고려인 정 씨를 끌어 들이고, 둔가이는 한국에서 기획자가 늦게 오자 자신의 그림이라도 많이 채워서 전시가 되게 하겠다는 과욕을 냈었던 것이다. 나는 내일 전시를 위해서라도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우선 초대 받지 않고 참여를 요청한 고려인 정 씨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찬조 출품으로 한 벽면을 할애하고 나머지 4인에게 벽면을 분할해서 걸게 했다. 그래도 둔가이가 그림을 워낙 많이 가져와서 다른 사람들 보다 2배의 벽면을 쓰게 특별 배려했다. 벽면은 6개로 분할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은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평화의 신화'는 넓고 깊다.

드디어 모든 준비는 다했다. 동북아평화연대 우스리스크 사무국 사람들이 열심히 나와서 준비한 덕분이다. 이곳 실정에 맞춰서 여건에 따라서 준비한 최선이었다. 오후 4시, 식순대로 사회자의 시작 안내말, 시청 문화과장의 축사에 이어서 고려인 가수의 축가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화가 필자, 말갈족 화가 둔가이, 고려인 화가 인사말이 이어서 있었고, 찬조 출품자 고려인 정 윌리암은 소개만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스리스크 예술학교 교장선생의 축사가 있었다. 대체로 '이번 전시는 개성이 있는 전시다. 이번 전시를 환영한다'는 인사였다.

나는 인사말에서 대략 이렇게 말했다.

"바로 앞에 축가를 불러 주신 고려인 가수의 노랫말 한 구절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한 마리 외로운 작은 새, 사랑을 찾아서 먼 길을 떠나 여기 왔네', 라는 구절이 멀리 한국에서 날아 온 나의 심정을 노래해주는 것 같다. 화가란 아름다움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나는 미의 순례자입니다. 저는 이곳 우스리스크 시민들과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하여 왔습니다. 아름다움을 나누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사랑을 하기 위해 한 마리 새처럼 날아왔습니다. 평화의 신화란 우리 모두가 소중하게 가꾸어가야 할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이 땅은 고대부터 이런 평화신화의 유산을 물려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 주제전시가 국제전으로 계속 커 갔으면 좋겠습니다."
▲ 개막식 장면, 100명의 관람자들이 참석했다. 우스리스크 미술계, 고려인들, 시청 문화부 책임자, 예술대학생 등 우스리스크 시민들이 참석했다. ⓒ프레시안

모두 환영하는 인사말이었지만 특히 교장선생의 인사말이 인상에 남는다. "개성 있는 전시를 열어주어 감사한다. 우리들은 이 지역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고대의 신화와 상징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갈 의무가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번 전시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전시 오픈 파티를 이끌고 있는 사회자 올가 미술관장을 비롯하여 현지 미술가의 반응들이 이방인 화가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있었다.

화가이자 미술관장이고 우스리스크 미술가 협회장인 올가는 "평화의 신화란 주제는 넓고 깊다"고 답하였다. 역시, 미술, 미술인은 분위기 파악을 빨리 한다. 이미 즉각적으로 그림을 보고는 분위기에서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가 주는 의미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말의 성찬은 미술의 알레고리를 해설하고 확인하는 뒷북이었다.

네 사람의 본격적이 작품평은 이 지면으로 할 수 없지만 간략하게라도 4인의 작품 소개와 특징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미술전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역시 작가와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작가의 작품 일부를 감상하며 지나간다.

둔가이(말갈족) 작품들
▲ 둔가이는 시우테 산맥 오지 말갈족 마을이 고향이다. 그는 흑수말갈의 후예인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9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고향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한다. 아마, 이번 전시가 아니라면 비킨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재료는 유화. 흑수말갈족의 샤만의례, 불의 신 '보자'를 부르는 의례춤을 그린 그림이다(좌). 우연히도 필자는 그의 그림에 응대라도 하듯 한국 불의 신- 불도깨비를 가져 왔다(우). ⓒ프레시안

▲ 그는 발해의 왕 대조영을 말갈족의 조상이라며 발해역사화를 그려 왔다(좌), 극동의 아시아족은 순록을 가축으로 기를 정도로 순록과 함께 살아 왔다. 암각화가 그려진 이 숲은 동아시아의 신화를 말하는 듯하다. 숲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우데개 족의 절박한 외침이 순록과 암각화의 은유로 나타난다. 유화 30호(우). ⓒ프레시안

최정미(한국) 작품들
▲ (왼쪽부터)동아시아 토속신앙의 상징들을 도조로 만들어 설치했다. 솟대와 장승 물고기, 순록의 뿔 등의 상징들은 신이 통하는 길, 생명의 통로였다. 이번 전시의 현수막 디자인과 앞의 개막 커팅 테이프와 함께 어울려 평화의 신화 메시지가 깃든 설치미술이 되었다, 연해주는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족이 살고 있다. 나나이, 우데개 족들이 그들이다. 나나이는 옷도 어피로 해 입고 종족의 수호신도 물고기 모양이다. 물고기에 날개가 있는 비어가 종족 수호신이다. 세라믹 각각 5×2cm, 세라믹 목걸이는 삼족오, 물고기, 도깨비, 신라의 미소 등, 상징이 깃든 목걸이 이다. 애인에게 선물하기를 좋아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은 이 목걸이들을 의외로 좋아 했다. 한국 도조 기술이 여기서는 신기한 새 기술이다. 의미를 묻고 사간다. ⓒ프레시안

조 게라심(고려인) 작품들
▲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 앞에서 연해주에 살고 있는 그의 딸을 그렸다. 홍범도는 고려인에게도 자주독립 영웅으로 신화다. 수채화. 25×40cm(좌), 조국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한 사진 꼬라쥬이다. 평화와 친목이 꽃피는 다리 모양이 인상적이다. 크기 40×30cm(우). ⓒ프레시안

▲ 연해주 고대 유적지 발굴 터에서 상상한 그림이다. 그는 이 상상화에서도 고려인의 잃어버린 근원적 가족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채화. 크기 25×35cm(좌), 두 여인이 거석과 신목 앞에서 손빔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생명줄의 근원인 불이 있고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도포자락의 할아버지가 서 있다. 스산한 겨울에 간절히 무엇을 기다리는 고려인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 사인펜 스케치화 25×35cm(우). ⓒ프레시안

김봉준(한국) 작품들
▲ (좌로부터 시계방향)고구려 벽화에는 달을 든 여신이었으나, 작가는 해를 든 여신으로 바꿨다. 한지부조. 크기 40×35cm, 불도깨비는 엄연한 우리의 신화이다. 가난한 민중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구제하고 다닌다. 한지부조. 40×50cm, 고구려가 동아시아에게 던져준 생명의 빛이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평화와 생명과 영혼의 가치를 동아시아와 세계로 부활시키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한지부조 25×25cm,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 책을 읽다가 산속에 산다는 여신을 노래한 초나라 굴원의 시에 응답했다. "향기로운 풀옷 걸치고 덩굴 띠 둘렀네~" 한지부조 40×50cm. ⓒ프레시안

▲ 전시 테이프 커팅을 하는 작가들, 좌측부터, 김봉준, 둔가이, 우스리스크 예술학교 교장, 조 게라심, 정 윌리암. ⓒ프레시안

예술은 언어와 국경을 넘어

문화교양의 힘이 소중함을 깨우치게 한다. 제 아무리 선의로 훌륭한 그림을 가지고 오면 무엇 하는가, 받아들이는 쪽이 예술을 읽는 교양이 없다면 허사다. 그런데 이곳에 참석한 예술가, 예술관계 교육자, 시청 문화담당관,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미술을 좋아하는 100여 명의 시민들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이해력에 있어 보였다. 미술전시는 도시문명의 산물이다. 시각적 알레고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교양이 필요한 문화다. 특히 이번 전시의 여론을 대표하는 자들은 이곳 미술인들이다. 이들이 전시장 여론의 담지자들이다. 우스리스크 예술가들은 조용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이방인을 편하고 따듯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 '평화의 신화전'을 축하 무용을 하는 우스리스크 고려인아리랑가무단 소녀들. ⓒ프레시안

러시아인들은 동방 연해주에서 100년 남짓도 안 된 서방 이방인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우스리스크의 주인이다. 그들이 먼 훗날 이방인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이 지역 전통문화와 단절을 극복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야박하게 느껴진다면, 평화의 가치를 서로 가진 종족의 문화유산으로부터 서로 문화자산을 내오자고 청하고 싶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모든 고대사를 자국의 유산화 하려고 하고 연해주 정부는 동방의문화를 모르쇠, 청산주의로 일관해 왔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근대의 신화로 국가재건신화, 전쟁영웅신화, 근로영웅신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불쌍하게도 근대의 화가들은 근대이데올로기를 추종하여 근대신화를 미화하는 도구자 역할을 했었던 측면이 있었다. 이 점은 우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시는 2월21일 시작해서 2월23일까지밖에 잡을 수 없었다. 둔가이가 블라디보스톡 전시 일정이 24일부터 잡혀 있다고 해서 그랬다. 그런데 와서 보니 3월1일로 연기 되었단다. 짧은 전시일정을 아쉬워하는 여론을 감안해 24일까지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변수는 많았다. 매일 추가되는 일들이 생긴다. 주최 측이 공식 초대한 만찬을 제외하더라도, 이 지역 미술인들의 '화가의 방' 초대, 남자의 날 파티 초대, 우스리스크 대학생 방문단 설명회, 우스리스크 예술학교 방문, 고려인촌 순방, 동북아평화연대 우스리스크 사무실 직원들과의 토론 및 강연회 등으로 6일간의 일정이 빠듯하다. 거기다가 숙소에 들어오면 미르에 이번 기행문을 써서 바로 현지에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아 놓았기에 바쁘게 보내야 했다.
▲ 우스리스크의 원로 화가, 75세의 프카친코 알렉산드르가 만찬 중 건배사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

나는 만찬에서 이번 전시를 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다. 아르세니에프가 1900년에 쓴 인류학 탐사기 <데르수 우잘라> 책을 읽고 감명 받은 바가 있어 동아시아 토착족이 사는 비킨강 오롤마을과 크라스나야르에 갔었고, 거기서 우데개 화가 둔가이를 만나 함께 전시를 해보자고 권했고, 다행히 한국문예진흥기금을 받을 수 있어서 전시를 하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인연은 참 묘하지 않은가. 100년전 아르세니에프가 맺어준 전시회인 셈이다. 연해주의 동아시아 부족에서 동아시아의 왕국사 이전의 문화원형을 찾을 수 있게 단초를 제공해 준 책이 아르세니에프의 <데르수 우잘라>였다. 이 때 답사기행문으로 <미르>지에 소개한 바 있다.

우리는 전시장 위층에 있는 화가의 방에도 초대되었다. 각방은 예술인 1인씩 화실로 쓰고 있는데 10여 명의 작가가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4개의 방에 초대 되었는데 나도 작업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화가라서 슈트디오 방문이 남다르다. 작업의 선택된 결과물만 보여주는 갤러리와 다르게 화가의 역사와 일상과 노동이 보이는 현장이다. 이곳의 방문기는 다음에 별도로 쓰기로 하자. 워낙 밀도가 깊은 개개인 예술의 역사가 생생한 현장이라 대충 넘어갈 곳이 아니다. 찬찬히 살피며 미학적, 장인적, 예술사회학적, 인문학적, 관광적 접근이 모두 필요하다. 3층 건물에 모여 있는 예술가들의 체취가 폭포수처럼 밀려온다. 나는 우스리스크에서 가장 볼만한 공간이 화가의 방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록은 앞으로 건립될 <고려인문화센터>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앞으로 건립할 고려인 문화센터에도 고려인 화가의 방을 만들어 두기를 권한다. 하나는 회화 작품을 만드는 공간, 또 하나는 공예와 조각을 만드는 공간으로 두 개 정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전시장과 문화상품 매장도 두어 서로 생산과 유통과 체험의 공간이 연결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관광문화시장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스리스크 화가의 집과 함께 예술관광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고려인에게 관광문화산업에 종사할 도시 일자리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자의 날은 4월8일이고. 남자의 날은 2월23일이란다. 남자의 날은 원래 군인의 날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파티를 열어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고 선물을 준다. 2년전부터 이 날을 공식 휴일로 나라에서 정했다. 여자의 날은 그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파티를 열어준다. 전시장 2층에는 벌써 파티가 시작되었다. 나와 강윤구 간사도 남자라고 포장지에 싼 선물을 주었다. 윤구 씨는 향수를 받고 나는 머리 기름을 받았다. 어제 보았던 화가들을 여기서 또다시 보았다. 러시아인들은 파티를 즐긴다. 모여서 술잔을 돌리고 건배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며 게임도 한다.
▲ 방문한 우스리스크 미술대학생들과 함께 전시장에서 기념촬영. ⓒ프레시안

제정 러시아 시대 슬라브족들이 동아시아까지 진출한 역사에는 저들의 진취적인 사교문화가 한몫 하고 있었다. 만나서 의례를 즐기고 낯선 이들과 친교력이 뛰어난 슬라브족들은 역시 대국의 문화를 만들어 온 저력이 이런 사교문화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옆에 앉은 올가의 스무 살 난 딸은 수줍은 작은 처녀일 것 같은데도 일어나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뻘의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건배사를 한다. 세대를 넘는 사교의례가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 청년들은 어른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를 표현하는 문화가 별로 없다. 존경이나 겸손의 미덕도 좋지만 우리는 세대간의 문화 단절이 너무 심각하다.

우스리스크 대학생들이 전시장을 방문했다. 작품 설명을 부탁 받았다. 때를 맞춰서 관람 오신 강니콜라이 선생이 통역을 해주었다. 동북아평화기금 회장이신 고려인 강 선생은 여기서 1급 통역사로 통한다. 그런데 요즘 몸이 아파서 어제 전시 열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가 오늘 일부러 나오셨다. 나는 1급 통역사를 만나서 이곳 대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설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평화의 신화'는 물성을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이해하는 마음

"신화는 역사시대의 기록이라기보다 선사대의 기록입니다. 인류가 최초로 태어나서 말로 뜻을 세울 때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의 이야기는 창세신화, 우리 종족이 탄생한 이야기는 탄생신화, 나라를 세운 이야기는 건국신화, 종족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번창시킨 이야기는 영웅신화입니다. 역사시대 기록과 크게 다른 점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가 새 질서를 찾아가던, 종족의 맨 처음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종족의 개성이 드러나고 태초의 근원적 사고가 보입니다.

여기서 인류 보편적인 사고도 보입니다. 남성주의 시대는 힘으로 큰 나라를 세운 제국의 시대부터이지만 신화의 시대는 모성중심 시대입니다. 탄생의 근원이 모신에게 있음을 공통적으로 알려줍니다. 만주족의 여신 아브카허는, 세상이 원래 혼돈의 거품이었는데 그 거품이 모여 여신이 되었고 여신이 무수한 생명을 탄생시켰다고 전합니다.

여기 걸린 해신과 달신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천신들입니다. 두 신이 만나서 세상을 탄생시켰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저는 달의 신, 여성에게 해를 들게 하고, 해의 신 남성에게는 달을 들게 했습니다. 고구려 벽화가 그려진 시대에도 이미 제국의 남성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던 역사시대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세상이고 남성적 용맹과 힘이 별로 쓸모가 없는 시대인 후천 시대인지라 저는 해와 달을 바꿔 들게 했습니다. 어쩌면 음적인 여성이 해를 들고 양적인 남성이 달을 드는 게 오히려 더 조화롭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하얀 나무는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입니다. 그냥 나무가 아니고 우주목입니다. 자연에 의지하며 살던 고대의 인류공동체는 자연의 덕에 감사하고 신성시 했습니다. 거기서 베푸는 나무 열매와 땔감과 그늘에 감사했습니다. 동아시아에는 신목에 대한 예의로 댕기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쪽에 세 발 달린 새는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베개모의 금공예 문장입니다. 이것은 빛을 상징합니다. 빛은 생명, 새날, 희망, 아침의 상징입니다. 산신 할아버지는 호랑이를 어루만지고 앉아 있습니다. 지상동물의 왕인 호랑이를 제압한 산의 으뜸 할아버지가 산신 할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동북아 사냥유목족의 신화에 거의 다 나오는 신화소입니다.

나는 재작년 브리아트 공화국에 갔었는데 그곳 박물관에서도 산신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뒤에 있는 여인은 숲속의 여신입니다. 초나라의 굴원은 산속에 사는 여신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 산모퉁이 누군가 있어 향기로운 풀옷을 걸치고 띠 둘렀네 다정한 눈길 아름다운 미소, 따듯한 마음과 우아한 자태... , 향기로운 풀들, 수레에 가득 싣고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꺾어서 님께 보내려는가.' 이 시를 노래한 부조입니다.

저기 있는 이글거리는 불문은 불도깨비입니다. 동아시아에는 불 또한 신성시 했습니다. 아니 불이야말로 신성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지금도 유목하는 몽고족이나 에벤키족들은 집(춤)에서 불을 지키는 일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불은 생명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불을 달고 다니는 도깨비는 약자를 도와주는 정의의 사자, 생산력의 화신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물성에 신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과 바람과 물과 심지어는 돌에게도 신성이 있었으니 자연과 인간을 신성하게 여기는 인류의 사고가 여기 신화에 깃들어 있습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신성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원천적 사고가 신화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비결입니다. '평화의 신화'는 물성, 몸을 신성한 아름다움으로 이해하는 마음에 다름 아닙니다."
▲ 전시 열림날, 필자의 우스리스크TV의 인터뷰 장면(좌), 전시 첫 날 전시장 모습, 개성 있는 전시라는 평을 받았다(우). ⓒ프레시안

전시회 이틀 째, 23일 5시 둔가이의 집을 방문했다. 그의 생일이어서 초대 받았다. 조일레나 부부, 김아렉산들리아(샤샤), 강윤구, 고려인 운전사, 이렇게 5명이 찾아갔다. 우스리스크에서 20킬로 떨어진 쟈레시노예, 인구 1만의 작은 마을에 살았다. 술과 쥬스를 사가지고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서 도착한 곳은 허름한 아파트 3층이었다. 여러가지가 궁금했다. 그는 왜 이 변두리 허름한 아파트로 와서 살며 비킨강 크로스냐야르(오롤마을 강건너 같은 말갈족 촌)에는 언제부터 화실 생활을 하며 살게 되었는지, 직업은 따로 없는 전업화가인지 등등이 궁금했다.
▲ 고려인 정 윌리암, 아마추어 화가의 찬조 출품한 파스텔화. 기교 없는 그림의 단순 명쾌함이 성공한 시적인 그림이다. ⓒ프레시안

들어선 아파트는 10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였다. 현관 겸 부엌을 지나 3평 남짓한 화실에는 그림이 가득하다. 화실의 그림구경부터 시켜준다. 여느 화가도 마찬가지이지만 둔가이는 자기 그림 자랑을 무척 즐긴다. 금나라 역사를 그린 삽화와 징기기스칸과 일전을 벌인 장면, 고향 비킨강의 풍경들이 이제는 낯익게 펼쳐진다. 3월 4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전시할 그림들이라고 의욕에 부풀어 설명한다. 찬조 출품했던 정윌리암 부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 제대한 고려인이다. 중장까지 진급한 고위군인 출신으로 동유럽과 사할린, 북극에서 중아아시아로, 소련연방 군주둔지로 동서남북을 끝까지 다녔던 사람이다. 나이는 54세이고 군출신답게 체격이 반듯하다. 그는 내게 찬조출품을 받아주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또 건넨다. 난, 그의 그림의 장점을 칭찬해 주었다. 당신은 그림에 기교가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의 저녁노을 그림이 참 좋다. 단순 명료한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룬 시적인 그림이다.

둔가이의 아내는 의사다. 우크라이나계의 서방인같다. 음식 장만에 성의를 다했다. 닭고기, 과일, 채소, 햄, 빵, 복음밥 등이 상 위에 그득하다. 보드카와 포도주로 건배를 했다. 또 내게 첫 건배사를 권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늘 남자의 날은 둔가이의 생일이다. 겹경사를 맞았다. 그래서 축하 축하한다. 건배! 둔가이의 생신과 성공적인 평화의 신화전를 위하여!" 러시아는 건배사를 돌아가며 한다. 멋진 건배사일수록 환영을 받는다.

집을 방문하니 둔가이의 사생활의 비밀을 알겠다. 그는 우데게이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900킬로미터가 넘는 남쪽 블라디보스톡에서 미술대학을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중등학교 미술교사 생활을 오래 했다. 부인도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는데 신경정신과 의사다. 나는 신경정신과 의사와 화가는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주었다. 부인이 참 온화해 보이는데 둔가이 말로는 싸웠다 좋았다 한단다. 그래도 지금은 부인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니 부인의 얼굴이 한층 환해진다. 어디를 가나 가정을 가진 여인들은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나보다. 둘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재작년까지 잘 살다가 갑자기 둘 다 실직되어 부인이 새 직장을 찾느라고 이 시골로 왔다고 한다. 여기는 주립 병원이 있는 곳이라 부인 따라서 이사 온 것이다. 그래도 둔가이는 틈만 나면 자기 고향으로 달아나는 것 같다. 가서 낚시와 사냥을 즐기며 비킨강을 화폭에 담아오는 천하 한량처럼 산다. 이것도 마누라 덕이고 제 복이다. 둔가이는 실직된 것을 기회로 자기 고향에 화실까지 차리고 고향의 문화를 예술로 남기고자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풀렸다. 그는 이곳 우스리스크를 한 수 아래의 시골 화단으로 본다. 우스리스크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도, 화가들과 어울린 것도 이번 평화의 신화전이 처음이란다. 이번 전시가 둔가이를 우스리스크 화단에 데뷔시킨 셈이 되었다. 그는 우스리스크 미술가 협회의 권유로 회원에 가입하기로 했다. 나도 여기서 회원가입을 청하니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만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 망설여진다.

연해주 화단에 주는 신선한 충격

둔가이는 이번 전시가 매우 흡족한 모양이다. 이번 팜플렛을 시장, 학교장,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할 때 전해주고 싶단다. 무엇이 그리 흡족한지 물었다. 조리 있게 답한다. 첫째, 화가마다 자기문화를 보여 주었다. 다들 그 점을 높게 평가한단다. 둘째, 역사적으로 20세기는 무서웠다. 그 시대 소수민족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의미가 깊다며 고려인 강제이주 그림을 주목했다. 세 번째, 도예전도 흥미롭다. 이곳에 도예작업의 마스터 클라스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단다, 더 작품을 많이 가져 왔으면 좋겠단다. 이곳 사람들은 도예가 발달하지 않아서 더 신기해 했다. 조 게라심 같은 고려인들의 그림들에도 의미를 크게 두었다. 자신들의 어려웠던 과거 가족사가 묻어 있단다. 지금도 처지가 어려워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단다. 찬조 출품한 정 윌리암스 작품도 한마디 덕담을 해준다. 군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림이 깔끔하고 힘이 있단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 난다. 이번 전시로 우스리스크 화단이 좀 충격을 받은 것 같단다. 신선한 충격이었다며, 맨 날 보던 그림만 보다가 동아시아의 신화를 주제로 독특한 개성들을 보여준 것이 신선했을 것이란다.

그렇다. 이번 전시에 참가한 우리는 아시아족들이다. 저들은 지금 이 땅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 땅의 유구한 전통문화를 모른다. 우리가 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유화, 그들의 사실주의 기법이 예술 형식의 전부가 아님을 이번에 보여준 것이고 이 땅에서 절실한 주제의식과 새 형식을 지금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유화는 사실 제정러시아시대 파리문화의 모방에서 시작한 유럽미술의 열등감이 묻어 있다. 그들의 형식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아니면 인상파, 아니면,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유럽미술, 그들이 그쪽으로 파고들수록 유럽의 열등감과 우월주의로 유럽의 변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 미술사였다. 러시아의 근대문화가 유럽의 고급문화를 받아들여 성취한 것이라면 이제, 그 수용에 한계가 있다. 서구 고급문화의 대안 없는 세기말적 현상에 더 이상 젖줄을 대기가 어려울 것이고 지리적 문화적 차이를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눈 돌릴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뿌리를 내리려면 치러야 할 문화의 숙명적인 과제다. 그들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국으로 국제문화를 키워가려면 당연히 치러야 할 학습이다.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과 어울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전시장 2,3층에 있는 화가의 방 순례

▲ 니키치크 이반의 20여 년전 청년시절 작품, 여성의 나신화에서 강열한 메타포가 전달된다. 이것은 현대판 '평화의 신화'라고 할 만하다.(좌), 화가 소보레보스키 방에 등어 갔을 때 나호드카의 친구 조각 소품이라는데 이 작은 소조가 눈길을 끈다(우). ⓒ프레시안

▲ 원로 작가 프카친코 알랙산드르의 방에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화가의 작품들(좌), 화가의 방 복도에서 발견한 먼지 묻은 과거 소련 시절 유화 한 점. 열차의 개통을 환영하는 시민의 모습, 사회주의 낙원을 열망하는 그림이다.(우). ⓒ프레시안

이번 평화의 신화전이 우스리스크 주류화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아시아인끼리 한 것이 그들을 빼고 하는 일이라 영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우스리스크 화단은 신선한 외부의 예술세계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들도 국제교류전을 소련 개방 이후 한 해가 멀다 하고 열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중국 안 다녀본 데가 없게 전시를 하고 다녀서 견문이 넓었다.

이 점을 우스리스크 동북아평화재단 사무국에서는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이미 국제적 감각에 익숙하고 동아시아 신조류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자. 100여 년 폐쇄사회에서 같은 양식의 미술과 재료로 그림을 그려 왔는데 새 표현의 자유를 찾고 싶은 게 화가의 본성이다. 우리 예술가들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움을 찾는 목마름이 큰 존재들이다. 이들은 바깥 문화교류를 여는 첨병임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권하고 싶다. 우스리스크에서 시민문화활동을 하고 고려인 문화를 융성시키고 우스리스크 국제관광문화산업을 열려면 이곳 예술인들과의 교류를 서두르라고 말해 주고 싶다. 화가의 방과 고려인 문화센터 예술공간들이 앞으로 서로 네트워크 한다면 관광벨트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스리스크가 낳은 김 올랙 화가는 고려인과 우스리스크의 대표적인 화가다. 이분의 컴백을 고려인과 함께 기다린다.
▲ 우스리스크의 대표적인 화가 고려인 김올랙이 학창시절 그린 작품,우스리스크 소년미술학교를 방문했을 때 발견한 그의 스케치 작품으로 우수한 작품이다. ⓒ프레시안

나의 말 통역을 맡아준 조 이레나와 샤샤가 고맙다. 조 이레나는 행사준비 때부터 애를 많이 썼다. 얼마 있어 한국의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들 입학식에 온다고 하니 그 때 다시 보고 싶다.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구경시켜주어야겠다. 그리고 샤샤, 정식 이름은 '김 알렉산드리아'다. 샤샤는 러시아 어머니와 고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말을 아주 잘한다. 발음도 정확하고 통역에 거의 막힘이 없이 말을 잘 전한다. 그는 대표적인 지한파 러시아인이다. 내가 개막일 만찬 중에 '데르수 우잘라'를 쓴 아르쎄니에프를 존경한다고 하니까, 그는 대뜸 아르쎄니에프는 이중인격자란다. 그는 러시아황제에게 극동 연해주에서 중국인과 한인을 소거해야 훗날 탈이 없을 거라는 보고서를 올린단다. 문서가 발견된 적이 있단다. 그 사실을 고려인 학자에게 들었단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고려인 한국교육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고려인 역사학자 한 분이 특강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카자흐스탄 국립문서 조사 때 발견했다고 한다. 당시 연해주 문헌이 이곳으로 이송보관 되었단다. 40대의 젊은 고려인 역사학자의 신원을 찾아봐야겠다.

샤샤는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사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내게 이런 말도 한다. 연해주는 100년 전 자유무역 지대였단다. 그래서 사방에서 몰려들어온 지역이었던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모르는 사실인 줄 알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어서 연해주의 자유지대는 다시 부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다.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만 해도 자유무역지대이다. 여기 와서야 무기를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자유무역지대가 있었기에 조국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때 한인 이주가 30만이 넘었었다.

연해주는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여러 문물이 교류하는 국제 무역도시, 문화교류지역이다. 이제 다시 21세기 평화의 시대를 여는 길목에 연해주가 있다. 우스리스크는 문화적 잠재력이 많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살고 중국과 국경을 인접하고 유라시아 철도가 시작되는 교통도시다. 여기서 우리가 이번에 던진 '평화의 신화'란 화두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고대의 신화적 가치를 잊지 말고 미래의 동아시아 국제적 시민평화사회를 이루자는 취지의 예술선언이 지금 조용히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미술은 요란한 팡파레와 함께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조용히, 그러나 깊이, 이미지로 영향을 끼치며 평화연대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한류가 잘 불지 않는 연해주

한국관광공사 연해주 지부가 생겼다. 여기도 한류가 불기를 고대하고 준비 중인 것 같은데 잘 먹히지 않는다. 한류가 아시아, 동남아시아 민족에게는 어느 정도 먹혔으나, 극동 러시아에서도 똑같이 통할 것이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겠다. 이곳은 문화권이 다르다. 100여 년전 서방의 파리를 모델로 세우며 몰려든 서방의 다민족다문화는 대슬라브주의와 일국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이식된 복합문화류를 형성했었다. 상대적으로 못사는 동종의 아시아족들이 잘 사는 아시아 나라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문화심리가 있는 한류,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대중과 다르다. 서구취향의 복합문화지대인 만큼 외부충격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 같지도 않다. 한류가 서방근대문화의 대리전달자로 보여주는 세련됨이 아시아인들에게는 선망일지 몰라도 그리 신기한 것도 강렬한 매력으로 비춰질 것 같지 않다. 이제, 한류는 연해주에서 새로운 시험을 치룰 준비를 해야 한다.

서방의 한국적 짝퉁이나, 메스미디어의 첨단 기술력만 믿고서는 이곳에서 매력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한류의 물량주의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고급한 한류로 거듭 날 시험대가 나는 연해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만일 새로운 한류가 성공한다면 나는 기대하건대 동구라파와 서유럽까지 넘는 매력적인 문화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해주는 달아오르기 힘들지만 한번 타오르면 거대한 다문화권 용광로다. 그리고 이 파장은 유라시아 길로 미칠 것이다. 왜곡된 강제의 역사가 다종족의 연해주문화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 기형적 문화토양이 오히려 이종교배의 활력이 된다면 문화는 창조적 활력을 가질 것이다.

문화는 동종교배보다 이질적인 것이 교합하며 우성문화를 창조하는 속성이 있다. 남미의 삼바, 북미의 재즈, R&B, 현대미술의 야수파와 입체파 등 그 성공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세계문화는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시장을 타고 용광로처럼 합종교배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문화의 일국주의나 제국주의는 가고 서로 다른 문화가 구미에 따라 서로 삼켜 합종교배하며 자유로운 문화시장이 만들어진다. 남미 삼바문화권, 서구문화권, 남아시아 인도문화권, 동아시아 화류문화권 등 광역지역블럭이 형성되고 있다. 그 중에서 세계시민대중의 마음을 누가 사로잡을 것인가. 시장경쟁의 첨병이 되어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공통된 것은 지역의 뿌리 깊은 전통과도 합종교배하며 강렬한 이미지 경쟁을 하는 중이다. 21세기는 시장과 문화 경쟁력이 하나가 되어 돌아갈 것이다.

한류가 물론 지금까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의 발전한 기술매체만을 믿고 덤비거나, 경제가 발전한 생활상을 소개만 하거나, 서구 대중음악의 짝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것이 한류문화의 활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콘텐츠를 고민하지 않으면, 지역적 정체성의 뿌리인 동아시아 지역의 고대문화를 소화해 내지 못하면, 미국영화가 한국에서 수십 년의 물량공세에도 지금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물량주의만 가지고는 생명력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한류는 새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반한류의 역풍도 만만치 않다. 문화권의 경쟁은 본격적으로 치열해지고 있다.

유라시아 평화문화, 먼 훗날이 아니다

우스리스크 현지에서 살고 있는 동북아평화연대 김현동 사무처장의 이야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려인 유라시아 길을 만들자고 한다. 약 100킬로미터마다 하나씩 고려인 거점 마을을 건설하며 우즈베키스탄까지 이어 달리게 약 50여 개의 고려인 마을을 건설하면 유라시아 고려인 문화벨트를 이룰 수 있겠다는 계산이다. 약 100킬로가 되는 거리마다 고려인 촌을 정착시켜 지역특산품을 재배하고, 자연농 기술을 공유한다. 문화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팍스코리안 문화권을 형성하고 다민족평화문화를 만들면 좋겠다는 큰 포부를 품고 있었다.

이런 꿈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수년전부터 동북아평화연대는 연해주 현지에서 고려인 촌을 부활시키는 사업을 펼치고 있었고, 재작년 나와 함께 유라시아대장정을 갔다 오더니 거대한 포부가 생긴 것 같다. 우리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유라시아대장정을 하면서 가는 곳마다 고려인들을 만났었다. 흩어져 살게 된 고려인들을 이어보면 이 포부가 비현실적인 몽상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10년 계획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다. 현실성이 있다. 연해주에 물량주의 한류를 퍼부을 예산이 있다면 정부는 이런 포부를 가져주길 바란다. 고려인은 한국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고 기나긴 비극적 유랑생활이 오히려 고려인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다. 고려인촌을 찾아 달리는 유라시아 길은 한국을 대륙으로 이어주는 신실크로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형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한국에 돌아가서 동평 회원들과 다시 논의해 보고 싶다.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교차하는 극동에서 지역적 정체성을 살린 한류가 크기 위해서라도, 성숙한 21세기 문화지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일국주의 문화생산기지에서 벗어나 몇 가지 문화적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연해주 발해문화와 동북3성의 고구려 만주문화와 실크로드 문화의 팍스알타이 문화권과 서로 젓줄을 대는 일, 지역적으로도 한반도 연해주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샤만문화권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으로 넓게 퍼진 고려인 삶의 현장을 국제적 평화문화이자 한류문화의 거점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 마을 이어가기 유라시아 길'은 새로운 화두다. 고려인과 한국청년이 앞장선다면 이룰 수도 있는 신유라시아 문화벨트다. 화류와 일류, 한류의 일국주의 문화를 넘어 한국과 고려인과 유라시아 다민족이 주체가 되는 다중 지역공동체문화권으로, 동북아와 유라시아를 이어내는 유라시아평화문화를 창조하는 신문화권으로 창조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이것이 동방의 르네상스에 다름 아니다.
▲ 둔가이 집에 초대되었다. 좌측부터 둔가이의 친구인 디자이너, 둔가이, 필자, 통역사 샤샤, 동평 문화간사인 고려인 조 일레나 부부(좌), 둔가이가 필자에게 선물한 말갈족의 집수호 신 '세벤'이다. 나는 이 장승을 고려인 문화쎈타에 기증하고 왔다. 앞으로 문화센터 상설전시장을 만들면 전시할 작품을 동북아평화연대는 지금부터 모으는 중이다(중), 우스리스크의 겨울거리, 길이 온통 빙판이 되어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우). ⓒ프레시안

<동아시아 평화의 신화전>은 하루 더 연기하여 4일간의 전시로 2월24일 끝났다. 짧은 전시이지만 긴 준비 끝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작년 여름 7일간의 답사 여행으로 동방의 신화를 콘텐츠로 세우기 시작했고 드디어 전시까지 해를 넘겨가며 해냈다. 문예진흥기금을 2006년까지 집행해야 했다. 부득이 해를 넘겼지만 기필코 해냈다. 예상했던 만큼 되었으니 만족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적은 예산으로 작품 구입을 못해 주었다. 예산이 너무 초과하는 바람에 일부만 실행하고 몇 달 후에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려 한다. 또 하나는 팜플렛의 러시아 번역문에 오자가 많다는 현지의 지적이었다. 한국인에게 번역을 맡겼는데 역시 이것도 시간에 쫓겨 현지인의 검토를 놓친 결과였다.

아무튼 이번 전시로 '평화의 신화'라는 이미지의 화두를 우스리스크 문화계에 던졌고, 우스리스크는 자연스럽게 신선한 충격이라는 반응으로 수용해 주었다. 그 사이에는 현지 고려인이 있었다. 조 게라심은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많다고 화가로서 의욕을 낸다. 동평 우스리스크 사무국도 처음에는 별 기대를 안 한 작은 전시회로 알았다가 큰 반향에 좋아한다. 동평은 국제미술전의 효과와 의미를 공부한 셈이다. 나는 이제 우스리스크를 떠나야 한다. 1년에 서너 차례 오고가는 곳이지만 헤어지자니 가슴이 저미는 우스리스크다.

잘 있거라 우스리스크야,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 없이 떠난다.
한 마리 작은 새처럼 훌쩍 날아와서 사랑한다는 말도
차마 못하고
침묵 같은 그림으로 대신 말하고 떠나는 구나
추운 겨울,
여인 혼자 지평을 걸어가는 스산한 우스리스크의 밤이여
얼음삽으로 빙판길을 깨며 한나절을 보내는 침묵이 긴 우스리스크의 겨울이여,
검은 외투를 두른 채 정류장에 모여선 시민들아 잘 있어라
늘 그래 왔듯이 떠나면 아쉬움만 남는 곳
이별은 우스리스크의 겨울 저녁처럼 스산한가
그러나, 추운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저 햇살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냐
북핵사태가 풀리고 철도가 한단곶을 이으면 우스리스크의
봄은 갑자기 온다.
화가의 방 예술인들과 함께,
멋을 한 것 뽐내던 러시아 아가씨들과 함께,
평화의 신화전을 준비하던 고려인들과 함께,
조국을 떠나 고려인 촌 자원봉사 하는 한국 청년들과 함께,
미싱공, 벌목공 북한노동자들과 함께
온다.
먼 훗날이 아니다.
조금만 더 참고 준비하자,
우리가 다시 만나 유라시아길이 열리는 날
그 때, 우스리스크 광장에서 동아시아 시민으로 만나서
함께 춤을 추자
우리 함께
동해 바다처럼 푸르른 넓고 깊은 평화의 문화를
신화처럼 만들어 가자
역사는 준비된 상상력의 것
한 마리 작은 새는 깃을 펴 스산한 우스리스크의 먼지를 턴다.
기약하리,
동방의 영혼은 자유가 되어 유라시아의 길을 훨훨 날으리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