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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를 허약한 이상주의자로 키우지 않으려면…"

[민들레 교육 칼럼] 인간은 갈등을 통해 성숙한다

'교육 불가능' 시대라고 합니다.

과열된 입시경쟁,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학교폭력, 공교육을 대체하다시피 팽창해버린 사교육…등. 가르침과 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등수 매기기'에만 골몰하는 교실 풍경은 이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식상할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다들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하곤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현실 진단을 기계적으로 읊조리는 정책 당국자, 학자들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풍경, 그 맞은 편에는 학교폭력, 입시 부담, 혹은 어른들이 짐작하지 못하는 그밖의 어떤 이유로 자살을 고민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치 심각한 문제 앞에서, 어른들은 왜 '뻔한 이야기'만 반복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런 간극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절망스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진짜 필요한 미덕은 '솔직함'일 수 있겠다고 봅니다. 짧은 자기 경험으로 섣부르게 단정짓기보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시작하는 태도 말입니다. 또 근대적인 학교 모델이 이젠 어떤 구조적인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 그리고 그 한계와 모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역시 한계가 있다는 점 역시 솔직히 인정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대안교육 격월간지 <민들레>에 주목한 건 그래서입니다. 지난 1999년 창간된 이 잡지의 시선은 '학교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바뀌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만큼 우리는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자"라는 <민들레>의 목소리가 교육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에 갇혀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의 빈 곳'을 살피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

성숙을 위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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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월간 <민들레> 83호 ⓒ민들레
산행을 하다 보면 나뭇가지에 빨간색, 노란색 리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햇볕에 색이 바래고 비바람에 닳아 너덜너덜한 리본도 적지 않다. 무슨 무슨 산악회 이름이 적혀 있기도 한 이 리본들은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리라. 갈림길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리본들 때문에 숲의 풍광이 망가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다.' '산길의 풍광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치는 서로 배타적이다. 한쪽에 충실하다 보면 다른 한쪽을 소홀하게 된다. 이 딜레마 속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적절히 처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은 이와 비슷한 일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나날이 겪는 수많은 갈등 상황도 이런 일들의 반복이다. 서로 충돌하는 두 가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제대로 살아낼 수 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은 쉽다. '20미터마다 리본을 달 것!' 이 매뉴얼대로 리본을 달다 보니, 길이 너무나 확연해서 헤맬 염려가 전혀 없는 길에도 리본이 줄줄이 달려 있다. 아름다운 숲의 풍광을 망가뜨리면서. 서로 배타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리본을 매다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숲길의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하고, 산행하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예상할 수 있는 심리 파악도 가능해야 한다. 이 자리에 리본을 달지 말지 순간순간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수 있으려면 고도의 정신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질은 누가 일일이 가르쳐서 길러지는 것도 아니다. 가치들이 충돌하는 갈등 상황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훈련과 자기 입장을 스스로 세우는 성숙의 과정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산길에 리본을 매다는 일이야 어쩌면 사소한 일이고, 나쁜 결과라고 해야 풍경이 좀 지저분해지는 것뿐이지만, 성숙하지 못한 결정으로 일을 그르치거나 자연을 망가뜨리거나 나아가 세상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매뉴얼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스스로 느끼고 판단할 수 있으려면 일상에서 충분히 갈등을 겪으면서 자기 입장을 세워가는 상황을 많이 경험해야 한다. 청소년기의 이런 경험은 서로 배타적인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할 줄 아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인 학교, 이상적인 교사, 이상적인 부모가 이상적인 인간을 기를 거라는 환상을 가진다. 하지만 배움과 성숙은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알 수 없는 어떤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지 의도된 인풋에 따른 아웃풋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그래서 교육은, 다만 최선을 다할 따름인, 섣불리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난망한 일이기도 하다). 부모든 교사든 한 사람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영향은 자칫 절대적인 악영향이 되기 십상이다. 부모나 교사의 가치관을 그대로 내면화하거나 또는 청소년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정반대의 가치관을 갖고 그대로 어른이 되기도 한다. 배타적인 가치관을 갖고 성숙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인간의 성장은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한 상황에서 적절히 행동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성숙의 의미이다"라고 말한 우치다 타츠루의 말은 부모와 교사들이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아이의 내면에서 학교와 사회가 갈등을 일으키고, 부모의 목소리와 교사의 목소리가 부딪히는 가운데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조금씩 성숙해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치다 선생은 인류학적 관점에서 부모와 교사의 서로 다른 역할에 대해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적인 연구에서 발견한 규칙은 세계의 모든 사회집단에서 아버지와 삼촌은 사내아이에게 다른 육아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엄격하게 아들을 키우는 사회에서는 삼촌이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고, 아버지와 아들이 친밀한 사회에서는 삼촌이 성가실 정도로 까다로운 역할을 맡습니다. 아버지와 삼촌은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합니다.

사내아이는 동성의 두 명의 어른, 사회적 위신에서 동격인 어른, 즉 성숙의 롤모델이 될 두 명의 어른에게 '다른 것'을 배웁니다. 보통은 한쪽은 '대세에 순응해서 모난 돌이 되지 않기'를 가르칩니다. 다른 한쪽은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 뜻을 꺾지 말고 성취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낫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각각의 전략을 편의상 나누어 구사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이는 그렇게 두 명의 동성의 연장자에게 '살아가는 다른 방식'을 모델로 제시받습니다. 그 구조적 갈등 안에서 성장합니다. 아마도 '삼촌'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에서는 학교와 교사가 필요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저는 교육 제도를 이런 인류사적 흐름에서 이해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민들레 펴냄) 중


부모와 교사가 같은 가치관을 갖고 한목소리를 내고, 모든 교사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 방향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빨간약 또는 파란 약만 내놓고서 아이들이 고민이나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 약만 집어삼키게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자칫 허약한 이상주의자나 얄팍한 실리주의자가 되기 쉽다. 다행히 인간은 그렇게 간단히 길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몸이 약의 독성이나 부작용을 해독할 수 있듯이 정신도 해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아무리 한 가지 약만 먹이고자 해도 세상 일이란 그리 단순하게 풀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파란 약이 공기처럼 흘러다니기에 부지불식간에 약을 섭취하게 된다.

그래서 배움터에서는 빨간 약을 제공할 필요가 있지만, 파란 약을 원천봉쇄하려 들어서는 곤란하다. 인간이 성장하는 데는 파란 약도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약을 주느냐보다 서로 다른 약을 구분하고 어느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때로는 파란 약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때는 그것이 필요한 시기라고 봐야 한다. 빨간 약도 복용을 했다면 그 두 가지 약이 언제 어떻게 섞여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성장은 누구도 예단하기 어려운 저마다의 연금술적인 과정을 거치기에 연금술사들은 그 과정에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결과는 신의 손에 달려 있으니.

배움터는 또 다른 온실이어야

그런 점에서 안정된 대안학교가 꼭 바람직한 교육환경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경제적 환경이나 문화가 비슷한 학생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교사 집단이 모여 있는 대안학교는 삶의 다양성이 거세된 온실 같은 교육 환경일 수 있다. 그런 데서 자라 험한 세상에 나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삶과 하나 된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교육이 또 다른 의미에서 삶과 유리된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공교육 현장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한 데 섞여 있다. 가난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친구를 사귀면서 가난이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고, 친구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삶의 자세를 익힐 수도 있다. 나쁜 친구도 있고 좋은 친구도 있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그때그때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삶의 교육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지역의 학교가 그런 점에서 아이의 성장에 더 건강한 토양이 될 수도 있다. 교사들도 다양해서 늘 시끌시끌한 학교, 그 속에서 삶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교사나 친구를 한 명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아이는 제대로 자라날 것이다. 어쩌면 교사답지 못한 교사도 있는 공교육 현장이 교사다운 교사들만 있는 대안학교보다 더 나은 교육 환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하나같이 함량 미달 교사만 있으면 최악이겠지만, 교사다운 교사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면 그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더 튼실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교사'가 '옳은 교육법'으로 교육하면 아이들은 점점 성숙해진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얕게 이해한 것"이라는 우치다 선생의 말은 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이라면 깊이 새겨볼 말이다. 종종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이런 내가 선생을 해도 될까' 하고 가끔 자괴감을 느끼는 이가 더 좋은 교사일 수 있다는 그의 교사론은 청소년기의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에게는 상당한 위로가 될 것이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의 경우는 사랑이 넘치는 교사, 내면이 분열되지 않는 교사가 더 바람직하겠지만, 분수를 이해하기에 적당한 나이를 11살(4학년)로 보는 아동발달론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바라볼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내면이 분열된 교사도 괜찮은 교사가 될 수 있겠다. 아니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교사들이 섞여 있거나 부모와 교사가 딴소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교가 온실이 되어야 한다는 우치다 선생의 말은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갈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삶의 다양성이 거세된 안온한 온실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곳, 다른 가치관이 지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역설이 살아 있는 그런 곳이 제대로 된 배움터라는 얘기다. 세상에는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손해와 이익을 따질 수 없고 이해(利害) 관계를 넘어선 주고받음을 한 번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면 성숙의 길로 제대로 접어든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이상적인 교사나 이상적인 부모를 말하고, 교육 환경을 이상적으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데는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을까 하는 염려가 거기에 깔려 있다. 하지만 양화들로만 가득 찬 환경이 결코 이상적인 환경인 것은 아니다. 성장이 일어나고 성숙을 이루려면 역동적인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삶이란 것이 본디 죽음과 함께하는 역설적인 과정이듯이 갈등과 긴장은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고독감과 유대감이 다 필요한 것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도 다 도움이 된다. 성숙은 갈등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일어나는 연금술임을 잊지 말자.

* 위의 글은 <민들레>83호에 실린 글입니다. (☞<민들레>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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