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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원과 22억원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41> 중국에서 바라보는 한국 (4)

중국‘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 사태의 진상을 살피기 위해 마다쩡(馬大正)이 주도해 온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등 관계분야의 성과물을 검토해 보니 마다쩡이 총주편(總主編)을 맡은 “중국변강통사총서(中國邊疆通史叢書)”로 여러 권의 책이 나온 가운데 “동북통사(東北通史)”가 있었다. 작년 초에 나온 이 책이 이른바 동북공정 중 역사분야의 출발점으로서 기본지침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을 몇 장 들춰보지 않아도 두 가지 문제점이 바로 드러난다. 하나는 동북공정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널리 일으켜 온 바 패권주의 성향의 중국중심주의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문제는 학술적인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서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서술을 일일이 예거할 필요도 없다.

집필자 20여 명 중 3분의 1이 넘는 숫자가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던 B대학 소속이어서 조선족 작가 류연산 선생에게 물어보니, “그런 학교가 있기는 있습니다” 하면서 웃는다. 연변대학 사학계의 김성호 교수는 동북공정이 물의를 빚은 뒤에야 관계회의에 초청받아 최근 참석한 일이 있다며, 동북사의 진짜 연구자들인 연변대의 역사학자 등은 배제된 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연줄로 연구비를 딴 예가 많다고 한다.

‘공정(工程)’이란 우리가 쓰는 말로 ‘프로젝트’다. 중국에서는 지금 두 가지 ‘동북공정’이 진행중이다. 그 하나는 만주지역의 산업-경제 분야를 재편, 진흥하는 프로젝트로서,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사업이다. ‘3조원’ 운운 하는 사업비는 이와 관련된 것이다. 또 하나가 고구려사 왜곡 등과 관련하여 국내에서 회자되는 연구 프로젝트인데,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주관하는 변강지역 연구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역사를 포함한 여러 분야의 5년간 연구에 인민폐 1천5백만 위엔(한화 약 22억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1천5백만 위엔도 여기서는 적은 돈이 아니다. 3분의 1만 역사 분야에 땡겨온다 하더라도 1년에 1백만 위엔을 쓸 수 있는데, 이곳 연구자의 연봉이 대개 5만원을 넘지 않으니 수십 명을 전업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이다. 이 돈을 바라고 몰려든 연구자들 중에는 모자라는 실력을 넘치는 충성으로 때우려고 ‘민족모순’을 일부러 자극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북공정과 관련, 가장 논란이 된 것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고구려사 왜곡’이다. 근대역사학이 들어온 뒤 중국 학자들에게는 중국의 역사를 부풀려 보려는 경향이 있어 왔고,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金毓黻의 “東北通史”(1941)에서 그 관점을 정리해 놓았는데, 지금의 동북공정에서는 그 관점을 답습하는 수준일 뿐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에 앞세우는 정책 아래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 성향이 억제되어 있다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대중화주의를 들고 나온 동북공정의 역사부문 담당자들은 거센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방향과 서술방향은 대폭 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측의 강력한 항의와 반발이 이 역풍을 촉진하기도 했지만, 이런 류의 대중화주의는 중국의 학계와 사회 내에서도 원래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대중화주의가 의탁한 것은 ‘통일다민족국가’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이다. 중국 정치학자들은 이 이념을 과거로 소급 적용하는 것이 명백한 시대착오이며, 그런 방향의 무리한 시도는 이념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설령 비슷한 이념이 과거에 작용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시의 현실상황 속에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 통시대적인 불변의 원리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대중화주의는 중국 민족정책의 기조에 배치된다는 비판도 받는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각 민족의 전통이 서로 다른 현실을 인정하고 그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 민족간의 모순이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해소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에 속해 있다 하여 역사 속에서도 중국에 속해 있었던 것처럼 억지로 꾸미는 것은 소수민족의 개별성을 말살하여 실질적으로 탄압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지적이다.

동북공정이 일으킨 역사왜곡 문제는 어느 사회에서나 한 모퉁이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의 중국에서는 그 안에서 충분히 수습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일본의 극우파처럼 역사왜곡을 꾸준히 추진할 뚜렷한 주체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사회, 특히 언론과 정치계의 반응은 매우 과잉된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우려를 전달한 애초 정부의 대응이 더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계야 정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향을 감안할 수밖에 없지만, 공익을 위해 움직여야 할 언론의 태도가 참으로 문제다. 우리 언론의 과잉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구비 3조원”의 전설이다. 애초에 산업-경제 분야의 동북공정과 혼동되어 와전된 액수인데, 1천5백만 위엔이라는 정확한 연구비 액수가 밝혀진 뒤에도 ‘3조원’을 근거로 한 논설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를 시정할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3조원이라면 대학교수 10여만 명에게 5년간 봉급을 줄 수 있는 액수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걸러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있었는가 한국 언론계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일전에는 장성민 전 의원의 주장이라 하여 대통령이 조남기 상장을 만났을 때 조선족 문제로 중국을 자극한 것이 역사왜곡 가속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대서특필한 언론도 있다. 양측이 모두 부인할 뿐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을 완전히 소설로 써 놓았다. 정치인의 정략적 술수와 언론의 선정주의 성향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편집인 몇 사람에게 관계기사 편집의 편향성을 지적한 일이 있다. 대개의 반응은 “중국측에 그런 (역사침략의) 의도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또는 “이쪽에서 시끄럽게 해야 저쪽에서도 이쪽 뜻을 받아들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역사침략의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중국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들이 일부 몰지각한 기회주의자들인지, 중국 사회의 주류인지에 따라 우리 사회의 대응은 달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 언론은 중국 사회 주류의 움직임으로 서둘러 단정하고 싶어 한다. 2000년 국가부주석 시절의 후진타오가 동북공정을 “批示”했다는 기사에 접하면 사전도 찾아보지 않고 이것을 “지시사항”이라고 우긴다. ‘批示’는 민간 또는 하급의 기획을 중앙 또는 상급에서 인준한다는 뜻으로, 상급에서 기획하여 하급에 지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국 정계와 언론계의 뜨거운 반응 덕분에 동북공정의 잘못된 방향 시정이 더 재촉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잘된 일이라고 좋아만 할 수 있을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당장은 맞을 수 있지만, 울 일도 없이 뻑하면 우는 아이가 가족과 이웃의 믿음을 받을 수 있는가? 수교한 지 1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서로 내부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이 이번 동북공정 논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오해를 부채질하는 데 몰두한 우리 언론의 역할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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