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1352-1374)은 남긴 서화를 보더라도 당대 특급의 교양인이었다. 그리고 전민변정(田民辨正)과 배원친명(排元親明) 등 시의적절한 정책을 보면 판단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영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 후기는 추문과 혼란으로 얼룩졌고, 그가 비명에 죽은 후 그의 개혁정책은 모두 좌초하고 말았다.
공민왕을 둘러싼 이런저런 추문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그가 의심스러운 추문 속에 몰락한 후 그의 경제개혁과 자주권 확보 정책에 반대하던 기득권층과 부원파(附元派)가 집권한 것을 보면 그의 개혁정책에 대한 저항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의 온갖 추문은 수구파가 자기네 저항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집어씌운 '네거티브 정치'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어도 개혁의 씨앗은 살아남았다. 그가 한미한 출신의 신돈을 앞장세워 개혁을 추진한 것은 기존의 정치권에서 개혁의 주체로 내세울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혁추진을 위해 과거 출신의 신진관료층을 적극 등용했다. 신돈과 공민왕이 사라진 뒤 수구파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고려 정계의 중견세력으로 성장하며 개혁의 주체로 다시 나설 길을 모색하게 된다.
공민왕이 죽은 십여 년 후 최영 세력이 이인임 세력을 축출한 것(1388)은 수구정권의 내부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정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오랜 독재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변화의 조짐이 보임에 따라 개혁 성향 관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 때 이들이 주목한 것이 명문세가 출신의 최영과 대비되는 변방 출신의 무장 이성계였다. 국제정세의 불안정으로 무관의 위상이 극히 높던 이 시점에서 고려의 기존 정치권에 얽혀 있지 않은 이성계는 개혁파 관료들이 가장 믿음을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한낱 쿠데타가 아니라 공민왕의 개혁으로 돌아가는 신호탄이었다. 이색,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 공민왕대에 등용되어 개혁정책에 종사하던 신진관료들이 이성계 등 회군파의 비호와 지원 아래 경제개혁정책의 재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곧 강경파와 온건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진다. 공민왕대 개혁정책의 부활 수준을 바라보는 온건파는 당시 사유재산의 주종인 사전(私田)을 통제는 하되 유지하려 한 반면, 더 나아가 혁명적 변화를 꾀하는 강경파는 사전을 통째로 없애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는 과전법을 추진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경제개혁의 범위를 둘러싼 이 정쟁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온건파는 개혁의 지향성을 저촉하지 않는 한 기존 체제를 최대한 온존하려 하였으므로 개혁에 저항감을 가진 세력도 이에 동조하여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 하였고, 이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 강경파는 20여 년 전 신돈의 개혁을 환영하여 신돈을 성인(聖人)이라 칭송하던 민중의 지지를 결집하며 반대파의 구심점이 된 국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최영 세력을 숙청하며 우왕을 폐한 이듬해에 다시 창왕을 폐한 것은 강경파가 승리한 결과였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붙인 것은 이긴 자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책략이었거니와, 왕실의 먼 지손 정창군을 공양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공양왕 역시 고려 왕조의 지속을 바라는 입장에서 이성계 일파가 추진하는 변화에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색과 정몽주를 필두로 하는 온건파는 1392년 4월 이후 이성계가 부상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동안 강경파 핵심인물들을 체포하고 귀양보내는 등 반격에 나섰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된 뒤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더 이상 없었다. 1390년부터 시행된 과전법은 이리하여 새 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차떼기 정국은 한나라당을 위축시키고 탄핵 정국은 민주당을 몰락시켜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를 가져왔다. 총선의 이런 결과를 가져온 민심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비판을 더 많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을 위한 정권'의 단계를 벗어나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는 정치를 연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에 비견할 의미가 있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 문제가 총선에 이기고 난 뒤 제기되는 것은 '과거 청산'이라는 기존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처리해 낸 결과다.
진짜 정치는 이제부터다. 분배 문제를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하던 수십년간의 '정치 실종' 상황 속에서 누적된 모순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당면한 과제다. 더 이상의 모순 누적을 막으면서 기왕의 모순을 서서히 해소시켜 나가자는 온건론과 모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강경론이 진지하게 맞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대결이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경계할 만한 가르침은 정치적 대결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당시의 온건파는 수구파와 제휴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전복을 초래했고, 강경파는 폭력을 남용함으로써 명분을 훼손했다. 그 결과 내부적으로는 많은 인재가 개혁의 대열에서 이탈했고, 외부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종속도가 심화되었다. 전지구적 경쟁의 세계 속에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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