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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좌파 지식인 폴 스위지 (1910-2004)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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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 좌파 지식인 폴 스위지 (1910-2004) 영면

인간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뜨거운 헌신으로 일관해온 인생 <상>

미 좌파 지식인의 거목 폴 스위지((Paul Marlor Sweezy) 지난 2월 27일 뉴욕주 라치몬트에서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스위지는 약관 32세인 1942년 <자본주의 발달 이론 (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을 펴내고 1940년대 후반에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모리스 돕과 '자본주의 이행 논쟁'을 벌인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 미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9년 월간지 <먼쓸리 리뷰>를 창간, 진보적이고 독립적인 지식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50여년 이상 발행돼 온 <먼쓸리 리뷰>에는 폴 스위지 외에 리오 후버만, 폴 바란, 해리 매그도프, 해리 브레이버만 등 당대의 일급 지식인들이 모여 진보적 운동의 요새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스위지는 독립적이고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미국의 모순과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해 왔던 인물이엇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스위지의 별세 사실은 국내 언론은 물론 미국의 유수한 언론에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오직 <먼쓸리 리뷰>에만 그의 별세 소식이 간단히 전해져 있을 뿐이다. 이에 프레시안은 재미 김민웅 박사의 폴 스위지에 대한 추도의 글을 2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I.

미국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대부 폴 스위지(Paul M. Sweezy)가 지난 2월 27일, 94세를 일기로 영면(永眠)했다. 미국 마르크스주의 운동사에서 그가 차지해온 위치와 역할, 특히 발행부수가 1만부도 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Le Monde Diplomatique)> 못지않게 전 세계적 영향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독립적 좌파 월간지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인이라는 그의 삶이 남긴 궤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50년 이상 그가 꾸준히 갈파하고 치밀하게 분석해온,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성이 보다 심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그가 남긴 지적 유산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게 하고 있다. 근 1세기에 걸친 그의 인생은 인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에 대한 뜨거운 헌신으로 일관해왔고, 이 시대의 모순을 돌파하려는 용기와 양심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들과 세계민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연대의 공간", 즉 이론과 현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왔던 것이다.

***약관 32세에 역작 <자본주의 발달 이론> 출간**

1942년, 폴 스위지는 약관 서른 두살에 <자본주의 발달 이론 (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 부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Marxian Political Economy>을 출간, 그 나이에 이미 뛰어난 이론적 실력을 갖춘 진보적 경제학자로서 고전적 명성을 얻게 된다. 미국 정치의 근본적 혁파를 겨냥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입문서라고 할 이 책의 출간은 자본주의 경제의 끊임없는 발전과 번성에 대한 사회적 신념이 지배하고 있던 미국 사회에 일격을 가한 셈이었다.

또한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달 이론>은 50년대~70년대에 걸쳐 좌파 지식인 세대를 길러내는 책이 되는데 이보다 한 십년 앞선 1934년에 미국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이론가 루이스 코리(Lewis Corey)가 펴낸 <미국 자본주의의 쇠락(The Decline of American Capitalism)> 이후 미국 좌파운동이 얻게 된 귀중한 이론적 성취였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1940년대 당시 미국 좌파 운동권의 일반적 이해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 좌파 운동은 대체적으로 정치와 경제에 대한 총체적 분석, 계급투쟁의 정치적/실천적 의미 등을 치밀하게 밀고나가기보다는 기계적 유물론에 따른 경제주의적 환원론, 즉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심화되어 가면 자본주의 체제는 저절로 붕괴되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깊이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었다. 유럽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따른 수세국면으로만 파악했던 제3인터내셔날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인식은 파시즘 세력에 대한 치열한 투쟁을 어느새 약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굳이 혁명적 방식이 아니고라도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올 수 있다는 견해를 미국 좌파 운동권 내부에 유포시켰다. 이에 반해 폴 스위지는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역사적 의지가 계속 축적, 정치적으로 발휘되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빈곤과 전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소수 특권계급의 이윤과 권력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는 체제 추구**

이와 같은 그의 이론적 좌표는 특권적 소수의 이윤에 봉사하는 체제가 아니라 대다수 인간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체제로 정치경제적 질서의 혁명적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양심을 가진 지식인의 임무라는 자세를 평생을 통해 견지하도록 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가 당시 하바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런던 정치경제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케인즈 연구를 했다는 경력으로도 세간의 이목은 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동부 뉴잉글랜드의 상류계층 출신으로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가 자신의 일신적 안락을 위해 기성질서의 옹호와 유지에 힘을 쏟기보다는, 일부 소수 지배계급의 부와 권력을 위해 빈곤과 착취, 억압과 폭력이 제도화되고 있는 현실에 저항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역할은 단지 연구에 몰두하는 강단학자로서 그치지 않았다. 폴 스위지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지식인의 임무는 현실을 해석하는 것에 있지 않고 현실을 바꾸는 것에 있다"는 신념으로 그의 역사적 헌신의 영역을 정치사회적으로 확대해갔던 것이다.

3선을 했던 루즈벨트 대통령 시기에 한차례 부통령을 지냈고 1944년에는 상무성 장관을 역임한 헨리 월러스(Henry Wallace)가 1948년, 미국 공산당과 연계를 갖지 않은 독립적 좌파세력의 정치조직 진보당(Progressive Party)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폴 스위지는 현실 정치에 뛰어든다. 헨리 월러스는 트루만 정권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하나하나 파괴해나가고 대외정책이 극단적인 반공(Anti-Communism)으로 기울면서 뉴딜 정책 시기에 형성되었던 진보세력과 자유주의세력 간의 대연대가 유지해온 기반이 무너지자 이에 반발, 진보당을 기반으로 대권에 도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월러스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개량주의적 정책비판에 머물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로 패배한다. 이러한 정치상황 앞에서 폴 스위지는 진보세력과 자유주의 세력간의 연대에 기초한 인민전선(Popular Front)적 투쟁방식에 대한 반성과 함께, 보다 근본적인 혁명성을 가진 지식인 연대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매카시즘의 광풍 한 가운데서 <먼쓸리 리뷰> 창간**

바로 이와 같은 배경 아래 태어난 것이 이후 미국의 좌파진영에서 오늘날까지 정파적 차이를 넘어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먼쓸리 리뷰>이다. 폴 스위지의 삶과 <먼쓸리 리뷰>의 반세기 이상의 역사는 서로 떨어뜨려 생각하려야 생각할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된다.

<먼쓸리 리뷰>가 등장하게 된 1949년은 미국의 진보세력에 대한 일대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헨리 월러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보낸 진보당조차도 청문회와 수사대상이 되어가는 상황이었으니 독립적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결집을 내세운 <먼쓸리 리뷰>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 발상자체로서도 무모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각오가 아니면 되지 못할 일이었다.

<먼쓸리 리뷰>를 창간하기 전, 폴 스위지는 1946년 영국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의 <자본주의 발달 연구(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에 대한 이행기 논쟁을 통해 서구 좌파 논쟁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지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명성이 함께 뒷받침 되었기에 <먼쓸리 리뷰>의 창간은 이 시기 하나의 중대사건이었다.

폴 스위지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에는 당시 미국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미국 공산당의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나, 이후 지식인으로서의 독자적 위상을 지키기 위해 정당조직과의 관련을 끊고 이른바 독립적 좌파 운동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먼쓸리 리뷰>는 바로 그러한 그의 운동사적 궤적의 결과이기도 했다. <먼쓸리 리뷰>의 실질적인 출발은, 그 자신 좌파는 아니나 사회적 관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폴 스위지와 하바드 대학 동료교수이자 헨리 월러스 선거운동에도 함께 했고 이미 1935년에 하바드 교수노조 결성에 동지적 연대를 했던, 미국 문학의 권위 매티슨(F.O. Matthiessen)이 예기치 않게 받은 유산을 기증받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독립적 좌파 운동의 주도**

물론 광란의 빨갱이 잡기(redbaiting)로 미국사회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시기의 좌파 월간지 출범과 그 항해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폴 스위지는 1953년 뉴 햄프셔 주 검찰에 소환되어 매카시즘의 공세 속에서 투옥의 위기에 처했었으며, 폴 스위지와 함께 <먼쓸리 리뷰>의 창간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리오 후버만(Leo Huberman 1903-1968) 역시 그보다 앞선 1952년, 의회의 비미국인 활동 청문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소환되어 사상검증의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두 미국 헌법의 언론자유에 대한 조항을 들어 자신들의 발언과 활동, 그리고 책 출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매카시즘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섰다.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헌법정신으로 살아 있는 한 자신들의 생각과 표현이 국가적 질문과 추궁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좌파운동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방어해내었던 것이다.

이들은 미국 공산당의 노선과 활동내용에 동조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시키는 것에도 반기를 들었다. 특히 폴 스위지는 매카시즘이 결국 미국 내 진보세력을 사회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내부적으로는 독점자본과 군사주의세력의 파시즘적 지배 행태를 만들어낼 것을 예견했고, 이는 제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세력을 침묵시키려는 고도의 지배전략임을 갈파했다.

매카시즘의 고조기에 <먼쓸리 리뷰>는 겉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서 발송했어야 했고, 기고자들도 "어느 대학의 사회과학 교수가"라는 식으로 익명의 방식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파 내지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것이 알려질 경우에 가해질 사회적 매장에 대한 지극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등장한 <먼쓸리 리뷰>는 실로 대단히 놀라운 용기를 가진 것이었으며 폴 스위지는 이러한 작업의 선두에 서서 미국 좌파운동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흥미로운 것은, <먼쓸리 리뷰> 창간호에 전 세계적으로 천재와 동일어로 인식되고 있던 아인슈타인이 "어찌해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라는 기고문이 게재됨으로써 진보진영의 영역이 대중적 상식을 넘어선 분야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적 논쟁이 정치적 금기사항으로 강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먼쓸리 리뷰>가 이에 대한 정당한 논의의 장을 펼쳐줄 것을 주문, 맥카시즘의 파고가 좌파 운동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촉구한 것이었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진보적 사회관은 미국 정부 당국을 당혹하게 했는데 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하기 어려웠던 미국 정부는 아인슈타인을 "천진난만한 과학자"정도로만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 프로파간다를 펼쳤고, 이러한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이다. 폴 스위지와 먼쓸리 리뷰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이념적 지배전략과 맞서 싸움으로써 대중들의 역사적 의식을 각성시키고, 좌파 진영의 대중적 위상을 높이는 작업에 진력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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