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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미국을 동경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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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화 속의 미국을 동경함에 대하여

김명훈의 영화, 영어, 그리고 미국 <8> ‘Catch Me If You Can’

"그가 비록 사기꾼이지만 그의 능력을 적절하게 사용하게 하는 미국의 그 체계. 비록 그 능력으로 사고를 쳤더라도, 그 사람 됨됨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FBI 요원. 과연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중략]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능력은 사장되었겠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난 미국이 한없이 부럽다."

인터넷에서 본 'Catch Me If You Can'(2002)에 대한 한 관객의 소감이다. (얼마 전에 '퍼'두었던 것인데 지금 보니 출전이 빠져 있다. 읽는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아마도 이 관객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짧은 범죄자 시절의 낭만 가득한 기승전결 때문에도 그랬겠지만, 영화 속에서 묘사된 미국사회의 '공명정대함' 내지는 '건전함'에 크게 감동했던 것 같다. 범죄자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고 되먹은 사람이라면 그를 어진 손길로 재활시키고, 그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이끌고 지원하는 사회, 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가. 하긴 특수효과의 대가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이 영화가 1960년대의 미국을 자못 순수하고 풍취 있게 그렸기에 이 관객의 반응을 일면 이해할 만도 하다.

1964년. 'Catch Me'(영화쟁이들이 줄여서 부르는 제목)의 주인공인 실존인물 프랭크 애비그네일(Frank W. Abagnaleㆍ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이 17세가 되었던 해이고, 그가 집을 나와 영재 사기꾼으로서의 출사표를 던졌던 해이다.

1948년생인 애비그네일은 이때 자신이 태어난 해를 1938년으로 바꾸고, 졸지에 17세의 고등학생에서 면허증과 유니폼을 모두 빈틈없이 갖춘 27세의 훤칠한 비행기 조종사로 변신한다. 조종사로 변신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지위에 걸맞은 '품위유지'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아울러 수표위조의 전문가가 되고, 만 21세가 되는 해에 프랑스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수백만 달러어치의 위조수표를 뿌리고 다닌다.

이 영화는 물론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는 데에 강한 매력이 있다. 'Catch Me'는 1980년에 애비그네일이 저술한 같은 제목의 '회고록' 을 각색하여 만든 것이다. 원래 애비그네일은 4남매 중 3남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외아들로 나온다든지, 책에서 FBI 수사관 칼 핸래티(톰 행크스 분, 책 속의 실제인물의 이름은 오라일리)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주연 급으로 격상되었다든지 하는, 시나리오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특정 요소들을 조금씩 바꾸거나 과장한 부분만 너그럽게 봐준다면 대체로 원작의 사실적 틀은 유지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도 환상적일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60년대의 미국은 지금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훨씬 순수하고 평온한 사회였다. 지금에 비해 범죄도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부분 집이나 차 문을 잠그지도 않고 다녔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는 것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2차 대전 특수가 낳은 호황이 아직 한창이었고, 사회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요즘에는 눈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여유'가 있었다. 사기꾼으로 변신한 애비그네일은 이 같은 미국사회의 물렁물렁한 틈새에 파고들어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쉽게 믿었고,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그를 집안 식구 대하듯 대접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기꾼으로서의 그의 놀라운 활약상이 설명되지 않는다. 애비그네일의 꿈같은 스토리를 설명하려면 인종을 들먹여야 한다. 그의 대범한 사기행각이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키 크고 잘 생긴 백인남성이었기 때문이다. 회고록을 보면 애비그네일은 15세 때 이미 키가 6피트(183cm)였고, 나이에 비해 매우 어른스러웠다. 그리고 책에 나온 그의 사진과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면, 지금은 나이가 들어 중년의 초라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긴 해도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애비그네일의 모습은 영화 속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과 최소한 분위기상이나마 흡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백인들끼리는 서로 믿고 살았던 60년대의 미국 사회에서, 그렇게 키 크고 잘 생긴 백인 청년이 비행기 조종사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을 때 그 누가 의심을 했겠는가. 그러나 물론 그가 백인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얘기다. 가령 애비그네일과 같은 짓을 흑인이 하고 돌아다녔다면, 그 흑인의 머리회전 속도나 외모를 막론하고 그 결과가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것을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얘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에서 엑스트라들을 포함한 등장인물 수십 명중에 기억나는 흑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던가. 필자의 기억으로는, 영화 중반쯤에 의사를 사칭한 애비그네일이 루이지애나 주의 병원(책에서는 조지아 주)에서 야간 슈퍼바이저를 할 때,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응급실에 신음하며 누워있던 이름 없고 몰골사나운 환자가 이 영화의 한 컷이라도 차지한 유일한 흑인이다. (책에서는 흑인 인물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만 보더라도 'Catch Me'에서 애비그네일에게 희대의 사기꾼으로서 '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그리고 또 잔치가 끝난 후 죄수로 추락한 그에게 다시금 멋진 삶을 살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그 여유롭고 건전한 사회는 '백인의, 백인에 의한, 그리고 백인을 위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애비그네일이 루이지애나 주 병원의 응급실에서 흑인환자의 흉하게 망가진 다리를 보고 나서 관리인실에 숨어 몰래 구토를 하고 있을 무렵, 바로 강 건너의 미시시피 주에서는 백인들이 심심하면 흑인들을 끌어다가 뭇매를 가하고 채찍질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바야흐로 '린칭(lynching)'이 예삿일이었던 시절이다.

이 무렵, 1862년 링컨의 노예해방령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0년이 지난 후에도 폭압적 인종분리가 엄존하고 있는 가운데, 미시시피 주의 한 마을에서 흑인을 포함한 민권운동가 3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두 명의 백인 FBI 요원의 끈질긴 수사 끝에 이들은 KKK 추종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 'Mississippi Burning'(1988)의 줄거리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 역시 1964년. 바로 17세의 백인 협잡꾼 프랭크 애비그네일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쾌한 장단에 맞춰 백인 사회의 풍만한 품속으로 화려한 출정에 나섰던 해이다.

'Catch Me'와 'Mississippi Burning'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작품 모두 시대배경이 60년대인 실화를 다룬 영화라는 것, 그리고 FBI 수사관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에서 끝난다. 두 영화가 묘사하는 미국은 과연 같은 시대의 같은 나라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서로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다. 영화 만드는 이들의 재량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두 영화가 각각 그리는 사회의 분위기는 물론 극중 인종비율에서까지 의아할 정도의 괴리가 있다. (1960년 미국의 흑인인구는 1천8백80만 명, 전체인구의 10퍼센트였다.) 두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같은 땅 위에, 같은 하늘 아래 있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각각 따로 놓고 봤을 때는, 두 영화 모두 상당 부분 사실에 충실한 작품이다. 둘 중 어느 영화도 당시의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단 'Mississippi Burning'의 경우, 억압당하는 흑인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야 할 영화임에도 정작 주인공들은 백인이다. 그러나 이 얘기를 하자면 멍석을 따로 깔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은 다중인격의 나라라는 것, 즉 미국 속에는 인종 별로 제각기 문화ㆍ환경ㆍ 경제적 조건이 다르고, 아울러 이와 무관하지 않게 인과응보 체계까지 다른 여러 개의 미국이 병존한다는 것이다. 'Catch Me'에서 보여주는 배부른 백인들의 미국이 있는가 하면, 'Mississippi Burning'에서 보여주는 짓눌린 흑인들의 미국이 있다. 잘생긴 백인이면 사기꾼도 영웅이 되는 미국이 있는가 하면, 멀쩡한 사람도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때려잡고 나무에 매다는 미국이 있는 것이다.

40년 전 아득한 세월 저편의 이야기라고 하겠는가. 흑인 린칭이라는 만행의 장본인이거나 그 후손도 아닐진대 "그건 옛날 얘기"라며 이를 일축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인간의 심성이 쉽게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하건대 요즘에도 백인들의 미국이 따로 있고, 흑인들의 미국이 따로 있으며, 기타 유색인종들의 미국이 따로 있다. 아니 엄존한다.

맨 위에서 인용한 "미국이 한없이 부럽다"고 한 관객처럼 굳이 한국과 미국을 비교할 때는, 먼저 한국을 대체 어느 미국과 비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터이다. 자신이 태어난 조국을 비하하고 남의 나라를 동경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성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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