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년(광해군 10년) 명나라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만주족의 후금(後金) 정벌에 군대를 보내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독립성은 피차 인정하는 것이었고, 파병 요청은 두 나라 사이 역사를 통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이례적 요청이 나오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20년 전까지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전해 조선이 일본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이것도 두 나라 사이 역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멸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되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명나라에 어떤 도움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명나라의 요구만이 아니라 조선 지배층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이 요구에 응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한명기 교수는 연전에 펴낸 저서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에서 이것이 치밀한 정보수집과 형세판단의 결과라고 평했다. 임진왜란 때 북방을 주유하며 전쟁의 실체를 깊이 경험하고, 또 만주족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요점을 파악한 광해군이 당시 후금 정벌의 무모함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파병을 거절하려 했으나 명나라의 단호한 요구와 신료 대부분의 확고한 명분론을 이기지 못해 이듬해 2월 1만의 병력을 강홍립(姜弘立)의 인솔하에 파병했다. 그러나 불과 십여 일 후 후금군과의 첫 전투에서 명군이 참패를 당할 때 조선군 부대는 후금군에게 전면 투항하고 말았다.
출병에 앞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적극적으로 싸우지 말고 기회를 보아 후금군에게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대개 광해군이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해군 축출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측에서 광해군 축출 후 꺼낸 것이므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광해군이 “목숨 걸고 싸워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도원수로 뽑힌 강홍립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런 짐작을 뒷받침한다. 그는 역관 출신이었다. 명군을 도와 후금군과 싸우려면 역관이 필요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총지휘관을 역관으로 한다는 것은 전투를 지상목적으로 하는 출병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강홍립이 항복한 후 광해군은 그 가족을 처벌하라는 많은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오히려 후금 진중에 있는 강홍립과 연락을 유지했다. 강홍립의 연락 중에는 후금에 관한 요긴한 정보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를 포로로 잡고 있던 후금측이 이 연락을 허용한 것은 자기네에게 유리한 측면이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주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1580년대에 세력을 키워 1589년까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왕을 칭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9월과 1598년 1월 사자를 보내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 제의는 물론 명나라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조선측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만주족의 위상을 드러낸 일이었다.
1617년까지는 명나라의 외곽에서만 세력을 결집하던 만주족이 1618년 초 명의 변방 요충지 무순(撫順)을 공격, 명에 정면 도발함으로써 이 방면의 긴장상태가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천하제국을 구가하던 명은 이 무엄한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만주족의 근거지까지 쫓아들어가 그 뿌리를 뽑겠다고 달려들었다.
1619년 명의 후금 원정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하고 참패한 결과에서 나타나듯 무리한 것이었다. 부패한 정치구조가 ‘천하제국’의 오만을 부추겨 이 무리한 정책을 이끌어낸 것으로 이해된다. 광해군은 참전을 요청하는 명의 국서에 대해 경솔한 출병보다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건의하는 답변을 보내려 하였으나 제후로서 주제넘은 짓이라는 신하들의 만류로 접어두고 말았다. 전쟁 논의가 터져나올 때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은 언제 어디서나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2월 23일 강홍립의 본진이 압록강을 건너 명군과 합류한 뒤 3월 4일 후금군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조선군은 무리한 행군에 허덕이느라 전투태세를 갖추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병 위주의 명군을 위한 작전 일정에 보병 위주의 조선군을 억지로 끼워넣은 탓이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원정에 행군일정까지 무리하게 강요한 결과 조선군 부대는 후금의 악명높은 ‘철기(鐵騎)’의 밥으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동행하던 명군이 궤멸된 후 후금군의 공격에 좌우영이 꺾인 후 조선군 본영은 전투 없이 항복했다. 항복 과정의 묘사도 자료에 따라 다소 엇갈려, 후금군과 사전 내통이 있었는지 여부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후금측은 조선군의 항복을 명군에 비해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항복한 조선군의 일부는 후금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농경에 종사하였다고 하는데, 항복 후 몇 달 동안 탈출해 귀국한 포로가 1,400명에 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제적 통제가 아주 극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금으로서는 명과의 대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조선과의 사이를 원만하게 끌어가고 싶었다. 강홍립은 포로가 된 후 광해군 폐위까지 4년 동안 광해군과 후금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조선과 후금 사이가 악화되어 결국 정묘호란을 맞았을 때는 강화를 주선하고 후금군의 조선 백성 침탈을 규제하도록 애쓰기도 한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었을 때 반정주체들은 인목대비의 교서를 빌려 광해군의 죄악 세 가지를 지적했다. 그 첫째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인륜을 등진 것이며, 둘째는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괴롭힌 것이며, 셋째는 명의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이 1618년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 할 때 많은 신하들은 명분을 내세워 파병을 주장했다. 안팎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군대를 보내면서도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을 막도록 만전을 기했고, 그 결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다. 그러나 그가 명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는 비난은 그의 반대파 속에서 사그러지지 않아 결국 쿠데타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을 쫓아낸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겨우 1천, 그나마 대다수가 오합지졸이었다. 훈련도감의 1만여 정예병력이 반정을 막지 못한 것은 광해군 정권을 수호할 의지를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몰락은 반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지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여론과 상황에 몰린 파병에서 광해군은 나름의 지혜를 썼고 그 지혜가 제대로 효과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반대를 줄이지도 못하고 지지를 늘이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평화에 대한 미국의 도발로 지목되는 이라크사태에 미국을 돕기 위한 파병을 우리 정부가 결정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평화의 파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국민에게도 불행한 일이거니와 노무현 정권에게는 더더욱 불행한 일이다. 이 불행을 북핵사태 해결로조차 보상받지 못한다면 광해군보다 나은 대접을 바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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