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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언현정(破言顯正)의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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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파언현정(破言顯正)의 명진 스님

[기고] 빨갱이(?) 명진스님, "이명박 정부는 '서이독경(鼠耳讀經)'"

I. 제천 북바위산의 큰 소나무

서울은 항상 시끄럽다.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검찰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기소하고, 마침내 재판도 하기 전에 교육감 직위마저 부교육감 대행체제를 만들어 무상급식을 비롯한 모든 교육개혁을 중도에 하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왕재산 사건"으로 <민족 21>을 운영하는 명진 스님마저도 간첩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저 70년대와 80년대의 서슬이 시퍼런 독재와 파쇼 시대에 했던 관행을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이명박 정부와 그 시녀 노릇을 하는 검찰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그래서 월악산 보광암에서 용맹정진으로 불도를 닦고 게시다는 명진 스님을 찾았다. 스님의 시원한 말씀에 실컷 웃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세상과 다시 싸움하기 위해서이다. 스님은 저녁 공양을 하지 않는다는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하고 도착한,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에 스님은 월악산 신륵사 앞에까지 나와 길을 안내해주었다.

▲ 월간 <민족 21> 발행인 명진 스님은 지난 8월 4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안 당국의 수사 및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프레시안(최형락)

봉은사에서 보았던 명진 스님은 마치 연암 박지원의 <호질문(虎叱文)>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충북 제천의 월악산에 있는 보광암에서 본 명진 스님은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본 명진 스님이 아니셨다. 봉은사에서 보았던 명진 스님이 대통령이나 검사 혹은 국회의원과 같은 권력의 핵심을 꾸짖는 호랑이라면, 보광암에서 본 명진 스님은 마치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의 풍상을 겪고 난 후 마침내 작은 나무들의 울타리가 되고 있는 큰 소나무 같았다. 인간 세상에 나가 크게 포효하면서 인간들을 질타하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호랑이가 저런 모습일까? 큰 소나무 혹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듯한 산중의 호랑이가 머물러 있는 보광암도 암자라기보다는 작은 토굴과 같았다. 그 흔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된 길이 아닌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산길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를 잡은 보광암은 해인사나 법주사 혹은 통도사의 큰 절에 속한 작은 암자가 아니라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어느 선비의 공부방처럼 자그마한 토굴이었다.

이튿날 스님과 함께 북바위산을 오르면서 '아, 저것이 명진 스님의 길이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모든 권력을 가진 인간들을 꾸짖거나, 혹은 그들과 맞서 꿋꿋하게 싸우다가도 자연의 나무와 돌 그리고 바람과 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명진 스님의 길'이라는 생각이 바로 북바위산 소나무들 사이에서 내가 깨친 생각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미소와 웃음을 지으면서 산행에서 마주치는 바위와 소나무에 인사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거의 산 중턱에 오르자, 스님은 "이 소나무를 보면 마치 내 인생 같아서 눈물이 흐른다"고 이야기했다. 그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그 바위를 따라 45m를 지나서야 마침내 둥지를 틀고 서서 가지들을 뻗고 있었다. 뿌리의 물길을 찾아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태양을 향해 치솟은 가지들에서 솔 향이 물씬하게 피어올랐다. "소나무는 뿌리와 가지들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명진 스님의 말이었다. 물을 찾아 헤매는 뿌리와 허공에서 자유롭게 뻗어 나가는 가지들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서울의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에서 세상을 꾸짖는 호랑이가 명진 스님이라는 큰 소나무의 가지들이라면, 월악산 산 중턱 보광암에서 나무와 돌 그리고 바람과 물처럼 이곳저곳으로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명진 스님이라는 큰 소나무의 뿌리들인 것이다. 명진 스님과 산행을 마치고 부모님이 계신 충북 괴산의 고향으로 가서 밤새워 <스님은 사춘기>라는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를 읽었다. <호질문>에 등장하는 호랑이이거나 북바위산의 큰 소나무와 같은 명진 스님은 여섯 살 어린이의 모습으로, 중학생이거나 사춘기 소년의 모습으로, 그리고 해인사 혹은 법주사 행자 시절의 모습으로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 여러 모습은 마치 하나같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북바위산을 오르는 보광암의 명진 스님이나 봉은사에서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질타하던 명진 스님과 유사했다. 그것은 스님이 말하는 "내가 갈 길"에서 "다 놓고 그냥 물어라"라는 명진 스님 자신의 말을 스스로 실천하는 실천행의 모습이다.

II. 명진 스님이 보여주는 파언현정(破言顯正)의 길

명진 스님과 북바위산을 오르는 와중에 산행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저분이 명진 스님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명진 스님과의 만남에서 그들은 충주에서 택시 기사 일을 한다고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명진 스님에게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자신들이 이명박 정부, 공안검찰, <조선일보>, 그리고 한나라당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줘서 정말로 "속이 시원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고맙다"고 하거나 "속이 시원하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명진 스님은 오늘날 불교에서 말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몸소 실천하는 큰스님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님이다. 그중에서 인터넷이나 일간 신문에 오르내리는 스님의 말씀은 대체로 "이명박 정부는 선진국을 부르짖다가 나라를 선짓국으로 만들었다"느니, "떡검찰이나 공안검찰이 개들이기 때문에 검찰청 앞에 보신탕집을 내야한다"느니 하는 말처럼 하나같이 언어 이데올로기를 깨는 말이다. 명진 스님을 통하여 우리는 일상적 습관에서 만들어진 선진국이나 검찰 이데올로기를 깰 수 있는 것이다.

▲ 명진스님의 책 <스님은 사춘기> ⓒe.sol 이솔
명진 스님은 <스님은 사춘기>라는 책에서 구도행이거나 스님의 길, 혹은 세상의 이치를 "언어도단처(言語道斷處) 즉, 말 길이 끊어진 자리"이거나 "또한 미개구즉착(未開口卽錯) 곧, 입을 열면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그르치는 것"(<스님은 사춘기이다>, 189쪽)이라고 이야기한다. 언어는 문명의 보고인 동시에 또한 문명의 이데올로기이다. 언어가 문명의 보고인 이유는 훌륭한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철학자들의 말처럼 끊임없이 과거의 언어를 "파언(破言)"하고 새로운 언어를 통한 "현정(顯正)"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언어가 문명의 이데올로기인 이유는 권력이나 지배자 혹은 사이비 학자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언어를 폭력이나 회유 혹은 교육을 통하여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진 스님의 말 속에는 검찰의 권력 이데올로기나 공안 이데올로기, 혹은 이명박 정부의 선진국 이데올로기를 "파언"함과 동시에 보신탕집이나 선짓국처럼 서민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의 새로움을 통한 "현정"이 숨어들어 있는 것이다.

명진 스님은 "파언현정"의 길을 "아는 것을 버리고 '모름'의 세계로 뛰어들어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름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두 참선이다. 모름의 상태는 어떤 판단이나 규정을 짓지 않은 상태이다. 이것만이 옳다고 확신하지 않고 이것이 과연 옳은가 묻는 성찰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모름 그 자체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미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모름의 자리에, 알 수 없는 그 자리에 너와 내가 어디 있으며 늙음과 젊음이 어디 있으며 생과 사가 어디 있는가. 그 자리는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잘못 보는 인식의 틀을 깨버린 자리이고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을 떠난 자리이다."(<스님은 사춘기>, 252쪽)

명진 스님이 봉은사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광암 큰 소나무의 모습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모름 그 자체만 가지고" 인간세상이나 자연세상에서 항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명진 스님의 말씀과 실천행이 "언어도단처" 혹은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을 떠난 자리"가 되는 이유이다.

"언어도단처" 혹은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이 떠난 자리"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깨달음의 원리이고, 신라시대 이후 한국불교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을 구성하는 근본 이치이다. "언어도단처" 혹은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이 떠난 자리"는 또한 서구 유럽 철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통한 "독자적인 사고가 탄생하도록 돕는 일"의 요체이며,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사상을 창출하였으면서도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유럽 근대의 지배자들과 학자들에게 배척당한 스피노자가 "자연(Nature)"이라고 부르는 요체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리 새삼스러울 수도 없는 "언어도단처" 혹은 "모든 이원성과 상대성이 떠난 자리"가 다시 새삼스러워지는 이유는 명진 스님이 그것들을 21세기 대한민국의 삶으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분열과 전쟁에서 벗어나 지구촌 세계가 모두 화합과 상생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오직 이명박 정부와 공안검찰 그리고 조선일보만이 자신들의 권력과 자본만을 위하여 언어 이데올로기를 통한 "분별"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III. 탈근대인, 명진 스님

며칠 전 서울에서 명진 스님을 다시 보았다. 봉은사 호랑이의 모습과 보광암 큰 소나무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단아한 모습이다. 또한 너털웃음과 함께 "우이독경(牛耳讀經)은 너무나도 착하고 착한 소를 모욕하는 것이므로 이명박 정부를 비웃는 서이독경(鼠耳讀經)으로 고사성어를 바꾸어야만 한다"를 시작으로 친일파에서 시작하여 <조선일보>가 끊임없이 권력의 편에 서서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인물들을 모두 좌익이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는 이야기로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정화해주었다. 명진 스님 앞에만 서면 너무나도 웃어서 이분법과 상대성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긴장과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명진 스님이 이야기하는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있다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게 익숙해"져서 "모든 사물을 유무(有無)의 상(相)으로 보도록 익혀온"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업"(<스님은 사춘기>, 256-257쪽)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영문학 비평과 이론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근대성의 이분법과 후기근대성 혹은 말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니고 있는 상대성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주의다 사회주의다, 자본주의다 공산주의다,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의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게 익숙해져서 "모든 사물을 유무의 상으로 보도록 익혀온"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나 후기근대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탈근대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명진 스님은 서양과 동양,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 등등의 모든 이분법과 상대성에서 벗어난 진정한 탈근대인이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일제식민지를 경험한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이분법이나 상대성에서 벗어나는 근대에서 탈근대의 시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길목에서 진정한 탈근대인, 명진 스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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