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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상무' 향한 분노는 왜 대한항공 앞에 멈췄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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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상무' 향한 분노는 왜 대한항공 앞에 멈췄을까

[인권오름] '갑을 관계'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등

'갑을'이 바람을 탔다. 지난달부터 연이어 언론에 보도된 '라면 상무', '빵 사장', '조폭 우유'가 갑을 관계를 도마에 올렸다. '갑을'은 불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이 바람은 평등을 향해 불어가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갑을'의 문제가 몇몇 개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드러나는 듯하다. 영업 사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동영상이 공개된 후 남양유업은 "임직원들의 인성 교육 시스템을 재편"하겠다며 사과했지만 남양유업에 대한 불매운동은 더욱 확산하는 분위기이고, 남양유업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에 걸쳐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7일 국회에서 열린 '재벌·대기업 불공정·횡포 사례 발표회'에서 쏟아져 나온 증언들은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강매, 리베이트 요구 등이 남양유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렸다. (관련 기사 : 수많은 '남양유업'들…"CJ·롯데·한국GM·농심 등 횡포") 민주당은 "도를 넘는 대기업 횡포 근절"을 위해 경제 민주화에 앞장서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바람이 정말 평등을 향하고 있는지 묻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남양유업 김웅 대표(오른쪽 네 번째) 등 임직원들이 '영업 직원 막말 음성 파일'로 불거진 강압적 영업 행위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바람이 멈춘 곳

'라면 상무'는 비행기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한 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기업 임직원'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자만해 '비도덕적 태도'를 보인 것이 분노를 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포스코는 임직원이 더욱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며 반성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갑'이라고 '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은 고객 정보 관리가 허술했던 점을 보완하겠다며 오히려 간접적으로 '라면 상무'에게 사과를 하는 듯 보이고, 정작 폭행을 당해야 했던 여승무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서비스 노동자들이 노동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서비스 이용자들과 맺는 관계에서 '사건'화된다. 그러나 항공기 여승무원들이 '진상 고객'들에게 시달리게 되는 이유는 어떤 고객들이 '진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고객을 맞든 친절해야 하며 행여 불만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권리를, 자본은 고객 불만 건수에 따라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빼앗아 간다. 서비스 노동자들의 진정한 '갑'은 직업이 대기업 임직원인 서비스 이용자가 아니라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이다. 그런데 남양유업 영업 사원의 욕설이 단순히 그가 '진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많은 사람의 바람은 왜 대한항공 앞에서 멈춰 섰을까.

어떤 사건을 해석하는 데에는 개개인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욕설과 폭행에 많은 사람이 분노했던 것은 그만큼 그것이 준 모욕감에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하면 먹고살 만해질 거라는 기대가 납득할 수 없는 '갑'의 요구로 번번이 좌절당할 때, 그것이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항의하고 맞설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 심지어 욕을 듣거나 맞아도 되는 사람인 듯 취급하며 '갑질'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 그것이 우리의 존엄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너무나 잘 안다는 것. 그만큼 불평등이 우리 삶에 깊숙이 스며 있기 때문에 저마다 공감의 계기를 만날 수 있었다는 역설.

그러나 어떤 욕설과 폭행은 사람들의 분노를 그리 일으키지 못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교사가, 가정에서 가부장이, 작업장에서 사장이 퍼붓는 욕설이나 폭행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불평등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공감의 계기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헤아리지 않으면 모습은 바뀔지언정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남양유업 너머를 향하고 있는 분노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항공 앞에서 멈춘 분노는 '있을 수 있는 일'의 경계에 갇혀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는 공정해야 하지만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 경제 민주화 주장도 딱 이 경계에 있다.

불평등의 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박근혜 대통령도 이미 경제 민주화를 주창했다. 그 배경은 두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확신했던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대기업 친화 정책이 불황 극복의 신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을 박근혜 대통령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규제 완화를 하며 대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하지 않아도 이미 대기업들은 충분히 자유롭게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 하청, 파견, 특수고용 등의 형태로 노동력에 대한 책임 없이 노동력을 지배할 구조를 갖추었고 그 사슬을 따라 줄줄이 배치된 다단계 하청 구조의 '사업자'들 역시 대자본의 지배력 아래 단단히 붙들려 있다. 이것은 협박과 강요의 불공정 거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경제 민주화 주장은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기조로 각종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나 횡포를 없애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대기업이 힘을 얻게 되는 지점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대기업의 힘은 그들의 경영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지배력으로부터 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대'기업'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의 문제다. 자본이 노동을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이 커지는 만큼 재벌과 대기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사슬에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가맹점, 대리점 등이 더욱 붙들리게 된다.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힘을 만드는 방식이다. 더욱 값싼 노동을, 더욱 낮은 위험 부담으로, 더욱 폭넓게 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조건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은 더욱 강경하게 진압한다.

우리가 서로 먹여 살리기 위해 필요한 노동들이 자본을 통해서만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관계란 자본의 힘을 벗어날 수 없다. 화물차 운전기사가 운전 일을 하기 위해서는 CJ대한통운과 같은 유통 기업과 계약을 맺어야 한다. 유통 기업은 그를 고용하지 않고 화물차를 빌리도록 하고 오히려 보증금과 수수료 등을 받는다. 이 계약은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운임은커녕 기업에 빚을 지게 만든다. (관련 기사 : "노예 계약 CJ, 우리 그냥 죽으란 건가") 이 억울한 사정을 사회는 '사업자'들 간의 불공정한 계약으로 읽는다. 그러나 갑을 관계는 갑을 '계약'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약 너머에 숨어 있는 갑을 관계가 계약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들의 '을'의 위치는 계약 조건만 공정하게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의 노동이 어떻게 '갑'에 붙들려 있는지, 계약 너머를 보지 않는다면 '갑'의 힘을 겨룰 수 없다.

섣불리 대안을 말하기 전에

'대기업'만 문제 삼을 때 갑을 계약의 당사자인 대기업의 모습은 바꿀 수 있어도 자본의 힘은 꺾을 수 없다. '갑을 관계'가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불평등의 근원과 그 연결 고리들을 직시할 때만 불평등에 맞설 수 있다. 불평등이 어떻게 이토록 뿌리 깊게 우리를 옥죄고 있는지 한두 문장으로 설명할 자신은 없다. 아니, 오히려 한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본은 저 홀로 힘을 갖추어 불평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드는 불평등의 장면들에는 그 힘과 우리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살필 수 있는 힌트들이 있다.

불매운동은 자본에 타격을 줄 수 있다(남양유업 불매운동이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불매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을'인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사지 않을 때 잠시 누릴 수 있는 '갑질'의 힘이기도 하다. 그 위치는 '을'의 위치에 있는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불편을 성토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을'들과 함께하는 마음은 그 위치를 충분히 살피지 않으면 '을'들을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드러날 때 '갑'을 보지 못하고 '갑질'에만 눈을 돌리면 우리는 '을'들을 만날 수 없다.

불평등에 맞선다는 것은 결국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존엄을 이룰 수 있다. 부당한 상황에 맞서기 위해 항의하고 호소하고 힘을 모으고 행동할 수 있다. 불평등은 그것을 가로막는 데에서 힘을 얻는다.

지난달에는 롯데백화점 입점업체 직원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진 직후 롯데백화점은 직원 전체에게 협박에 가까운 입 다물기를 강요했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대법원에서 불법 파견 판정을 받고도 정규직화를 거부하는 자본에 맞서 철탑에 오르고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경찰은 노숙도 허용하지 않겠다며 연행을 해대고 있다. 말하지 못하고 들리지 않는 곳,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을'들의 외침이 들리는지 귀 기울이자. 경제 민주화가 불평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보다는, 힌트를 얻기 위해 우리의 위치를 조금 더 헤아려야 한다. '을'들의 연대는 그렇게 시작될 수 있고, 그때 '갑'의 힘은 사그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 글은 "[인권으로 읽는 세상] '갑을'의 대안이 경제 민주화라고 말하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www.freeuse.or.kr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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