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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로 한국 정치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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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로 한국 정치를 읽다

[모 피디의 그게 모!] 그래도 상대는 호랑이가 아니다

*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뻥도 좀 적당해야지.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설정을 들은 직후의 생각이었다. 호랑이와 소년이 같이 바다에서 표류한다고? 호랑이랑 소년이 친구 되겠네? 호랑이가 심지어 은혜 갚을 기세야. 이죽이죽. 그런데 이안 감독이란다. 본 사람들이 재밌단다. 왜? 호랑이랑 친구돼서? 입체라서?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나의 못된 빈정거림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소년과 호랑이는 구명보트를 타고 277일간 표류한다. 그러나 그동안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환상적이지만 현실적이다. 호랑이가 갑자기 의인화되어 인간다운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영화에서 세밀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그리고 그 묘사는 곧이어 삶과 종교에 대한 풍부한 은유로 관객에게 와 닿는다.

'호랑이와 소년이 구명보트 위에서 같이 살아남기'라는 설정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들을 공존'하게 해놓고 그 과정을 살펴보는 설정이다. 이 은유는 우리의 대선 상황에도 빗댈 수 있다. 대통령 선거란 어느 나라에서나 주력 후보 두셋을 중심으로 모든 복잡한 갈등을 녹여내고 모아서 대결하게끔 하는 판이다. 더욱이 이번처럼 1대1의 대결이 된다면, 모든 사람이 선거의 맥락으로 빨려 들어가 100% 대 100%의 대결을, 선과 악의 대결을 '기대하게' 된다. 구명보트가 대한민국 호라면, 진영에 따라 호랑이와 소년은 다음과 같이 비유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폭스


먼저 소년이 야권인 경우. 호랑이는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보수 세력이다. 친일과 독재, 질곡의 역사 속에서 무서운 힘을 길러온 존재와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소년은 어떻게든 이 호랑이를 다루어 보트가 뒤집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호랑이에게 보트를 내주는 상황에서도.

다음, 소년이 여권인 경우. 호랑이는 대한민국의 민주 진보 세력이다. 스스로 역사가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믿는 존재들. 거대한 파도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옳고 그름을, 굶주림을 외치는 위험한 호랑이. 이 호랑이로부터 소년은 자기가 원래 주인이었던 보트를 빼앗아 와야 한다.

관점을 바꿈에 따라 진영은 사람이 되기도, 짐승이 되기도 한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도저히 져서는 안 되는 짐승을 대상으로 싸우는 인간의 마음에 지지자들은 감정 이입한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후의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상대가 짐승이라면 우리는 대화의 필요가 없다. 길들이거나, 죽이거나. 하지만 정치에서 상대는 사람이다. 상대방을 대화 상대로 인정해야 정치는 시작된다. 갈등을 인정하고 가능한 최대 수준에서 합의를 도출해가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정치는 마치 상대방을 짐승으로 규정하고 싸워가는 소년들의 집합처럼 되었다.

이런 대결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전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현임 대통령의 대응 방식을 기억해본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막힌다. 김대중 대통령의 추도사는 거부된다. 한 자루의 촛불도, 노란 풍선도, 심지어 만장의 대나무조차 불법으로 금지된다. 노제의 진행을 본 연예인은 공영방송의 블랙리스트로 거론된다. 검찰과 언론의 태도가 적절했는가에 대한 공적 반성 대신, 대통령의 자살로 인해 국격이 추락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 사건은 상징적으로, 상대방 진영을 '길들이려다 죽여버린' 꼴이었다. 사람이 짐승 대접을 받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분노해서 외친다. 짐승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야당 의원은 노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죄하라'고 외친다. 거기에 대해서 명예훼손이라며 또 고소가 들어간다. 그렇게 정치는 실종된다. 서로 자신은 인간 소년이라고, 상대는 짐승이라고 생각하는 대결. 짐승과 짐승의 시대. 정치를 혐오해서 시민들이 뽑은 경제 대통령은 아예 정치를 없애버렸다.

다시 영화 이야기. 파이는 호랑이를 길들이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공존을 택한다. 그 공존에서 오는 긴장이 오히려 살아남을 동력을 준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소년은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의사소통을 했다. 그들이 맺은 협정은 우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공존했다. 애초부터 공존하려던 건 아니다. 그저 같이 있었기에 공존의 규칙이 자라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인 채로 험난한 세상에 맞서며, 끊임없이 상대방을 경계하고 조심하며.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식의 대결은 지난 5년 한국의 정치상황이 심화시킨 특별한 감정적 상태이다. 우리는 공존하기로 결정한 후 공존하는 것이 아니다. 공존하지 않기로 했다고 해서 상대를 절멸시키는 행위는 더더욱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은 우리가 인간이기로 한 이상 괴로워도 따져 물으며 세워가야 할 어떤 것이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짐승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파이의 방주' 위에서, 너희도 소년이고, 우리도 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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