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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북한 잇는 철교에 붙은 벽보 보니…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6>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셋째 날 2] 만포철교: 북한의 대외개방, 중국인민지원군의 사전 입북

북한의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알리는 벽보


지안의 고구려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북한의 만포(滿浦)로 통하는 철교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만포라는 지명은 압록강을 오가는 배들이 가득(滿) 몰리는 포구(浦口)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배들이 압록강을 오르내리던 시절, 아마도 압록강 수계에 댐들이 생기기 전에 붙인 이름 같다. 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들고 머물렀다면, 압록강 상하 물류는 물론이고 강 건너 중국과의 교역에서도 만포가 제법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지도상으로 지안과 만포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만포와 연결되는 철교가 있는 곳은 지안에서 외곽으로 좀 떨어진 곳인 듯 했다. 물론 철교가 있는 지점도 지안시의 일부다. 이 철교는 단둥의 압록강 철교와 더불어 북한으로 통하는 압록강 위의 양대 철교 중 하나이다.

▲ 지안과 만포를 잇는 철교. ⓒ황재옥


철교 입구에 들어서니, 철로와 철교를 걷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이 나붙어 있었다. 중국인들과 함께 철교 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우리는 눈이 번쩍 뜨일만한 의미 있는 벽보를 발견하였다. 대단한 내용이 쓰여진 벽보였다. 중국인들은 그냥 지나쳐 갔지만 우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벽보라기보다는 시멘트벽에 페인트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게시판이었다.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을 시행 중이라는 내용이 담긴 벽보였다. 그리고 북·중간의 역사적 사건을 담은 사진들도 함께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그 내용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신(新)중국 건국(1949.10.1) 이후 지안(集安)은 대(對)조선 3대 개항장 중 하나이며, 지안의 압록강 국경 철교는 양국 간 무역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개혁개방(1978.12) 이후 중국의 화학공업 원료, 건축 재료, 플랜트, 전기기계 제품, 생활용품 등이 조선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편 조선의 광산물, 목재 등은 중국 기업들에게 매력적이다. 중‧조(中‧朝) 무역은 상당한 상호보완적 특성이 있다.

근년에 조선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양국 간 경제교류와 협력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지안에서는 1992년부터 조선여행 사업이 개시되었다. (지안의) 압록강 철교는 조선여행의 중요한 통로로서 년 평균 5960명 정도의 관광객을 운송하였다. 그런데 2001년 6월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여행이 최근까지 중단되었었다. 그러다가 2011년 5월 30일에 지안시 인민정부와 조선 자강도 만포군이 조선여행 사업 재개 협정을 체결하였다. 압록강 철교는 조선여행 사업의 중요한 일환으로서 관광운송의 중임을 다시금 맡게 될 것이다.

현재 압록강 철교는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 기지'가 되어 매년마다 시내 각 초‧중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애국주의교육을 받으러 온다."



▲ 지안철교 입구에 붙어있는 벽보. ⓒ황재옥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한 것은 북한이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국의 한 변방도시의 공식 벽보에 공공연하게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북한의 개혁과 개방이 언제 시작될지 너무나도 궁금했었는데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이라는 용어가 이렇게 공공연하게 쓰일 정도라면, 북한이 적어도 작년 6월부터 대외개방을 시작했다는 얘기이다.

비록 시작에 불과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들 "그래-애? 그 동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었단 말이지"하는 눈치였다. 원래 중요한 정보는 중심보다 변두리에서 먼저 새나가고 소문으로 퍼져 나간다는 세상 이치를 떠올리면서, 우리 일행은 북한이 정말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더욱 궁금해 했다.

철교 위에서 보니 강 위쪽으로, 지안에서 만포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자동차와 사람이 다니는 다리가 건설되고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적어도 5년 전에는 그 다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리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벽보에 소개된 최근 북·중관계와 관련해서 다리를 놓기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지안과 만포의 경제적·지리적 위치 때문에 철교와 다리를 통한 북·중간 인적 왕래와 물류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 같다.

이번에 단둥에서 지안까지 오면서 느낀 것은 북한과 중국 사이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북간 왕래와 교류협력은 막혀 있는데 중국과 북한은 왕성하게 교류하고 있는 것이다.

경협 범위와 속도에 대한 북·중간 입장 차

이번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 북·중 경협과 관련된 책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도 최근 북·중경협의 가장 큰 변화는 북한과 중국의 지방정부가 실질적인 협력사업의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지안시와 만포군이 조선여행 사업 재개 협정을 체결했다고 만포철교 벽보에 쓰여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과 북한의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는 사업추진 권한이 제한적이고, 지방정부가 2중 3중의 내부와 외부의 통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예컨대 지안시와 만포군은 면적이 1만 평 정도의 소형 섬인 벌등도에 중국 측과 연결 교량을 건설하고, 관광위락시설을 건설하여 중국 국내관광객을 유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2012년 장성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원자바오는 '나선과 황금평·위화도의 공동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5가지 원칙이 확립'되야 한다고 하면서, 그 중 하나로 지방정부간 긴밀한 협조관계를 마련해야 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북·중경협의 현 수준에 대해 중국 쪽은 좀 불만이 있다고 할까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중국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고 한다. "생각은 많으나 행동은 적고, 협의는 많으나 성사된 것은 없다. 작은 것은 많으나 큰 것은 적고, 실패한 것은 많으나 성공한 것은 적다."

중국식 화법이 잘 드러나는 표현인데, 이는 일단 북·중간에 합의한 국경지역의 교량 건설과 도로 건설 등 인프라 사업, 그리고 몇 몇 국경지역의 광산 사업 등이 아직 초보적 협력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돈이 빨리 안 벌린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북·중간 경협의 속도와 범위 면에서 입장차가 있다는 얘기도 된다.

이런 말이 도는 걸 보면, 중국은 북·중경협을 통해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데 반해 북한은 속도와 시기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향해 다가가는 중국의 적극성은 앞으로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보아 온 항미원조-조중혈맹을 상징하는 조형물의 건립 동향, '사회주의 애국주의'사상교양 강화 등의 움직임이 시사하고 있는 중국의 전방위적인 대북 접근정책이 이러한 전망을 가능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민지원군 선발대의 비밀리 사전 입북(入北) 증거

지안-만포 철교는 양쪽 군인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중간지점에 중국 군인들이 서서 더 이상 못 가게 하는 반면 북한 쪽 군인들은 거리를 좀 두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철교 아래 둔덕에는 군인들이 재배하는 것으로 보이는 텃밭이 있었다. 옥수수와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강 건너는 접경지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규모와 분위기의 북한 마을이었다. 마을이 손에 닿을 듯 지척에 있었다. 어림잡아 철교는 200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10여분 철로 위를 걷고 구경하는 동안 북한 마을에서 사람의 인기척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만포에서는 강에 나와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그저 평온해 보였다.

▲ 지안에서 건설 중인 교량 건너편 북한 마을. ⓒ황재옥

철교를 중간지점까지 걸어보고 돌아 나오다가, 이번에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하여 의외의 자료를 발견하였다. 지안-만포 철교 입구 바로 앞 국경표지석 옆에 서있는 비석에 "1950년 10월 11일 중국인민지원군 선발대가 비밀리에 이곳(지안)을 통해 가장 먼저 조선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단둥의 펑더화이 동상 밑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날짜가 1950년 10월 19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게 객관적인 정설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10월 19일 펑더화이가 이끄는 본진이 북한에 들어가기 8일 전인, 1950년 10월 11일에 이미 선발대가 이 지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중국 인민군의 사전 입북 사실을 나타내는 비석. ⓒ황재옥
지난 10월 11일자에 게재된 세 번째 답사기에서 필자는 중국의 참전 결정은 1950년 10월 2일 이루어졌지만 10월 19일에야 실제 참전이 개시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공군 지원을 간청하는 전문을 보낸 10월 14일까지도 소련은 중국에게 공군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나 지원 약속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11일에 지안에서 참전 선발대가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史實)이 아닐 수 없다.

소련의 공군력 지원을 학수고대하던 중국이 어떤 정보와 판단 하에 군대를 북한에 비밀리에 미리 들여보냈단 말인가? 그것도 저우언라이가 전문을 보내기 3일 전에 말이다. 앞으로 밝혀낼 만한 흥미 있는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애국주의 성격

8월 5일 오후 우리가 걸었던 지안-만포 철교와 그 주변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하고 주목했다. 첫째는 북한의 개혁개방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는 중국인민지원군이 1950년 10월 11일 지안에서 비밀리에 사전 입북을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지안-만포 철교가 지안 시내 초·중등 학생들의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지난 10월 4일자 두 번째 답사기에서 단둥의 압록강 단교 얘기를 하던 중, 중국이 한국전쟁 참전과 관련된 조형물을 자기네 인민들의 '사회주의 애국주의' 사상교육 소재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참전 미군 조각도 미국 시민들의 아메리카니즘 고취에 쓰이는 것 같다고 했다. 허커우 단교와 마오안잉 동상도 '사회주의 애국주의' 사상교육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지안-만포 철교는 아예 지안 시내 초·중등 학생들의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활용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북한의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에 대해 언급한 벽보 말미에 '청소년 애국주의 교육기지'라는 용어가 적혀 있는 것을 본 일행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전쟁 참전 사실이 이렇게 중국 인민들의 정치사상 교육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건성으로 보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장차 더 밀접해질 수밖에 없는 한·중 관계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 외교의 철학적 배경과 민족주의 개념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다른 일행도 "우리의 경우 침략을 많이 당하다보니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민족주의가 저항성을 띠다 보니 애국심도 저항과 극복의 개념으로 인식되고 교육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일본과 대결 시, 일본만큼은 꼭 이겨야 애국자가 되는 것같이 생각들을 한다. 그런데 이에 비해 큰 나라의 민족주의는 팽창성 내지 확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참전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압록강 위의 끊어진 다리들마저 중국 인민들의 애국주의 교육용 자료로 쓰이는 걸 보면서, 그런 이론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이산(白山)의 산천어와 별밤

지안-만포 철교를 보고난 우리는 180km를 더 달려 퉁화를 거쳐 바이산(白山)시까지 갔다.
잘 닦인 도로를 달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타고 가는 자동차의 벨트 하나가 고장이 났다. 에어컨 연결 벨트인지 에어컨이 작동 안 되어 차 안이 좀 더웠다. 지금까지 참으로 먼 길을 달려 온 셈이다. 별 탈이 없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다. 우리가 탄 차는 '현대'에서 생산한 차였다. 중국에서 생산한 차보다 믿음이 가는 것은 우리 기업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바이산시가 주변의 다른 도시들보다 커서 현대 자동차의 부품을 구할 수 있었다. 에어컨도 다시 작동되었다.

바이산(白山)시는 예전에 훈장(渾江)시였다. 훈장시를 흐르는 훈장(渾江)은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며 도읍했다고 전해지는 비류수(沸流水)의 지류이다. 강물이 뿌옇다고 해서 '혼탁한 강'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러나 1994년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 명칭) 가까이 있는 도시라는 의미에서 바이산(白山)이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우리는 바이산시 내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나갔다. 산소가 풍부한 강 상류의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산천어를 맛보기 위해서, 산천어 요리를 잘 한다는 식당으로 갔다. 이제 두만강 쪽으로 가면 산천어를 먹기가 쉽지 않다고 하니 바이산에서는 산천어를 꼭 먹어보자고 별렀던 터이었다. 무산철광 아래 쪽 두만강은 광산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오염되어 있어, 압록강 상류가 산천어를 맛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었다. 자연산이라 가격이 비쌌다. 다른 날의 저녁보다 비용이 많이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잠시 걷기로 하였다. 차도 다니는 길이지만 길은 예상 외로 불빛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얼마나 깜깜했던지 서울 밤하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북두칠성도 보이고 은하수도 보였다. 옛날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그런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별을 헤는 것을 잊은 지 정말 너무 오랜 된 것 같다. 걷는 사람들 바로 가까이에서 반딧불들이 꽁지 불을 밝힌 채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도시생활은 편리하지만 가끔 자연으로,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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