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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론 4인방 그리고 우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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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세계체제론 4인방 그리고 우리의 미래

월러스틴, 프랑크, 아민 그리고 아리기

오는 17일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의 방한 강연에(오후 7시 30분 경희대 평화의 전당, '문명적 전환의 정치학') 앞서 그의 학문세계를 조망하는 3편의 글을 싣습니다. 12일 이광근 박사의 글(월러스틴 세계체계 분석에 대한 비판들: 바로가기), 13일 중앙대 백승욱 교수의 글(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언?: 바로가기)에 이어 14일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의 '월러스틴, 프랑크, 아민, 그리고 아리기'를 싣습니다. 편집자

역사 퀴즈 하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월러스틴과 함께 세계체제론 4인방으로 꼽히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 사미르 아민, 그리고 조바니 아리기는 또 무슨 주장을 했고 그 입장은 뭘까? 서로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그걸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간단한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답을 알면 뭐가 좋은지도 같이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퀴즈 또는 질문 하나 던져본다. 콜럼버스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이 답을 알고 있다면 그 다음 질문은, 그는 어느 도시 출신인가? 너무 쉬운가?

또 다른 질문 하나. 마르코 폴로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느 도시 출신인가?

이게 뭐 그리 의미 있는 질문일까? 그렇다. 왜일까? 우선 답을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나 콜럼버스 모두 이탈리아인이다. 마르코 폴로는 베니스 출신이고, 콜럼버스는 제노아 출신이다. 1270년경 원나라에 당도한 마르코 폴로는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베니스의 상인 자제이고, 몽골이 장악한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따라 중국으로 간다. 마르코 폴로의 개인적 의지와 역사적,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체제가 그의 여정을 가능하게 했다.

거의 200년 뒤, 베니스와 지중해 무역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던 제노아는 지중해 말고 다른 경로를 통해, 당시 베니스가 우위에 있던 아시아와의 무역관계를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하게 된다. 대서양 항로는 그런 제노아의 국가적 고민의 결론이 된다. 콜럼버스는 그와 같은 흐름 위에 존재한 인물이었다. 콜럼버스 역시 하나의 개인인 동시에 그가 딛고 서 있는 체제의 특성이 발휘된 존재였던 것이다.

▲ 왼쪽부터 이매뉴얼 월러스틴, 조바니 아리기, 안드레 군더 크랑크, 사미르 아민. ⓒ프레시안(자료)

이베리아 반도의 선택

그런데 콜럼버스가 손을 잡은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이 아니라 스페인이었다. 애초에 콜럼버스의 선택은 포르투갈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르투갈에게 거부당하자 스페인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왜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에 별반 관심이 없었을까?

지정학으로 보자면,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아프리카 해안과 가깝고 이 해안을 경유해서 당시 아시아 무역의 통로인 인도양에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베니스를 압도하면서 유럽의 맹주가 되고 싶어 했다.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남부지역도 어느새 장악하고 난 후다. 자신감이 넘쳤다.

더군다나 1453년, 이슬람이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오스만 터키를 세우자 지중해 무역은 콘스탄티노플과 특수 관계에 있던 베니스의 독점체제 이외에 다른 지역의 무역권이 심각하게 제약을 받게 된다. 1492년의 콜럼버스 대서양 항해는 이런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중해에 대한 이슬람의 포위망과 베니스의 독점체제가 아니었다면, 지중해 (도시)국가들이 굳이 대서양 항로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일은 절실해질 수 없었다.

세계 체제적 접근은 바로 이런 면모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자, 그 다음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은과 서구 자본주의 그리고 중국

이런 과정을 거쳐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를 장악하게 되고 그곳의 은광을 어마어마하게 채굴해서 유럽에 투입한다. 소위, 은이 풍성해진 결과로 생겨난 '가격 혁명'의 시작이었다. 물건을 살 수 있는 지불수단도 늘어났고, 물건 값도 엄청 싸져서 시장에 사람들이 몰리고 경제는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16세기 유럽의 시장은 확대되고 그에 더해 금융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이걸 통해 아시아 무역을 위한 지불수단이 된 은은 중국의 막대한 수요에 힘입어 유럽과 인도, 그리고 중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나가게 된다. 중국의 은 수요는 라틴 아메리카의 수탈을 가속화시킨다. '은 본위체제의 세계화'라고 할 만 했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노동력과 라틴 아메리카의 자원이 강제적으로 결합되어 서구 자본주의의 토대를 구축했고, 유럽은 당시 세계경제의 주변부적 위치에서 점차 중심적 위치로 그 관계를 역전시키는 변화를 겪게 된다.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쟁투는 단지 유럽 내부의 헤게모니 싸움이 아니라 아시아와의 무역관계에서 보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위상을 점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유럽 자본주의의 확장은 자본축적의 강도 높은 진행을 위한 국민국가 건설의 시기를 거쳐,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했고 이것은 산업화의 역량과 식민지 확보라는 두 가지 조건 위에서 약탈적이고 군사적 성격이 주축이 된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전 지구적으로 성립시켜나갔던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문명사적 변화

월러스틴을 비롯한 프랑크, 아민, 아리기 등은 모두 이러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성립과정과 결과가 전 지구적 불평등을 심화시켜왔고, 이러한 체제의 역사적 한계는 점차 분명해질 것이며 이걸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체제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가 오고 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주목했다.

이러한 인식은 자본주의의 지구적 지배가 그걸 가능하게 한 조건이 소멸해가면서 종식단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르게 된다. 1960년대에 "서구의 지배"에 도전하는 세계적 움직임이 있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 월러스틴이, 1980년대에 겉으로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미국의 헤게모니가 결국 쇠락해갈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의 소산이다.

월러스틴으로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자유주의 체제의 지구적 확산을 가져온 기점이라고 한다면, 1968년 세계적인 학생 혁명과 신좌파 운동은 그런 자유주의의 주도권이 붕괴된 것을 알리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정통성 해체, 반자본주의 운동의 세계적 확산, 탈식민주의 체제의 정치경제적 동력이 보다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6세기 이래 500년의 기간을 거쳐 스페인에서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자본주의 시스템의 패권교체는 이제 단지 패권교체의 과정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변모라고 하는 질적으로 다른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발전이론과 종속이론 그리고 세계체제론

세계 체제론의 이론적 탄생과 그 의미는 그렇다면 무엇일까?

"서구 자본주의는 시장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합해서 근대적 발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니 비서구는 이런 서구 자본주의의 발전경로를 잘 따라 배우면 자유와 풍요를 동시에 얻게 될 것이다." 1960년대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를 비롯한 비서구 지역에 대한 서구 사회과학계의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발전이론'(Development Theory)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유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화는 서구화와 동일한 개념이 되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헤게모니는 당연한 세계적 질서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일차적 비판은 이랬다. "그건 어디까지나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세운 이론이기에 비서구 지역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서구의 경험은 보편적 진실이 되기 어렵다는 반격이었다. 이 논리가 서구의 경험을 어디에서나 적용 가능하도록 보편화한 왜곡된 경험론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지적은 옳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사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세웠다고 하는 '발전이론'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일치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빠져 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 형성과정에서 벌어진 부르주와-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 경제사를 언급하지 않고 있고, 두 번째는 서구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을 기반으로 전개되어온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1960년대 중후반, 라틴 아메리카 좌파 지식인들의 발전이론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한 결과다. 이들은 "무슨 소리냐? 서구 자본주의가 한 대로 했더니 발전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종이 되어 라틴 아메리카는 저발전의 상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발전이론은 제국주의 논리의 새로운 변형일 뿐이다"라고 들고 일어났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저발전의 발전'(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제기한 까닭도 다 이런 맥락의 반영이었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청빈을 강조하는 윤리가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본축적을 가져와 자본주의 발전의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반이 서구에게만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발전이론은 막스 베버의 논리를 연장시킨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비서구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의 내면에서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씨앗을 발견할 도리가 없으니 서구를 선생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부하린-레닌-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세계체제론

서구 자본주의 발전과정에 대한 다른 설명도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수탈이 원천적으로 토대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이러한 관찰과 분석은,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일국적(一國的) 차원에 머물렀다. 주로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사에 초점을 맞춘 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따라서 봉건적 관계의 해체와 부르주아 패권의 지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그의 <정치경제학 기초>(Grundrisse)에서 자본주의의 세계적 연관구조를 밝힐 것을 언급했고, <자본>에서 자본주의는 16세기에 조성된 세계적 틀 위에 전개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맥락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정리하는 지점까지 가지는 못했다. 자본축적의 역사적 전개가 세계적으로 어떤 유기적인 기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갔는지 해명하는 작업은 따라서 그 이후의 시대에 넘겨진 셈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리하는 일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내부에 어떤 구조가 존재하고 있는지, 그것은 과연 지속력이 있는 것인지, 지속력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누가 그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인지를 그로써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자본주의의 형성과정에 대한 명확한 파악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고 그 방향을 기획하는 일에 기본이 되는 것이다.

부하린의 세계자본주의 분석이나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모두 자본주의 발전과정에 대한 부르주아적 해석을 격파해나간 입장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구조를 해명하면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구조를 요구한다고 한 정식은 서구 자본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현실을 명확히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는 자본의 주도권을 지닌 세력의 운동방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자본의 지배대상이 된 지역의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에는 한계를 보였다. 종속론은 이 과제를 감당했다.

1910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를 규정한 프랑스 혁명을 모델로 하면서도, 그 모델의 한계를 극복해나가려 했던 것처럼 종속론은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비서구가 처한 지정학적 입장에서 서구 자본주의체제가 비서구 지역을 구조조정하면서 어떤 고통과 희생이 발생했는지 밝혀나갔다.

세계체제론은 바로 이 종속이론의 토대 위에서 자본의 역학과 그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대상의 관계를 세계적 차원에서 보다 유기적으로 분석해나간 이론의 진화였다.

아프리카와 월러스틴

1930년 미국 태생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본래 아프리카 연구가 전공이었고 이 경험과 연구를 통해 서구 자본주의가 아프리카를 어떻게 유린하면서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로를 확보했는지 깊이 깨우친다. 그의 이론적 기초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과 페르낭 브로델의 세계 자본주의와 문명에 대한 분석, 그리고 종론이론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근대세계체제론>(Modern World System)은 16세기 자본주의 농업경제와 유럽을 하나로 묶어나가는 세계경제체제의 탄생을 기점으로 그것이 어떻게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어갔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중심(core)-반 주변부(semi periphery)-주변부(periphery)'를 구성하는 위계질서이며 이를 통해 노동과 식민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역학이다.

20년 만에 나온 <근대세계체제론> 4권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다루고 있는데, 중도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우월적 지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 자본주의와 식민지 체제가 세계체제로 확고히 다져지는 과정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와 군더 프랑크

독일 태생의 군더 프랑크는 1929년생으로 지난 2005년에 타계했는데,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연구와 경험을 토대로 종속이론의 기반을 다진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시카고 대학에서 신자유주의 논리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밀튼 프리드만을 지도교수로 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프랑크는 바로 이 프리드먼의 시카고 학파가 신자유주의 실험을 도운 피노체트 군부에게 붕괴당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주력한 경제개혁에 참여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유럽으로 피신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네델란드의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는 <세계적 자본축적: 1492년에서 1789년>(World Accumulation: 1492-1789)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초기 단계의 수탈과정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분석해나갔으며, 자유주의 논리 또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격파해나갔다.

그런데 프랑크는 점차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서구 자본주의 분석에 기울었고, 서구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세계체제의 존재는 단지 16세기 이후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기원전 3000년의 고대 세계 문명체계로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는 '세계체제 5000년 이론'을 내세웠다. 다시 말해서 500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해와 분석으로는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논리다.

이러한 입장은 서구 자본주의의 태동 이전에 이미 존재한 아시아의 경제와 이슬람의 체제를 재평가하게 했으며, 세계사에 대한 보다 지구적 차원의 분석과 세계체제론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크는 그의 마지막 저작이 된 <리오리엔트>(Re-Orient)를 통해 중국의 부상과 아시아의 세계체제적 의미를 뚜렷이 부각시켰다.

이러한 그의 기여는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패권적 쟁투의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리기가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Adam Smith in Beijing)>를 통해 미국 자본주의 패권 체제의 성격 분석 이후 중국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에 중대한 자극과 기초가 되었다.

이슬람, 유럽중심주의 그리고 사미르 아민

세계체제론의 서구중심주의 논리에 대해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미르 아민이다. 그는 이집트 태생의 정치경제학자다. 1931년생인 그는 <제국주의와 불평등 발전>(Imperialism and Unequal Development)을 통해 제국주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이슬람의 세계인식에 대한 주목을 요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구 중심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미르 아민의 저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적 차원의 자본축적>(Accumulation on a World Scale)으로서 서구 자본주의가 비서구 지역을 어떻게 "구조조정(Structural Adjustment)"을 해서 자신의 요구에 맞는 변형을 강제화하는지를 밝혀나갔다. 이러한 사미르 아민의 이론은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국제통화기구 IMF나 자유무역협정 FTA 등을 통해 어떻게 비서구지역의 정치경제적 구조를 새로운 방식으로 식민화시키는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조조정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이른바 "단절(De-linking)의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 고립주의를 내세우는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의 의도는 서구 자본주의의 지배구조가 들어설 여지를 최대한 주지 않는 비서구 내부의 정치경제적 의지와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민의 주장과 논리는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의 촉매가 되었으며, FTA의 확산을 저지시키는 과정에서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사미르 아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그의 자본축적의 세계적 차원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청산을 위해 매우 중요한 노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아리기와 "긴 20세기"

사미르 아민과 월러스틴이 생존해 있다면, 프랑크와 함께 지난 2009년 고인이 된 지오바니 아리기는 1937년 이탈리아 태생으로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여 아프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다 월러스틴과 만나 알게 된 사이다. 그는 제국주의의 역학에 대한 분석, 식민주의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월러스틴이 주도한 뉴욕의 페르낭 브로델 연구소에 합류, 세계체제론 발전에 노력했다.

아리기의 저작은 다른 세계체제론자들에 비해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좀 더 분명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1994년의 <긴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를 비롯해서 비벌리 실버와 함께 쓴 <현대세계의 혼란과 협치>(Chaos and Governance in the Modern World System),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남은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가 대표적인 3부작으로 꼽힌다.

<긴 20세기>는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론이 다루지 못한 미국의 패권체제의 성립과정과 그 동요의 구조적 역학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여기서 그는 자본축적의 '초기 단계의 위기'(signal crisis)와 '최종적 단계의 위기'(terminal crisis)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의 금융화가 진행되고 확장되는 것이 자본축적의 성공이 아니라 사실은 투기성의 과도화, 경쟁의 격화, 산업역량의 공동(空洞化)화 현상 등에 의해 자멸적 과정으로 들어가는 사태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논리는 이윤저하라는 자본축적의 위기를 (투기적) 금융자본의 확대로 풀려고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국제금융체제 전체의 혼란과 위기로 연결되어 기존의 패권체제의 교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기의 분석은 오늘날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체제가 처한 현실을 읽어내는데 의미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

이와 같은 20세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현실은 결국 비서구의 주도권 강화로 이어지면서 중국의 세계체제적 의미를 주목하게 한다는 것이 아리기의 <베이징의 아담 스미스>를 쓰게 하는 출발점이다. 서구에 대한 반격이 이렇게 구조화되어가면서 세계체제의 불평등 구조는 일정한 교정압박을 받게 되고,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예견했는데 이는 사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전제로 깔려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浮上)이 가져오는 세계 체제적 변화 또는 패권교체의 과정을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아리기의 저작은 프랑크와 함께 아시아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탈, 불평등,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

총괄해보자면, 서로 간의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월러스틴을 비롯한 프랑크, 아민, 아리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적 연관구조 속에서 태어나고 확대발전했다는 점, 그 과정에서 고강도의 수탈과 착취가 구조화되면서 세계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격이 긴 시간을 통해 진행되면서 기존의 패권질서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대안체제의 구상과 선택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절실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월러스틴은 최근, 지식의 종합적 구성을 위한 인문사회과학의 경계선 소멸 내지는 뛰어넘기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들 모두는 경제학자이면서 역사학자이고 국제정치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이고 그와 동시에 인류학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세계체제의 이해와 분석이 다양한 영역의 지적 축적을 요구하는 동시에, 하나의 학문으로 오늘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의 본질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오늘날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체제 재편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으며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흡수되어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저항과 대안선택의 고민을 하고 있다. 그에 더하여 동아시아 자체의 역사성이 가진 여러 고통과 모순, 그리고 과제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따라서 월러스틴 등의 세계체제론이 펼쳐 보이는 현실에 대한 분석과 아울러 우리 자신의 분석틀과 역사적 이해가 사고의 단위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동아시아 외교사 책이 기껏 해봐야 다섯, 여섯 권 정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세계체제론의 성과와 우리의 역사적 특성, 동아시아 국제사의 문제 등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변화의 전략을 기획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세계체제론이 기본적으로 세계자본주의의 변화와 대안체제를 위한 "총체적 전략의 추구"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세계체제론의 학습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또 하나의 일깨움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분단의 현실을 기점으로 해서 동아시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우리사회의 지적, 정치적 노력이다.

이번 대선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 체제적 차원의 지향점을 생각해보는 기회라는 점도 짚어야 할 것이다. 자본의 문제, 분단의 문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국제적 패권구조를 하나로 엮어 우리의 삶의 기반을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노력은 다른 누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필자 김민웅은 성공회대학 NGO대학원 교수로 있으며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인문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미국의 델라웨어 대학과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세계 정치경제학과 외교사, 정치철학,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했다. 세계체제론, 기독교 사회윤리학 등을 주 전공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문명사를 비롯해서, 동화와 민담을 사회인문과학의 융합적 독법으로 읽어나가는 방식에 대한 강의도 아울러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동화독법>, <보이지 않는 식민지>, <밀실의 제국>, <창세기 이야기>, <자유인의 풍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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