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나에게 있어서 '한국문제' 그 자체인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늘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철학'이기도 했다. 이 책은 2010년 8월 서울에서 출판된 '김대중 자서전'의 번역본으로, 그러한 김대중씨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때로는 조마조마할 정도로 숨김없이 나타나있다. 그 일생의 궤적은 곧 20세기에서 21세기 초에 걸쳐 한반도가 걸어온 역사 그 자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인생역정이며, 가혹한 역사였는가.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 해방, 남북분단, 한국전쟁, 냉전대립, 군사독재, 민주화, 그리고 남북통일을 향한 모색...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러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어떻게 평화를 가져올 것인가, 김대중씨가 일생을 걸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추구해온 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김대중씨가 국제사회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 야당 대통령후보로서 군사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한 때부터였다. 한국에서는 그 후에도 군사독재와 그 흐름을 이어받은 정권이 오랫동안 지속됐으나, 그들 권력도 항상 김대중씨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씨는 항상 한국정치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씨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의, 김대중씨의 말로 표현한다면 '민의'가 있었고, 권력자는 그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의가 언제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그것이 정의일수록 권력이 짓뭉개버리려 하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 속에서 김대중씨의 비범함 중 하나는, 이상을 높게 내걸면서도 발은 항상 땅에 붙이고, 현실에 입각한 이상실현의 수단을 강구했다는 점에 있다.
김대중씨는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자성어를 좋아하여 휘호 등으로 즐겨 썼다. 모든 것을 현실에 기초해서 세상사의 진리를 구한다 라는 것이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가지라고 조언했었다. 결국 같은 뜻으로, 그 취지는 이 책에서도 되풀이되어 나오고 있다.
김대중씨 자신에게 '선비의 문제의식'이란 민주주의, 정의, 평화, 그리고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를 일생을 통해 관철시켜왔다는 것이 이 책에 잘 나타나있다. 한편으로 '장사꾼의 현실감각'도 수시로 발휘되었다. 야당시대, 반정부운동의 선두에 서면서도 과격으로 치닫는 일부 세력에게 "적을 이롭게 할 뿐이다"라고 고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이념과 경력 면에서 물과 기름의 관계만큼 이질적인 숙적 김종필씨와 손을 잡아 인생 마지막의 아슬아슬한 기회를 살렸던 것이다. 높은 이상과 아울러 이러한 현실감각이 없었다면 '사형수에서 대통령으로' 라는 기적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집념과 인내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을 거듭하며 네 번째 도전에서 첫 당선됐다. 대통령도 첫 도전으로부터 26년 걸려, 역시 네 번째 도전에서 당선의 숙원을 달성했던 것이다. 이 사이에 다섯 번에 걸친 죽음의 위기와 6년간의 투옥생활, 십 수년의 연금, 망명생황을 극복했다. 이런 눈이 휘둥그래질 지경의 나날들에 대해 김대중씨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라고 쓰고 있다. 바로 인내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목표를 향한 주도 면밀한 준비이다. 옥중에서 많은 책을 읽고, 50세 넘어서 영어 문법책과 씨름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압도된다. 게다가 나에게는 이 책에 수록된 연설들에 담겨있는 그의 심혈도 실감나게 다가온다.
나는 한국 대통령선거 취재 등으로 몇 번이나 그의 연설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 책에 뜨겁게 그려져 있는1987년 대통령선거 때 서울 보라매공원 연설도 현장에서 지켜봤다. 단지 호소하는 것만이 아닌, 일상사의 비유로 대중의 관심을 모은 뒤 고상한 이상을 알기 쉬운 말로 몇 번이고 설명한다. 청중이 집중력을 잃은 것으로 보이면 엉뚱한 농담으로 폭소를 유발해 일단 긴장을 푼 뒤,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가 청중을 끌어들인다. 연설을 들을 때 그 기교에 혀를 내둘렀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었다. 중요한 연설은 최후의 순간까지 몇 번이고 다시 검토하고, 마음에 드는 원고가 나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고, 때로는 호텔방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쥐어짜낸 것이라는 사실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일본을 향한 메시지에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먼저 김대중씨의 삶을 지탱해온 '실사구시' 정신은 식민지 시대 일본인 교사로부터 감화를 받은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목포상고 시절 유도 교사에게서 들은 이 불변의 진리가 감수성이 풍부했던 김대중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한편 그 시기에 체험한 학교에서의 한국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의 굴욕은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그런 일본은 해방 후에도 김대중씨를 무겁게 짓누른다. 한국에서는 냉전 최전선의 반공체제 아래서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협력했던 친일파 세력이 그대로 온존되어 군사정권과 한 몸을 이루어간다. 한편으로 일본이 당연히 해야 할 과거청산은 모호하게 되어 자신의 납치사건도 한일 양국 정부의 유착구조 속에서 정치적 야합으로 끝나버린다. 그럼에도 김대중씨는 이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감추고,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일본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자세를 보여왔다. 1998년 대통령으로서 일본을 공식방문 했을 때 '미래지향'을 내세워 많은 일본인에게 감명을 준 국회연설은 이런 역사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만년에는 일본의, 특히 젊은 층의 '우경화'에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한국 민주주의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자생적 민주주의'인데 비해 일본 민주주의는 남이 거저 준 것이라는 점에서 그 취약성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일본이 처해있는 상황을 돌아볼 때 이 지적의 울림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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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씨에게 있어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은 분단국가의 정치인으로서 줄곧 스스로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였다. 1970년대 초부터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남북의 격렬한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그것을 관철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는 이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햇볕정책은 그런 시련을 뚫고, 국제냉전의 붕괴와 독일통일의 교훈까지 소화한 위에 다듬어 내놓은 것이었다. 이는 동북아에 잔존한 냉전구조를 해체해가면서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 '민족공동체'를 복원한다는 발상이다.
김대중씨는 한반도의 미래상을 역사적,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다이내믹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4대국. 그 지정학적 위치는 일찍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조선은 대국에 농락당해 멸망했다. 그러나 지금 지식정보사회에서 그런 지정학적 위치는 유리한 조건으로 변했다. 4대국은 절호의 시장이 될 수 있으므로 기회를 잘 살린다면 산업화 시대에 뒤쳐졌던 한국은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여기에 남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이 필수 전제로서 요구된다. 동북아의 평화구조도 반드시 필요하다. 햇볕정책은 그러한 발상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표방한 대북정책 '비핵 개방 3000'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지원을 선행시켜서라도 북한의 경직된 체제를 누그러뜨려 보려는 햇볕정책과는 발상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 김대중씨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을 동족에게 굴욕을 주는 것이며, 미국의 부시 정권이 6년간에 걸쳐 추진하면서 실패로 끝난 정책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라고 까지 단언하고 있다.
김대중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반이 된다. 남북관계는 그 사이 김대중씨가 우려한 대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지난해 서해에서 일어난 천암함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은 이명박 정권의 대북 강경책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점점 더 그 일그러진 체제 속에 틀어박혀 핵에 매달리고 있다. 결과로 보는 한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은 파산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남북간의 현 긴장상태는, 남북간에는 대화 이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거듭 부각시키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김대중씨는 갔지만, 우리에게는 귀중한 유산이 남겨져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평화 구상도'이다. 이 자서전도 그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씨가 모든 것을 걸고 역사 속에서 그려온 이 '구상도'는 지금부터 새롭게 더해질 역사 속에서 반드시 정당하게 평가 받게 될 것이다.
번역작업을 하면서 그 내용 하나하나에 압도당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자서전의 서술형식 자체도 그 중 하나였다. 추상론이나 정서적인 수식어 등은 피하고,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쌓아 올려가는 그 화법은 그야말로 실사구시의 진수였다. 이것을 일본어로 어떻게 살릴까를 항상 염두에 뒀던 것은 공동번역자인 강종헌씨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내용물이 진하면서도 방대하다. 거대한 숲 깊숙이까지 들어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이와나미 출판사의 오카모토 '세카이' 편집장과 후지타씨의 적절하고도 세심한 조언과 협력이 없었다면 숲 속에서 헤매다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번역=이병선)
* 하사바 키요시는 1947년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출생으로 오사카외국어대학 조선어과를 졸업한 후 1971년 아사히신문사에 들어가 사회부 기자, 주간지 <아에라>의 스태프라이터, 서울 지국장, 편집위원 등으로 일했다. 현재 리츠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대중자서전> 외에 임동원 전 장관의 <피스메이커>도 일본어로 번역했다(<남북수뇌회담에의 길> 이와나미쇼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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