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반대입장에 있는 정치인으로서 김 전 대통령의 공과를 돌아보는 이 시리즈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 전 대통령과는 직접적인 인연은 별로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억압당했던 유신체제 하에서 민주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의 강인한 이미지가 뇌리 속에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197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동시대의 젊은 세대들이라면 민주화운동에는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적극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남아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가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 마지막 해인 2002년 16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터라 개인적으로는 김 전 대통령과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굳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찾자면 같은 호남 출신이라는 점과 개인적으로 큰아버지처럼 모셨던 광주출신의 6선 국회의원 정성태 전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야당에서 정치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정성태 전 의원은 구 민주당에서 세 차례나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호남 출신의 야당 중진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신한국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김 전 대통령은 이후 보수성향의 한나라당이 언제나 마주 보아야 하는 커다란 정치적 봉우리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보수세력은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을 가장 큰 가치로 삼으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권 등에는 소극적인, 기득권층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반면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서민경제를 주창하고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구상을 제시하였다.
김 전 대통령이 강조한 정치적 가치는 기존의 틀에 안주하였던 보수 세력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었고 보수진영의 내부혁신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틀에만 안주하였던 한국의 보수 세력에게 민주주의, 서민경제, 한반도평화의 정책구상은 국가경영의 비전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정치적 패러다임이 경쟁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한나라당의 친서민 중도노선도 그 근원을 따지자면 김 전 대통령의 중산층과 서민중시 정책과 유사한 면이 있다. 현재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로 남북관계의 경색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에 구상한 비핵개방 중심의 한반도 평화공존 구상도 크게 보면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공통적인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는 공격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집권 이후 일부 보수진영의 우려와 달리 온건하고 개혁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우리나라 정치 사상 최초의 실질적인 집권세력 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김 전 대통령의 온건하면서도 강력한 개혁적 리더십 때문이다.
▲ 1964년 4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사회적 양극화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외환위기의 극복과정에서 당시 정부는 IMF의 요구를 과도하게 수용하였고 무분별한 금융개방정책으로 우리 금융시장은 무방비 상태로 해외자본에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 중에서 우리나라만큼 국내 금융기관을 해외자본에 무더기로 매각한 국가는 없다고 한다. 알짜배기 기업의 무더기 해외자본 매각, 경기부양을 위해 실시된 과도한 카드론 정책의 부작용은 지금까지도 높은 가계부채와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짙은 그늘로 남아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미명하에 기업들은 종업원들을 마구잡이로 해고함으로써 대량실업이 발생했고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비정규직 문제도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안전판으로 불리는 중산층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사회안전망 확대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중산층 몰락의 위험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국민의 정부가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4대 보험의 전 사업장 확대 적용 등과 같은 복지 정책을 시행한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복지정책이 구조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양극화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국민화합의 정치가 그가 남긴 또 하나의 커다란 유산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적에 대한 보복을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는 국민화합을 제1의 국정지표로 제시하고 반대파들에게 관용의 자세를 취했다. 물론 김 전 대통령의 화합정치는 집권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동교동계의 계파정치로 변질되면서 측근 비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크게 봐서 그의 화해와 단합의 정치는 분열과 반목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혹독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그는 권좌에 올랐을 때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그에게 정치적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면하였고, 자신을 탄압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김 전 대통령이 영호남간의 지역갈등을 봉합하는 지역통합의 정치를 시도한 것도 평가할 만하다. 노태우 정권 인사인 경북 출신의 김중권씨를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을 비롯해 영남 출신 인사들을 집권 초기에 많이 등용했던 것은 그 일환이었다. 그는 영남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지역통합은 성공하지 못했다. 몇몇 상징적인 자리는 영남 출신에게 돌아갔지만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들의 요직은 대부분 호남 출신들이 독점하였고 공기업의 요직도 대부분 호남 출신들로 채워졌다. 과거 정권의 영남 편중에서 호남 편중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영남의 차가운 민심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영남지역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하였다. 영남지역에서는 그의 지역통합 정치를 호남의 영남 공략이라고 인식하였고 김대중 정권은 결국 호남정권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지 못한 것이다.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로서 역사상 최초의 호남출신 대통령이었던 김 전 대통령이 지역통합의 대의명분으로 실질적인 지역탕평 인사정책을 하였다면 영호남의 갈등의 골은 크게 해소됐을 것이다. 그의 지역통합이 실패로 끝난 점은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 2002년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응원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김 대통령의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상은 경직된 남북관계의 개선에 극적인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다만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큰 목표를 갖고 시작된 햇볕정책이 미숙한 추진과정과 남쪽이 제공하는 실속만 챙기는 북한의 태도에 의해 변질되고 악용되어 그 취지가 크게 훼손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고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구상 자체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폐쇄적인 북한 사회를 개방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구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과 초당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공론화 과정을 무시한 점이다. 보수성향의 인물을 초대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던 김 전 대통령이 보수 세력과 사전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마련한 뒤에 본격적인 대북화해 정책을 추진했다면 보수층의 반발은 많이 누그러졌을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극비리에 진행된 데다 이면거래의 논란도 있었고 총선 직전에 발표되어 남북관계를 총선용 기획행사로 이용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햇볕정책의 순수성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남북관계와 관련하여 평생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해온 김 전 대통령이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아무리 남북정상회담을 의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5년의 재임기간 내내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음으로써 인권 대통령의 이미지가 적잖이 손상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재임기간 중 '국가인권위원회'를 신설해 인권사각지대의 해소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김 전 대통령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일관된 목소리를 내면서 햇볕정책을 추진했다면 북한의 인권상황도 어느 정도 개선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과 중에 정치지도자로서의 국제감각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미국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박사였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국제적 감각이 뛰어난 지도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대미 정책에서 김 전 대통령의 이른바 '용미론'(用美論)은 실용주의적 한미동맹의 원칙을 펼치면서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한반도의 평화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용미론은 주한미군의 역할을 동북아의 세력균형추로 확대함으로써 남북관계개선의 주요 걸림돌을 논리적으로 제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가 보수층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상을 나름대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대미정책을 추진하는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한미 간에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림자가 어둡다고 해서 빛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대한 발자취는 한국 정치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국민화합의 정치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존은 그가 한국 정치에 남긴 귀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는 자서전에서 다시 태어나도 정치가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평생의 가치로 삼았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상은 여당인 한나라당에게도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정치적으로 김 전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는 한나라당의 입장에서도 김 전 대통령이 단순한 정치적 맞수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거목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필자 정두언은 1957년 광주 출생으로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 정무장관실, 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등에서 일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맡았으며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전략기획팀장으로 활약했다.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2선 의원으로 현재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국회 기후변화포럼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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