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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진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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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진전 없었다

[김대중을 생각한다]<8> 민주화의 상징, 그러나 제왕적 정치인

정치인 김대중의 삶은 그 자체가 민주화를 향한 현대 한국 정치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가 세 번의 낙선 끝에 보궐선거에서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틀 뒤 5.16 쿠데타가 터졌다는 사실이 상징하듯이 그의 정치적 운명은 출발부터 군부 권위주의 체제와 묘한 인연을 맺고 있다. 특히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박정희에게 패배한 이래 1987년 6.29 선언까지 김대중은 납치 살해 음모와 투옥, 사형 선고, 정치적 망명 등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온갖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군부 권위주의 세력이 사형을 선고했던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된 체제로 완전히 이행되었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정책의 철폐 운동을 이끌어 온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당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적인 정치 변화를 상징했듯이,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대외적으로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과시하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시기적으로 볼 때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외환위기로 인해 기존의 통치 체제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던 때에 이뤄졌다. 박정희 정권 이래 추진되어 온 관료와 재벌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도 경제개발 시대의 종언과 함께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민주화의 심화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인 발전국가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시대적 책무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 승리는 한국 정치 역사에서 최초로 평화적인 수단에 의한 야당으로의 권력 교체를 의미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이전까지는 사실 구 권위주의 세력의 권력 유지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민주화로 인한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충분히 깨닫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집권으로 권력 담당의 주체의 변화가 선거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승자, 패자 구분 없이 모두가 실감하게 되었고, 김대중 집권 10년 후 또 다른 정파 간 권력 교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는 미국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이 민주주의 공고화의 조건으로 든 '두 번의 정권교체라는 시험과정 (two-turnover test)'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김대중의 당선은 단순히 야당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측면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안정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적어도 박정희 정권 시절 이후 호남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국 사회의 주변부(periphery)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경제개발은 경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부산, 울산, 포항, 구미 등의 영남권 공업 도시들이 성장해 갔지만 호남권은 지역적으로 그러한 성장의 과실을 제대로 나눠 갖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후 호남인들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호남인들의 경제적인 소외감은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피해의식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프레시안
그런데 어떤 정치 공동체 내에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항구적 소수파'라고 스스로 인식하는 집단이 존재하는 한 그 사회는 안정적일 수 없다. '항구적인' 소수 세력이라는 것은 현재의 정치구조 속에서는 권력을 장악하거나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자신들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 있는 불공정한 현재의 정치적 경쟁의 틀, 정치 구조를 깨뜨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정치적 경쟁 구조와 권력 배분의 방식에 대한 합의가 유지되고 심화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기본적 합의가 부재하거나 그 효용성에 대한 믿음이 약화될 경우 민주주의는 안정적인 심화의 과정을 밟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김대중의 집권으로 호남인들은 그러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났고 정치적, 경제적인 소외감, 주변부라는 차별감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또 다시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신뢰를 높였고 궁극적으로 한국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집권은, 그가 어떤 업적을 이뤘느냐를 논하기 이전에 집권 자체만으로도, 한국 민주주의가 보다 포용성을 갖고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지역주의를 이용했다는 비판이 끊임 없이 제기되었고, 또 김대중의 정치적 생존에는 호남 지역주의가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대중의 집권은 지역주의로 인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방안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역주의가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김대중의 집권 이전과 이후의 지역주의는 그 의미나 강도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를 되돌아볼 때 아마 많은 이들이 가장 강한 기억을 갖고 있는 정책은 역시 햇볕정책일 것이다.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 입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생각되며, 이 정책의 추진과 함께 이른바 남남갈등이라고 불리는 이념적 대립이 우리 사회에서 격렬하게 부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우리 정치사에서 남북 관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정책이었다. 분단, 특히 한국전쟁 이후 지속되어 온 남북한 간의 군사적 대치와 적대적 대립이 유일한 대안이었던 기존의 인식 틀을 뛰어넘어 남북한의 평화적 공존 가능성을 실제 정책을 통해 보여 주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이후의 세계사적인 탈냉전의 변화가 한반도에도 도달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햇볕정책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모두 '반공'이었다. 민주적 정통성이 부재한 군부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지탱하는 이념적 토대는 반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이념적으로 한국 정치에서 민주화 이후에도 '금기'로 남아 있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인 도전이었고,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평도 이전에 비해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햇볕정책은 단지 북한에 대한 정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내정치적으로도 권위주의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의 극복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 통치자로서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아마 김대중 정부 시기에 이뤄진 의미 있는 정치개혁은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법의 제정일 것 같다. 2000년 제정 당시에는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감사원장, 대법관 등에 대해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규정했지만, 이후 장관, 권력기관의 장 등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이 제도는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국회의 견제력을 상당히 강화했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광복절 연설을 통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을 제안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 정치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정치가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주요 정당들이 서로 상대 정당의 강세 지역에 정치적으로 '침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추진의 동력도 얻지 못한 채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가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한국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한 깊이 있는 정치개혁이 김대중 정부 시기에 이뤄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통치 스타일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의 통치 방식을 반복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 같다. 우선 김대중 대통령의 정당 운영 방식을 예로 들 수 있다. 평화민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이 모두 김대중이 '만든' 정당들이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해가며 새로운 당명을 내걸었지만 사실 당내 구성이나 지지층의 변화는 없는 '외형만의' 새 정당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정당을 사실상 사유화했다. 정당이 하나의 지속성을 가진 조직으로 제도화되지 못하고 정치인 개인의 권력 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던 셈이다. 더욱이 호남 지역의 경우 당의 공천이 사실상 당선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당 총재에 대한 충성심이 정치 생명을 좌우하게 되면서 당내 구성원의 자율성은 극도로 제약되었고 김대중은 이른바 '제왕적 당 총재'가 되었다. 정당 간 권력 교체, 권력에 대한 제도적 견제와 균형, 정책 결정의 참여와 투명성 제고 등 정치체계 전반의 민주화를 위해 애를 썼지만 정작 자신이 이끈 정당 내부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이다.

통치과정에서도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사실 김대중 정부는 일종의 연립정부로 출범했다.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서 김종필의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구성했다. 김종필은 총리가 되었고 자민련은 과학기술부, 환경부, 건설부, 해양수산부, 보건복지부 등 다섯 개 각료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DJP 연합은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 간 연합을 통해 선거 승리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한국 정치에서 보기 드문 권력의 공유라는 정치적 실험을 행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구 시대적인 행태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집권 이후 자민련과의 공조에도 불구하고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어렵게 되자 무소속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까지 빼오는 구태를 반복했다. 또한 자민련이 2000년 총선 이후 17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요건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이 요건을 완화하려고 애쓰다가 한나라당의 반발로 국회가 파행되자 민주당 의원 4명을 자민련에 '꿔주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정치 부패와 관련해서도 이전과 별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게이트'가 터져 나오면서 김대중 대통령과 정부의 권위와 신뢰도를 크게 실추시켰다.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오랜 정치적 탄압을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그의 통치는 소수의 측근에 크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때문에 대통령의 친인척, 측근 등 이른바 '막후세력'과 결탁한 부패가 생겨났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김대중뿐만 아니라 김영삼, 김종필 등 소위 3김이 모두가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정치의 세계는 경쟁자와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김대중에 대해서만 이런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국회 내에서 자파 세력만으로는 소수였다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이 갖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그가 권력 교체를 넘어서 보다 민주적 원칙에 충실한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구태의 정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대중 시대는 두 가지 상이한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구조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 군부 권위주의, 경제적으로 관료 주도의 발전국가라는 과거 시대의 통치 구조를 덮고 민주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통치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시적 의미와는 달리 미시적인 차원에서 그의 통치 방식과 정치문화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제왕적 당 총재이자 제왕적 대통령이었다.

어쩌면 이런 평가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정치적 역정이 상징하듯 민주화 시대를 여는 것까지가 그의 몫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퇴임을 바라보면서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요구가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김대중 이후의 정치지도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필자 강원택은 1961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거쳐 2010년부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 한국정당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정치학회 총무이사,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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