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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간의 단식, 지방자치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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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간의 단식, 지방자치시대를 열다

[김대중을 생각한다]<7> 미스터 지방자치, 김대중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적 부분으로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 정치는 1인 장기 집권, 오랜 기간의 군부 통치 등 독재 정치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이러한 독재와 지방자치제는 항상 대척점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동시에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독재와의 투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야말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하여 오랜 기간 일관된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고 실천한 정치인이 아닌가 싶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꼭 필요했다. 나는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의정활동 전 기간에 걸쳐 싸웠다. 정치인 김대중에게 별명을 붙인다면 '미스터 지방자치'가 제일 어울릴 것도 같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나는 예산 심의가 있을 때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때로는 몇 시간씩 이 문제를 추궁하기도 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도 지자제 실시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라고 회고하였다. 이러한 김 대통령의 회고 내용은 모두 그 때의 역사 기록으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김 대통령은 5·16 군사쿠데타로 지방자치제를 송두리째 뽑아 버린 박정희 군사정부를 상대로 지방자치제의 재실시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6년 11월 28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국무총리를 상대로 "마닐라 정상회담에서 월남의 조속한 지방자치제 실시 권고"를 상기시키면서 지방자치제의 조속한 실시를 촉구하였다. 1967년 12월 17일 예산특별위원회 일문일답에서 국무총리와 내무부 장관을 상대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제기하였으며, 1969년 9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지방재정과 자치 의식도의 취약성을 이유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기피하고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하여 국세의 지방 이양과 국고 보조금 제도의 활용, 그리고 점진적 단계적 실시를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1969년 11월호 사상계에 게재한 '체질개혁론-과감한 자기 개혁만이 살 길이다'에서 지방자치제 실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
"그들은 헌법에 엄연히 규정된 지방자치 실시를 절대로 반대하고 있다. 지방자치가 의회정치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양대 골격(兩大 骨格)은 물론 오늘날 명색이 민주주의 하는 나라에서 지방자치를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인 것이다. 전화(戰火) 속의 월남(越南) 조차도 이를 실시하고 있다. 지방자치의 실시는 주민들의 복지와 자치능력 향상 그리고 지방행정의 공정(公正), 염결(廉潔)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야당의 존립발전을 위해서 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야당 출신의 지방의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 없이는 어떤 법률의 조문 가지고도 지방공무원의 선거개입이나 부정행위를 견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의 희망 없이는 도대체 덕망 있고 유능한 인사를 야당 대열에 끌어 들이는 방도(方途)가 없는 것이다. 부정을 막지 못하고 조직을 강화할 방도를 갖지 못하는 야당이 어떻게 존립 발전할 수 있겠는가?"

이어 1970년 1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70년대의 비젼-대중 민주체제의 구현'에서 이렇게 주창하였다.

"지방자치는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학자 토크빌이 민주주의 발전의 온상(溫床)이라고 격찬했고 단체법 이론으로 이름이 높은 오토 폰 기르케가 '인간의 협동성을 육성하는 기초'라고 갈파한 바 있으며 의회주의와 더불어 민주정치의 양대 골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은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된 지방자치의 실시를 고의로 거부하고 있다. 현 정권은 세법 개정 기타 조치로서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지방재정의 자립문제를 명분으로 내세워 헌법이 규정한 지방자치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밖으로 내세운 명분에 불과하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국민의 정치의식의 성장을 억압하고 행정 만능과 부정선거의 자유를 계속 확보하는 동시에 야당 정치세력이 야당다운 야당으로 발전할 전초기지를 말살하는데 있는 것이다."

"대중의 민주적 권리향상과 국민적 단결을 양립시킬 수 있게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며 지방민의 자치역량과 이익을 개발하고 관권의 부패를 자체적으로 시정케 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지방자치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서 지금 이러한 주장을 다시 반복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지방자치제에 대한 김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1990년 10월 8일 지방자치제 실시 관철을 위한 '단식 투쟁에 들어가며'라는 메시지에서, 그리고 1990년 10월 29일 '단식 투쟁을 마치고'의 기자회견에서도 동일하게 표명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 신민당후보자로서 '지방자치제의 실시'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집권 1년 내에 지방자치제의 실시, 제1차로 시·도 및 시·군의회의 구성, 제2차로 자치단체장의 선출, 단 서울특별시, 부산직할시 및 각 도의 수장은 임명제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중앙과 지방간의 조화와 안정을 유지하겠다"라는 합리적 실천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중앙행정사무와 세금의 대폭적인 지방이양", "수도권의 비대를 해소하기 위하여 행정기구의 과감한 지방분산 단행" 등을 공약으로 밝혔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3선 개헌에 이어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 부칙 제10조는 "이 헌법에 의한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여 지방자치제 논의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긴급조치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행위와 이를 개정·폐지 등을 주장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위반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도록 하였다. 지방자치제의 절대 '암흑시대'였다. 김 대통령 또한 일정 기간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박대통령이 살해된 직후에 라이샤워 교수가 "우선이 지자제 실시입니다. 민주화는 지자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조언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전두환 군사정부에서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연금이 해제된 후 정치활동을 재개하자 김 대통령은 평화민주당의 기본정책, 그리고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등에서 '지방자치제의 전면 조기 실시'를 내세웠다.

노태우 군사정부도 지방자치제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가 여소야대 국회로 구성되자 당시 야3당인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은 공조체제를 형성하여 지방자치제의 온전한 조기 실시에 합의하였다. 5공 청산과 민주화가 당시 정국의 주요 현안이었으며, 민주화 관련하여 지방자치제 실시가 중요한 사항이었다. 1989년 1월 24일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야3당 총재회담에서 "국회에 계류 중인 3당의 지방자치관계법 개정안을 조정, 연내(1989년)에 광역자치단체장 선출을 포함, 지자제가 실시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한 단일안 마련을 위해 3당 정책위의장과 내무위간사로 위원회를 설치한다."라고 합의하였다. 1989년 3월 4일 야3당 총재회담에서 이 공동 단일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함에 따라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이 법률안에 대하여 거부권 행사(再議 要求)를 하면서 민주정의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한 지방자치법 규정대로 1989년 4월 30일 이내 시·군·구 지방의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노태우 군사정부는 결과적으로 지방자치법을 한 차례 위반하였다.

1989년 4월 26일 야3당 총재회담에서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하여 비판이 가해졌으며, 1989년 10월 19일 야3당 총재회담에서 "공동 노력하여 정기국회에서 지자제법을 통과시키기로" 재차 합의하고 1989년 12월 15일 청와대 4자(노태우대통령·김대중·김영삼·김종필총재) 회담을 거쳐 1989년 12월 19일 정기국회 폐회일 오전 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4당 간에 극적인 대타협이 이루어져 국회에서 관계 법률안이 통과되어 공포되었다. 그러나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을 하고 지방자치제 실시와 관련된 모든 합의를 파기하고 법률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다. 이래서 노태우 정부는 지방자치법을 두번째 위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김 대통령은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로서 1990년 10월 8일부터 10월 20일까지 13일간 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면서 목숨을 건 극한 투쟁의 단식을 단행한 것이다. 단식 중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병실을 찾아왔을 때, "나와 김 대표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란 것이 무엇이오. 바로 의회 정치와 지자제가 핵심 아닙니까. 여당으로 가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던 사실을 김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여·야 간 극한 대치 상황에서 정치협상이 다시 이루어져 지방자치제 실시에 관하여 1990년 12월 6일 최종 합의에 도달하였다. 1991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1992년 6월 30일 이내 기초 및 광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불완전하지만 30년 만에 다시 실시되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1992년 6월 30일 이내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자치단체장 선거를 처음부터 실시하지 않으려 하였다. 1992년 1월 10일 노태우 대통령은 단체장 선거를 일방적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하면서 이 문제를 제14대 총선에서 민의를 묻겠다고 하였다. 제14대 총선 결과 민자당은 유효투표 총수의 38.5%로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규정대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실시하지 않아 노태우 대통령은 지방자치법을 세번째 위반하였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 문제로 김대중·김영삼·정주영 정당 대표 간에 협상이 전개되었으나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의 반대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법으로 규정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14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김 대통령은 1995년 제1회 동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전국 순회 유세에서 '지역 등권론(等權論)'을 밝힌 바 있다.

"우리는 그동안 TK 패권주의, PK 패권주의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특정 지역이 모든 권한과 혜택을 독점하고, 나머지 지역은 소외받았습니다. 지역 간의 불균형과 파행이 나라 전체의 발전을 가로 막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6·27 지방선거를 계기로 바로 이러한 지역패권주의는 결정타를 입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로 패권주의가 아닌 등권주의,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으로 대등한 권리를 가진 지방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정부 수립이후 최초로 정상적인 상황에서 여·야 간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는 지방 분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1999년 7월 29일「중앙 행정 권한의 지방이양 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중앙 부처 관장 업무를 지방에 이양하여 자치기반을 확대하였다. 또한, 지역 차별의 희생자였던 김 대통령은 국정운영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의 시·도 예산 배분에 있어서 각 시·도의 불만이 없도록 모든 시·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이를 처리하였다.

자서전에서 김 대통령은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으로써 변화된 지방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지자제 도입으로 우리 사회는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그곳의 주인이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실험은 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부정 선거를 획책할 수 없고 지방이 중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 있게 주민을 위한 행정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청도의 소싸움과 함평의 나비축제 같은 지역 행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주민의 소득 증대에 기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자제 도입의 결과였다. 주민의 투표로 임기가 보장된 일꾼이 어디를 보고 일하겠는가. 당연히 주민들의 눈 높이에 맞춰 지역을 살필 수밖에 없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이전에는 미쳐 상상할 수 없는 긍정적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방자치제가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자치사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지방재정이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등 개선할 부분이 많다. 자치경찰제가 하루 속히 도입되어야 하고, 교육자치가 지방자치와 통합되어야 하며, 지방행정체제 개편이 지방자치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 필자 이상환은 연세대 정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과정 수료 후 1988년 평화민주당 공채 1기 정책전문위원으로 정당 활동을 시작,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입법 관철에 매진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거듭되는 실정법 위반 등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정치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지방자치제 실시와 관련된 정치 합의문서와 국회에 발의한 법률안 등 1차 자료를 중심으로 엮은「지방자치법 이렇게 만들어졌다」를 1995년 출판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부패방지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최근에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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