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굳이 꼽자면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세 번의 간접적 인연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나는 대학시절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이다. 독재정권 시절에 더구나 자식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으니 어느 곳에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여겼던 부모님들은 민가협을 찾았고, 민가협을 통해 야당의 두 지도자인 YS와 DJ를 방문하게 되었다. 석방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늘 두 사람을 비교하며 시원시원하게 약속을 한 사람은 YS였고, 그에 비해 DJ는 속 시원한 답을 주지는 않아서 조금 못미더웠다고 하신다. 근데 사실 돌아보면 그 시절 누가 양심수의 석방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DJ의 태도가 옳은 것이긴 하나 애타는 부모 마음에 비추어 보면 썩 마음에 드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난 선고 받았던 징역형을 한 달 정도만을 남겨 두고 나온 셈이니 DJ의 태도가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 1980년 옥중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두 번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시절, DJ가 찾는 젊은 피 300인이라며 어느 월간지에 제멋대로 만든 명단이 내 이름이 올라간 일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소위 386세대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주력으로 주목받았고, 나이로는 그 세대의 앞머리쯤에 있던 필자도 제멋대로인 그 300인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어차피 정치권 진입에 관심 없던 사람으로서 그러려니 했고 실제로도 DJ가 내게 관심 줄 일은 없었던 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혹시나 DJ와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닌가 하는 눈으로 본 것도 사실이었다. 뭐 특별히 직접적 손해를 끼친 일은 없었으니 딱히 내게 나쁜 일로 기억될 일도 아니지만 그리 즐거운 기억도 아니다.
세 번째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시절 경실련 창립기념 행사에 당시 야당 총재로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시민단체 행사에 찾아 와 축사를 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전이었으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DJ의 축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축사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연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연설을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민추협을 만들어 재야운동 단체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그의 육성은 녹음테이프로 집회 장소에서 울려 나오는 것으로 들어야 했다. 물론 87년의 대통령 선거 연설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설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 갇혀 있던 DJ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고, 대통령 선거 연설 역시 그 내용보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그의 변명으로만 다가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경실련 창립기념행사에서의 그의 축사가 온전히 그의 연설 내용만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행사에서의 정치인의 격려사나 축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저 칭찬과 격려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딱히 그런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어울리는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라 칭찬과 격려 일색의 격려사나 축사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자의 일원으로, 찾아오는 손님 안내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로서는 별반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었고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어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라 남북관계에 대한 소위 비사를 포함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임장관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DJ의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는 데, 정확한 내용은 이제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나 일의 성과를 바라기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가 담긴 것이었다. 임 장관이 전해주는 기도의 내용은 남북관계에 대한 DJ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것이었다.
세 번째는 경실련에서 일하던 시절 경실련 창립기념 행사에 당시 야당 총재로서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시민단체 행사에 찾아 와 축사를 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 전이었으니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DJ의 축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 축사는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연설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연설을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YS와 DJ가 민추협을 만들어 재야운동 단체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던 시절, 거리에 나설 수 없었던 그의 육성은 녹음테이프로 집회 장소에서 울려 나오는 것으로 들어야 했다. 물론 87년의 대통령 선거 연설도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연설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 갇혀 있던 DJ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던 시절이었고, 대통령 선거 연설 역시 그 내용보다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그의 변명으로만 다가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내게는 경실련 창립기념행사에서의 그의 축사가 온전히 그의 연설 내용만으로 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행사에서의 정치인의 격려사나 축사가 대개 그렇듯이 그저 칭찬과 격려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쩌면 딱히 그런 자리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리 어울리는 일은 아니기도 할 것이라 칭찬과 격려 일색의 격려사나 축사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사 진행자의 일원으로, 찾아오는 손님 안내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로서는 별반 귀 기울여 들을 이유가 없었고 그리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이란 무엇인가? 첫째..' 이러는 순간 자연스레 귀를 열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하는 순간,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나름 자기의 논리적 생각을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이 그저 그런 내용이라면 더 듣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고, 혹 그리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나마 있던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기대를 접으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게 되었다. 그의 축사는 내내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철학과 구체적 견해가 잘 정돈된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의 말은 시민운동에 대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을 단순한 정치인으로 보지 않게 된 시작이었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왜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중요한가? 시민운동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첫째, 둘째 하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에 감사하다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거나 자발적인 시민들의 노력이 지금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대의나 명분으로만 대중경제론이나 남북관계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느 정치인들에 비해 참 영악하게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잘 만들어 가는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DJ가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에 어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공식적인 자리라 남북관계에 대한 소위 비사를 포함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임장관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전의 이야기인데,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DJ의 남북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는 데, 정확한 내용은 이제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나 일의 성과를 바라기보다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염원하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가 담긴 것이었다. 임 장관이 전해주는 기도의 내용은 남북관계에 대한 DJ의 진정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해 준 것이었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손을 마주잡고 있다. ⓒ김대중도서관 |
묘하게도 지금의 이명박 정부를 견주어 보면 오히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모습이 어떤 사회였나를 알게 해 준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펼치는 국정운영이란 거의 상거래 과정의 모습이 오버랩 되지, 정상적인 정치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본래 의미의 정치도 정책집행도 또 진정성 있는 소신도 아니라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노정했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름의 철학에 기초한 정치와 정책 집행을 시도한 것이라는 점이 새삼 느껴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같은 정치와 정책집행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대증적 처방이 아니라 일관되게 지녀온 자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진정성이 바탕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역설을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그리 많이 들어 보지 않았던 그의 연설이지만 나는 그가 '분석적'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정치한 정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그저 '좋은 일이죠'를 넘어서 시민운동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진보적 가치라는 지형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정치는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했다. DJP연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정치가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지금의 연합정치의 본격적 시동도 그가 건 셈이었다. 본격적 의미의 연합정치였는가는 논란이 있는, 거대 정치세력들의 수장들의 합의에 의한,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논의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결정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연합정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숙련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연합정치를 담론화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적으로 그의 필요와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까?
김대중, 그리 많이 들어 보지 않았던 그의 연설이지만 나는 그가 '분석적'이라고 느낀다. 그만큼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들고 정치한 정책을 만들려는 노력을 한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대한 그의 견해 역시 그저 '좋은 일이죠'를 넘어서 시민운동이 갖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의 분석은 진보적 가치라는 지형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물론 그의 정치는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했다. DJP연합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정치가 보수적 지형 아래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지금의 연합정치의 본격적 시동도 그가 건 셈이었다. 본격적 의미의 연합정치였는가는 논란이 있는, 거대 정치세력들의 수장들의 합의에 의한,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논의가 원천적으로 배제되고 그 결정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연합정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숙련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연합정치를 담론화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물적으로 그의 필요와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까?
이런 점들이 내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가깝게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또한 그의 이런 태도들이 과거에 내가 생각해 왔듯 단순하게 권력욕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지만, 돌아보면 앞서 말한 여러 지점에서 그러나 그가 보여준 가치와 그에 대한 그의 진정성은 그의 정치적 결정과 태도들이 단지 권력을 위한 명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 필자 하승창은 주욱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으로 인생을 살았다. 잠시 방송계에도 들락거린 적이 있고, <하승창의 NGO이야기>란 책을 낸 적도 있다. 지금은 대안적 논의를 위한 플랫폼으로 '씽크카페'를 만들고 또 돕는 일을 하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었다는 것은 나라의 축복이다. 단지 노벨평화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진영의 신문들은 우리 정치의 거목이 정계를 은퇴했다며 추켜세웠다. 무엇보다 그로 하여금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확실히 못을 박아두고 싶은 마음들이 앞선 것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우리 정치를 설명할 때 3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 구분일 정도로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위치는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다. 그러나 그런 구분과 구분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란은 학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뒤늦게 알게 된,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기의 정치에 대한 확신과 치열한 고뇌를 가진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며,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시민단체들이 그의 장례식에서 마련한 추모집회의 사회를 기쁘게 본 이유기도 하다.
본래 정치를 하려고 했던 목표와 이유는 팽개쳐 놓은 채 권력만을 위해 이합집산하고 삼국지 전략 짜듯, 혹은 장사치 장사하듯 정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정치인들 속에서 국민들이 바라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하고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정치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김대중 이라는 정치인은 훌륭한 전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를 돌아보며 그를 넘어서는 정치인이 나오게 될 때 한국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김대중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다.
* 필자 하승창은 주욱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으로 인생을 살았다. 잠시 방송계에도 들락거린 적이 있고, <하승창의 NGO이야기>란 책을 낸 적도 있다. 지금은 대안적 논의를 위한 플랫폼으로 '씽크카페'를 만들고 또 돕는 일을 하고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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