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 명예회장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를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던 제철산업을 일으킨 업적은 한국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이다.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포항제철(현 포스코) 임직원이 모두 바닷가에서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겠다는 각오로 일하자던 '우향우' 정신을, 고인은 종종 강조했다. 포항제철의 성공, 이를 뒷받침한 저돌적인 추진력, 그로 인한 빛과 그림자는 개발연대 한국경제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런 상징성은 고인이 대권 후보 반열에 오르게끔 하는 정치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은 고도 성장기의 경험에만 머무르는 고루한 보수가 아니었다.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1988년, <한겨레> 창간호에 대기업으로는 드물게 광고를 낸 것도 고인이 이끌던 포항제철이었다.
'민주 세력'과의 인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인이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잡으면서 이룬 DJT 연대는 1997년 수평적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한 바탕이 됐다. 산업화의 상징인 고인이 참가한 DJT 연대는 민주투사였던 김 전 대통령에게 쏟아진 색깔론 공세를 결정적으로 무력화 했다.
▲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뉴시스 |
한국전쟁을 거치며 박태준은 무공훈장을 3개나 받으며 군인으로서 굵은 족적을 남겼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고인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라는 신념을 품게 됐다고 종종 회고했다.
'천생 군인'이었던 고인이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 첫 계기는 부인과의 만남이었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부인 정옥자 씨가 고인에게 건넨 첫 선물이 <경제학 원론>이었다고 한다. 군부 엘리트였던 고인은 5·16 군사쿠데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인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두터웠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 고인에게 가족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고인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참여했다. 이후 고인은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며 기업인으로 변신했고, 1968년에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됐다.
기업 경영 경험이 없었던 고인이 곧장 사장이 된 것이 독재자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인이 이끈 포항제철에는 이런 인연이 순기능을 한 것도 사실이다. 포항제철을 향한 권력층의 이권 개입을 끊어내는 데 고인과 박 전 대통령의 관계가 요긴하게 쓰였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성공 배경에 고인의 추진력과 현장 중시 리더십이 있었다는 점은, 고인에 대한 비판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한국의 칼텍'을 표방하는 포항공과대학(현 포스텍)을 설립해서 성공적으로 키워낸 일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사립대학의 설립과 운영과정에서 늘 따르기 마련인 잡음과 비리는, 포스텍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거의 없었다.
하지만 '군인 출신'으로 독재자와 가까웠다는 점은 '경영인 박태준'에게 결국 한계였다. 문민정부 출범을 앞두고 고인은 포항제철 회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사퇴서를 제출했다. 당시 고인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해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고인은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원을 받은 혐의를 받아서 한동안 외국을 떠돌기도 했다.
1997년에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DJT연대를 통해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가 됐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그러나 포스코, 포스텍이 있는 한, 고인의 이름에는 늘 명예가 함께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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