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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이 안전해?…99년 서울대 실험실 폭발 사고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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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이 안전해?…99년 서울대 실험실 폭발 사고를 보라"

[기자의 눈] <조선일보> 김창균 칼럼에 답한다

기자들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뭘까. 아마 "기사 잘 봤다" 일게다. 마침,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기자의 기사를 제목 그대로 소개했다. 반가운 일이다.

30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칼럼 "原電에 어른거리는 광우병 그림자"는 <프레시안>의 최근 기사들을 제목 그대로 인용했다. 지난 18일 게재된 "'물리학 박사' 메르켈, MB보다 몰라서 원전 중단시켰을까?"라는 기사도 그 중 하나다.

"수요 줄어드는 원전 시장에서 성장 동력 찾는다?"

기자가 쓴 기사가 주로 겨냥한 것은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 문제였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참사 이후, 각국 정부는 원전 건설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설령 기존의 건설 계획을 철회하진 않는다고 해도, 원전을 추가 건설하는 쪽으로 결정이 나긴 쉽지 않을 게다.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가진 나라에서 벌어진 원전 사고가 전 세계 언론으로 실시간 중계됐다. 원전을 새로 지으려면,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원전 건설 수요가 줄어든다는 뜻이 된다.

원전 시장은 아주 독특한 시장이다. 소비자가 정부 또는 공기업이다. 이들의 구매 행태는, 당연히 보통의 소비자들과 다르다.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아주 신중하게 구매 결정을 내린다. 또 정치적 변수가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이런 시장에서 수요가 줄어들면, 그 추세는 잘 바뀌지 않는다. 여느 소비재처럼 마케팅을 통해 시장을 키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명박 정부의 원전 정책은, 이처럼 수요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이 경제 원리와 거리가 있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사겠다는(수입) 사람이 있어야 팔 수 있는 것(수출) 아닌가. 이 기사는 원래 이런 메시지를 전하려던 것이다. 다만 원전 수요가 줄어든 원인이 결국 안전성 문제 때문이고, 이에 대해 독일 정부가 주목할 만한 결정을 내렸기에 기사 말미에 메르켈 독일 총리를 언급했다.

독일은 칸트와 헤겔의 나라인 동시에,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고향이다. 인류 지성사의 최전방에서 과학기술 연구를 개척해 왔던 독일 정부의 원전 정책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장기적으로 원전 수요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 원전 수출을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이 미덥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위원은 기자의 기사가 원전 안전성 문제를 겨냥한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조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필자의 의도대로만 읽히는 글은, 세상에 없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글 쓰는 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김 위원이 <프레시안> 기사를 어떤 식으로 이해했건, 그의 자유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조선>이 혐오하는 정권에선 반핵 목소리 줄어들까?…'부안 사태'를 보라"

다만, 김 위원의 칼럼에서 "이런 전문가 의견도 원폭 피해자의 참혹한 사진 한 장 들이대면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라는 대목은 유감이다. 김 위원은 원전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중의 말초적 정서에 영합하는 자극적인 선동쯤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이 대통령은 원전 논란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정치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또 원전에 대한 공격은 국민의 시청각을 자극하며 입체적으로 진행되는데 정부 대응은 홍보자료를 줄줄 읽는 식"이라는 대목 역시 유감이다. 김 위원은 원전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오로지 '정권에 대한 공격'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듯하다.

하지만 원전 안전성은 이처럼 좁은 틀에서만 이해하기엔 너무 큰 문제다. 설령 기자와 정치적 입장이 똑같은 정부라고 해도, 원전 안전성 문제는 타협할 수 없다. '누구에게 유리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정치가 아니라 과학의 문제다.

대학 교양과정 수준의 과학 실험만 경험했더라도, 자연 현상이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지를 안다.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철저히 통제해도, 실험 결과는 머리로 이해한 개념과 늘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실험자가 상상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다. 또 실험자의 관찰과 측정 역시 온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이른바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 비슷한 맥락이다. 통계학자들은 이런 한계를 보완하는 기법을 고안하고, 과학철학자들은 관찰과 실험, 현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러나 통계학과 철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과학기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은,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게 현대 문명의 한계다. 다만, 폭넓은 참여와 감시, 토론을 통해 이런 불확실성이 거대한 위험으로 번지는 일을 막을 뿐이다. 이는 또 원자력을 포함한 과학기술 문제에 인문·사회과학자를 포함한 다양한 전문가와 시민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오랫동안 원전 안전성 문제를 다뤘던 이들 가운데서, 이 문제를 그저 감정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은 없다. 예컨대 <조선일보>가 혐오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한다면, 원전을 반대하는 이들은 원전 또는 핵물질의 안전성 문제에 입을 다물까. 그렇지 않다. 노무현 정부를 코너로 몰아 넣었던 부안 핵폐기장 사태가 증거다.

"과학자의 결론은 특정 조건 아래서만 진실이다"

물론,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 역시 종종 '과학·공학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원전 안전성이 정치 문제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에 관한 과학적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 전문가의 결론이 어떤 전제 조건 아래서 내려진 것인지는 꼼꼼히 따져 묻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문가의 결론은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진실이다.

1986년 인류를 슬프게 했던 챌린저 호 폭발 사고는 작은 고무부품인 오링(O-ring)의 문제 때문에 생겼다. 당시 추운 날씨로 오링이 탄성을 잃었고, 그 결과 부품 연결 부위로 뜨거운 분사 연기가 새어 나오면서 사고가 터졌다.

문제는, 당시 챌린저 호를 설계하고 발사했던 미항공우주국(NASA, 나사)의 전문가들이 고무 오링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 문제가 '통계적으로 수용 가능한 위험'이라고 봤다. 큰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무시할만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몹시 '주관적'인 것이었다. 나사 바깥의 정책 결정자들은 '수용 가능한 위험'이라는 결론만 접했을 뿐이다. 그게 어떤 전제 조건을 따른 것인지, 전제 조건을 충족한다는 판단에 어느 정도의 주관이 개입돼 있는지에 대해선 정보가 없었다.

인류가 과학기술 문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하나다. 전문가들의 결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언론의 역할이다.

<조선일보>가 발언을 인용하는 전문가들은 원전 사고의 가능성이 '무시할만한 수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이 어떤 전제 조건을 따른 것인지는 검증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론은 물어야 한다. "2011년, 지구상에서 가동 중인 원전의 수는 총 439기. 그리고 지금, 이 가운데 4기(상대적으로 문제가 가벼운 후쿠시마 원전 5, 6호기는 제외한 수치다)에서 사고가 터졌다. '439분의 4'가 과연 무시할 만한 위험인가?",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가 터진 게 1979년. 그 뒤 32년 동안 두 건의 원전 사고가 추가로 터졌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사고가 또 터질 가능성이 과연 무시할 만한 확률인가?"

'실험실 안전'도 보장 못하는 전문가들, '발전소 안전'을 믿어달라고?

어쩌면 <조선일보> 역시 이런 질문을 전문가들에게 던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심해도 좋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남은 질문이 있다. 특히 이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원자핵공학과 교수들을 향한 질문이다.

"'1999년 9월 18일'을 기억하시나요?"

이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에서 대형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실험 중이던 대학원생 3명이 목숨을 잃었다. 돈 잘 벌고 안정적인 직업으로만 쏠리는 요즘 세태와 달리, 어릴 때부터 과학자의 꿈을 키워왔던 젊은이들이었다. 밤 하늘의 별을 사랑해서 천문 관측 동아리 활동에 열정적이던 학생도 있었고, 인류의 미래를 밝힐 에너지원을 찾겠다는 포부로 들떴던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꿈은 한순간에 재로 변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만 보면, 대학 실험실에서 사고, 그것도 학생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연구 목적과 무관하게 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철저히 통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불과 12년 전의 일이다.

물론, 당시 사고는 '핵융합' 실험실에서 터졌고, 원자력 발전소는 '핵분열'로 에너지를 얻는다.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위험한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는 산업시설이다. 대학 실험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며, 교수들의 책상에선 상상하기 힘든 온갖 변수가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대학 실험실의 안전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게 이 나라 과학·공학 전문가들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복잡한 산업시설의 안전성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하나.

"원전은 안전하다"라는 원자핵공학과 교수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김창균 논설위원은 1999년 사고 당시에도 <조선일보> 기자였다. 김 위원이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길 권한다.

▲ 3월 30일자 <조선일보> 김창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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