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개소하자마자 제주도 가시리에 정부 발주 사업인 '신문화공간조성사업'을 시작했는데 도중에 중도하차했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주민들과 담당 서귀포시 공무원들과의 소통이 부족한 탓인지 기본계획을 끝내고 더 이상 우리가 손대는 게 양쪽에 다 안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사업은 처음 일을 같이 시작했던 지금종(문화연대 전 사무처장)이 가시리에 귀촌하여 마을 추진위원회와 같이 일을 잘 끌어가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을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도하고 마을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참고 이야기도 듣고, 틈날 때 마다 마을을 쏘다녔다.
한편으론 학교에 복직해 학생들과 공주 지역사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서울에서는 계속되는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 4대강 운하 반대시위 등 시민사회 대표자격으로도 이일 저일을 감당해야했다.
알게 모르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 작년 11월부터 마을 답사를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을을 답사하고 이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하면서 생기가 돌았다. 프레시안의 배려로 답사 글도 연재를 시작했다.
이 답사의 와중에 내가 유인촌문화부장관을 상대로 낸 해임무효 소송 1심에서 승소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낸 해임효력정지 신청을 법원에서 받아들여 위원장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한 지붕 두 위원장' 사태가 시작된 것이다. 참 끔찍한 일이다. 어떻게 하다 한 기관에 두 수장이 동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언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나의 임시로 만들어진 가(假) 위원장실(위원회에서는 아르코미술관 관장실에 조그만 임시 위원장실을 급하게 만들고 나를 거기다 유폐시키는 작전을 구사했다)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인터뷰하겠다고, 또 격려차 오는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완전히 가상의 연극무대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무리하고 부당한 해임으로 빚어진 이 사태에 대해 책임져야할 유인촌 장관은 끄떡도 없었다.
곧 이은 문화부의 뒤집기(해임효력정지에 대한 문화부의 항소)에서 이쪽이 패소했다. 다시 위원장에서 물러나야했다. 한 달 반 만에 두 위원장 사태가 끝이 난 것이다.
마을 답사로 좀 생기가 돌았는데 두 위원장 사태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변호사들의 코치로 시작한 일이지만 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4월 중순에 다시 공주대학교로 복직했지만 수업 배당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이래선 학교와 학생들에게도 미안했다. 더 이상 학교에 적을 두고 학생들로부터 교수님 소리를 들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정년까지는 아직 일 년 반 정도 남았는데 앞당겨 조기 명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이번 8월 말로 30년 이상 근무했던 학교를 정말 떠났다.
떠날 때 소리 없이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주로 제자들과 학생들이 참석한 퇴임식에서 거룩한(?) 잔소리를 한마디 하고 말았다.
'… 가르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누가 누굴 가르친다는 말인가? 특히 중등 미술교사들인 당신들은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정말 가르칠 자신이 있는가? 미술로 세상을 알게 할 자신이 있는가? 이해시킬 자신이 있는가?
당신들은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이다. 가르치기보다 같이,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
사실 나 자신이 학생들과 졸업생인 제자들에게 큰 소리를 칠만한 자격이 없다. 30년 동안을 근무하면서 '미술교육'엔 별로 학자나 전문가로서 집중해서 연구를 하거나 학생들과 같이 배움의 공동체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래서 퇴임식에서 자백을 했다. '나는 일생 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유달리 미술교육자로서 실패했음을 자인한다.'
30년 동안 근무하면서 나의 주요한 전공분야인 미술교육에 모든 것을 다 받치지 못한 아쉬움도 컸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을 갖고 있던 미술교육 현장에서 무거운 옷을 벗어던진 시원스러움이 더 컸다고 할 것이다.
퇴임 후에 특별히 계획을 세운 것은 없지만 작년부터 시작한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에 주력할 생각이다.
마침 제천 대전리에 '마을 이야기 학교'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여기 대전리 분교는 이미 8월 중에 공주대를 퇴임할 걸 염두에 두고 임대를 한 셈이기도 하다.
금년 6월에는 지자체 선거가 있었다. 사실 마을에 관한 일이란 크게 보면 지역과 관계된 일이다. 마을에 관계된 일이 잘 되려면 당연히 지자체와 네트워킹이 잘 돼야 한다. 자연히 이번 지방선거에 신경이 쓰였고 만족하진 못하드라도 4대강 사업에 올인하려는 MB정부에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선거 국면에 접어들어 나는 진보 정당을 비롯한 기존의 정당들의 지방선거에 임하는 자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기대를 걸고 있던 진보정당들에 대한 실망은 거의 절망에 가까웠다.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대표적 인사들은 거의 전부 서울시장 이나 수도권 광역 시장 아니면 도지사 후보로 나서는 게 아닌가?
왜 다들 그런 폼 나는 자리만 노리는가? 좀 밑에서부터 기겠다는 명망 있는 인사는 왜 없는가?
우리의 정치가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구축이 안 되면 맨날 '그 밥에 그 나물' 아닌가?
야당이나 진보정당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마을 운동 같은 아래서부터의 정치에 관한 나의 의견을 털어 놓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진지하게 듣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한 예술가의 백일몽 정도로 그냥 웃고 지나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좀 흘렀지만 작년 초 <예마네>를 만들고 처음에 꾸었던 꿈, '마을 공화국 연합'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 볼 생각이다. 몇 개의 마을만 이런 타입의 자치 자립의 마을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면 나의 바람은 쉽게 확산될 수 있다고 믿는다.
뭐 흔한 말로 같이 꾸는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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