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나와 마을과의 인연(3-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나와 마을과의 인연(3-1)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 나의 화실이 있는 가평의 두밀리

나는 1999년도에 서울에 있던 화실을 정리하고 가평에 있는 골짜기 마을 두밀리로 화실을 옮겼다. 비록 집을 옮기지는 못했지만 농촌 마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두밀리는 경춘가도 46번 국도에서 가평읍 가기 5Km 전에 왼쪽으로 꺾여 들어가 꾸불꾸불한 계곡을 끼고 6Km 들어가서 나오는 외통마을이다. 큰 개천을 끼고 3번을 휘돌아 들어가는 두밀리 입구는 경관이 그럴듯하다.

마치 강원도의 어느 산골 같아 소설가 故이윤기는 여기를 '강기도(강원도와 경기도의 합성어)' 같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내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니 다들 의아스러워 했다. 왜 충남 공주대와는 반대쪽에 화실을 정했냐고? 이왕이면 공주대 근처 충남이나 경기도 남쪽에 자리 잡지 않느냐고? 할 말이 없다. 원래 그런 계산 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해치우는 성격이니깐.

새로 집지을 생각은 애시 당초 없었고 어느 젊은 부부가 살겠다고 조그만 주택을 지었고 앞터에 눈가림 창고를 흉내만 내느라고(농가주택 준공허가를 받고 허물어 버리려고 한) 교실 한 칸 크기로 지어 놨는데 그게 딱 화실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임시 창고를 보강을 하고 창을 제대로 달고 주택에는 심야전기를 놓고 몇 달 만에 완공을 하고 들어갔다. 방학이나 주말에 들어가 있으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 좋아하는 나는 보란 듯이 지인들을 차례로 불러 잔치를 여러 번 치루었다.

그런데 오는 사람들 마다 한 마디 씩 한다. 냄새가 너무 난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돼지 축사 때문이다. 500두나 기르는데 아무리 톱밥을 깔고 축사를 청소한다고 해도 냄새는 지독했다.

원래 동네 사람들과 소개해준 사람들 말로는 곧 이전하기로 돼 있다는 것이다. 주인만 만나면 언제 축사를 옮기는지를 따지듯이 물었다. 냄새도 냄새지만 여름이 닥치니 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 주인과는 다투기까지 했다.

2, 3년 후 옮기기는 했지만 자기의 생업이라고 강짜를 부리는 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동네 문제를 알아 가면서 차차로 옆집들과도 친해졌다. 이 마을에는 김연이라는 작가도 살고 있고 대부분이 농사를 짓지만 서울에서 귀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두밀리 전체는 4반(4개의 작은 마을)으로 구성 되 도합 100가구가 넘었다. 내가 속한 4반이 제일 마지막 마을이다. 대부분 이장은 이 마을에서 맡는데 아마도 이 마을이 가장 오래된 (원)마을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이 4반에는 김씨네와 신씨네가 작은 씨족을 형성하고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대부분의 조상들(옆집 용국이는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다고 하는데)은 이 산골짜기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고 한다.

두밀리(杜密里)라는 이름도 원래 산림이 빽빽이 우거져 나온 이름이다. 내가 들어오기 10몇 년 전만 하더라도 4반 까지는 차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두밀리 입구에 지금은 연수원으로 쓰고 있는 옛 분교가 있다. 이 분교가 폐쇄 될 당시 주민들이 반대로 몇 년을 끈 사건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보도가 되 나도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물론 여기에 잠시 살았고-지금은 어느 지방대학의 교수로 가 있는 장 아무개 교수가 그 당시 이 사건을 끌고 간 모양이다)

내가 여기를 소개 받을 때 제일 먼저 떠 올린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마을 주민들에게 친근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4반 마을은 마을 회관이 있는 2반(삼거리)으로부터 개천을 따라 2Km 정도 더 올라 가는 데 대부분의 논밭이 이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마을 뒤로는 대금산(해발 700m 정도)과 수리재, 불기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마을 전체가 자궁 속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내가 들어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주민들과는 이래저래 교류를 하고 인사도하고 지내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옆집의 용국이 부부와 제일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들 부부는 내가 아는 최고의 농사꾼이다. 작물은 주로 배 과수원이 주종이고 논 20마지기, 안 심는 작물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다.

농한기에는 용국이 부부와 우리 부부가 술자리와 저녁을 같이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를 통해 마을에 관한 동정이나 여론을 듣는다. 서로 의견이 틀려 나와 용국이가 다툴 때도 있지만 그런대로 나는 그를 최고 농사꾼으로 존중하고 그는 나를 깍듯이 교수님이라고 대한다.

2002년도에 내가 잠시 교환교수로 미국에 몇 개월 나가 있었다. 몇 달 후에 돌아 와 보니 두밀리 입구의 개울을 끼고 감도는 세 개의 산봉우리 중 한 봉우리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싶어 여기 저기 알아 봤다. 어느 전원주택업자가 주택 단지를 만든다고 그 봉우리와 두밀리 마지막 골짜기 위에 또 한 곳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옆집 용국이와 술 한 잔 하면서 따지듯이 물어 봤다. '어이 용국씨. 거 두밀리 사람들은 밸도 없어? 주택단지 만든다면서 여기저기 얼굴에 상처내듯이 몇 만평씩 까발린거 주민들이 가만있남?'

▲ 이웃집 용국이 부부. 그들 부부는 내가 아는 최고의 농사꾼이다.

그런데 용국이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 뭐 관에서 허가받아 했는데 우리가 뭐라고 해요.'

자기 마을의 경관가치를 훼손하는 이런 개발 행위를 관에서 허가 받아서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문제삼아봐야 아무 소득도 없다는 거다.

지금 개울 옆 주택단지 개발지에는 거의 똑 같은 형태의 2층 목조 펜션들이 줄지어 들어 와 완전히 펜션촌을 이루고 있다. 또 한 군데, 우리 4반 위의 중산간을 밀어 붙여 만든 주택단지는 아직까지 집 한 채 들어서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게 방치 돼 있다.

이 마을에는 이런 주택 업자들의 개발 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겪었던 큰 사건 몇 가지를 다음 회에 연재한다.

(☞바로 가기 : 예술과마을네트워크 카페)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