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협상에서는 한국과 EU 양측이 자동차 비관세장벽(NTBs) 협상과 상품 관세 협상에서 진전을 이루기를 기대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핵심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협상이 꾸준히 진척됐다.
이날 오전 8시 30분 가르시아 베르세로 EU 측 협상 수석대표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관세와 비관세가 모두 중요한 쟁점"이라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동차 관련 비관세장벽 철폐 없이 한-EU FTA 타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한수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도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신라호텔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이 (자동차 비관세) 부분에서 해결이 이뤄져야 전체적인 협상이 타결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 것인지 아직까지 방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EU 측은 "한국이 자동차 비관세장벽을 철폐하지 않으면 한-EU FTA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한미 FTA 협상 당시 미국 측이 "한국이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지 않으면 한미 FTA는 없다"고 했던 것과 같다.
비관세장벽(NTBs, Non-Tariff Barriers)이란? A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에 어떤 상품을 수출하려고 할 때는 크게 2가지 장벽에 부닥친다. 하나는 널리 알려진 '관세'이다. A국은 B국이 각 상품별로 매겨놓은 관세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출상품과 관련된 B국의 '비관세장벽'이다. 비관세장벽이란 관세 이외에 A국의 상품 수출에 걸림돌이 되는 B국의 모든 법과 제도와 규범과 관습을 통칭한다. 그것은 B국이 독자적으로 채택한 기술표준일 수도 있고, 원산지 규정일 수도 있으며, 특정 법률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B국 국민들이 어떤 상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소비자 인식', 이를테면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생각도 비관세장벽에 포함된다. 최근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관세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선진국끼리의 통상협정에서는 관세보다는 비관세 장벽을 허무는데 협상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
자동차 비관세 협상 난항…상품 관세 협상에선 한국이 양보할 듯
이번 4차 협상까지 유럽연합(EU) 측이 보인 태도는 "자동차와 의약품, 지적재산권 분야에서는 우리 요구(한미 FTA보다 높은 수준의 요구 또는 아예 다른 요구) 수준에 맞춰, 나머지 다른 분야에서는 최소한 한미 FTA 수준에 맞춰 협상을 타결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특히 난항을 겪고 있는 자동차 비관세장벽 협상에서 EU 측은 유럽경제위원회(UN ECE)의 자동차 기술표준에 맞춰 만들어진 유럽산 자동차를 한국시장에 수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 한국의 독자적인 자동차 기술표준을 버리고 유엔의 기술표준 102개를 모두 수용하라는 기존의 요구에 비해서는 한참 완화된 것이지만, 한국 측은 관계부처 협의 끝에 새 요구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정부가 이 같이 입장을 정리한 데는, 한미 FTA의 자동차 비관세장벽 협상 결과를 놓고 미국의 일부 의원들과 업계가 크게 반발하면서 한미 FTA에 대한 미 의회의 비준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섣불리 EU 측 요구를 수용했다가는 '다된 밥'인 한미 FTA마저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4차 협상에서 자동차 협상과 더불어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상품 분야의 양허(각 상품별 관세 철폐) 협상이었다. 지난 3차 협상에서 EU 측이 '코러스 패리티(KOR-US Parity, 한미 FTA와의 균형)'를 요구하고 한국 측이 이 개념을 원칙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번 4차 협상에서는 한미 FTA가 협상의 준거가 됐기 때문이다.
협상 기간 내내 한국과 EU 양측은 한미 FTA의 품목별 양허 수준을 기준으로 '왜 이 품목은 한미 FTA보다 양허 수준이 낮은지"를 설명하는 지루한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EU 측이 '어쨌든 한미 FTA 수준은 돼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리면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특히, EU 측은 돼지고기 등 민감 핵심품목을 한미 FTA 수준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자동차 관세와 관련해서도 '예외 없는 관세 철폐 요구를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공산품 관세와 관련해서도 한국 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의 요구를 계속했다.
EU 측은 '한국 시장에서 미국산 제품과 경쟁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미국과 EU가 한국과 맺고 있는 경제통상관계의 내용과 깊이가 각각 다른 만큼 협상 내용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국 입장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논리였다.
그러나 결국 상품 관세 협상에서는 한국 측이 먼저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쪽으로 협상이 진전될 전망이다. 김한수 대표는 "EU는 비유하자면 항공모함처럼 큰 배고, 우리 측은 날렵한 구축함"이라며 "27개 국으로 구성된 큰 배가 순식간에 방향 전환을 하거나 뒤로 빼기가 어려운게 한계라면 날렵한 구축함이 손해를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 5차 협상에서는 우리 측이 먼저 양보안을 제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 협상 분야에 짙게 드리운 '한미 FTA' 그림자
이번 협상 기간 동안 '코러스 패리티'가 협상의 주요 기준이 됐던 것은 상품 양허 협상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농업시장 개방 수준과 관련해 EU 측은 한미 FTA 수준을 맞춰달라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했다. 한미 FTA의 농업 분야 협상결과는 '전대미문의 획기적인 개방안'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개방 수준이 높으며, WTO(세계무역협정)상 개방대상이 될 수 없는 쌀만 유일하게 개방대상에서 제외됐다.
의약품 협상에서는 가격결정 측면에서 투명성을 유럽 수준으로 높여달라는 EU 측 요구가 계속됐고, 이번에는 한국 측이 나서서 한미 FTA 수준에 맞추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미 FTA의 의약품 협상 결과 역시 약값을 높여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최악의 협상 결과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서비스 중 법률과 회계와 관련한 협상에서는 EU 측이 한미 FTA 수준만큼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측은 한미 FTA상 법률·회계 시장 개방이 우리 측의 '자발적인 시장개방' 일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 분야의 협상은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 측이 한-EU FTA 협상에서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개성공단산 제품의 한국산 인정'에 대해서, EU 측은 "정치적 문제"라며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김한수 대표는 브리핑에서 "개성공단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EU FTA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협상 꾸준히 진척…'연내타결' 목표도 그대로
이처럼 일견 협상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론'에서는 협상이 상당히 진전되기도 했다. 특히, 전기·전자제품의 자기적합성 선언(별도의 인증절차 없이 제조업자가 안전기준을 충족했다고 선언하면 이를 인정해 주는 것), 대졸 신입생 연수 문제, 통신 서비스 등 난항이 예상됐던 일부 협상 분야에서 한국과 EU 양측이 상당한 의견 접근을 이뤘다.
4차 협상이 종료된 후 한국과 EU 양측은 '연내 협상 타결'이라는 당초 목표를 버리지는 않기로 했다. 김한수 대표는 "(연내 타결이) 지극히 어렵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베르세로 대표도 "현재 협상 속도는 EU가 맺은 어떤 FTA보다 빠르다"면서 "(연내 타결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한미 FTA 협상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도 지난 17일 한 강연에서 "한-EU FTA 4차 협상에서는 대체로 그림이 나오고 있다"면서 "큰 어려움 없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따라서 협상이 내년으로 넘어가더라도 한국과 EU 양측은 가능한 조기에 협상을 타결한다는 목표를 유지하면서빠른 속도로 협상을 진척시킬 것으로 보인다.
당초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5차 협상은 EU 측 사정으로 다음달 19일부터 닷새 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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