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융통화위원으로 임명된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이문열 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모범생 한병태의 실제 모델이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서울에 살다 시골 소읍으로 전학 온 한병태와 학급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반장 엄석대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을 많은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한병태가 전학 온 뒤 겪게 된 것은 '상식의 저항'이었다. 엄석대를 지칭할 때 무언가 대단히 높고 귀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한 아이들의 말투와 그에게 점심시간에 돌아가며 물을 떠다 바치는 것이 그랬다. 반장이 만들어주는 질서가 편했던 담임 선생님의 신임 아래 엄석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약한 아이의 물건을 빼앗았고, 공부 잘하는 아이의 시험지를 바꿔치는 방법으로 '전교 1등'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걸 알면서도 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새 학년에 올라가 엄정한 담임 선생님을 만나자 강고해 보였던 엄석대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북한의 권력세습에는 조롱을 보내면서…
소설가가 이 작품에서 그리려고 했던 것은 "올바르지 못한 세력에 의해 상식적인 판단이나 진실을 보는 눈마저 빼앗겨 버림으로써 그 세력권 안으로 굴복해 들어가는 개인의 모습"이다. 아울러 "올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현실의 이익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모순"(문학평론가 한원균 청주과학대 교수)이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작가의 표현대로 "그런 싸움이야말로 살아가면서 흔히 빠지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에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현대자동차 그룹의 정몽구 회장 부자가 사법처리 위기에 몰리는 것을 보면서 '엄석대의 위기'를 떠올린다면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대차가 겪는 위기의 뿌리인 재벌기업의 세습은 이제 본격적인 '상식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현대차처럼 공개된 거대기업은 더 이상 창업자 일가의 사유물이 아니다. "경영능력이라는 유전자는 없다." 어느 경제학자의 이 말이 맞는다는 것은 2세, 3세로 넘어가다 몰락한 많은 대기업들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북한의 권력세습에는 조롱을 보내면서 지분율 10% 안쪽에 불과한 총수가 주식회사를 2세, 3세에게 넘기는 데 대한 문제의식의 강도는 그만 못했던 게 사실이다.
정 회장 부자가 50억 원을 출자해 물류회사 글로비스를 세운 뒤 계열사의 지원을 몰아줌으로써 대물림의 종자돈을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커져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습이 안 되자 동원한 이런 방법은 '회사기회의 편취'라는 낮선 이름으로 법의 심판을 기다리게 됐다. 현대차나 기아차 공장의 생산직원이 퇴근할 때 자신의 차 트렁크에 타이어 하나를 몰래 싣고 나가다 적발되면 중징계를 받게 되지만, 수많은 주주들의 재산인 회사의 '기회'를 총수 개인회사로 이전하는 이런 행위는 '현란한 재무기법' 정도로 치부돼 왔다.
경제논리의 배후에 있는 큰손 광고주
거기에 더해 현대차는 계열사의 빚 탕감을 위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관계기관에 로비를 한 구태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총수 일가를 감싸는 '경제논리'가 등장해 우리의 상식적 판단에 혼동을 주고 있다. 해외공장 착공식이 줄줄이 연기되고, 딜러 망과 하청업체가 동요하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진입하려는 중요한 시기에 총수에게 불상사가 일어나면 회사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란 논리다.
현대차 그룹이 얼마나 큰 광고주인지 모르지 않는 언론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다. 한 경제신문사 간부는 "요즘은 아침 편집회의에서 산업부장이 '오늘은 현대차 어느 공장 착공식 연기로 가자'고 하면 그걸 키우고 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사실 재벌 총수가 사법처리 위기에 몰릴 때마다 경제논리를 앞세우는 언론의 엄호사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전세계 자동차 업계의 '글로벌 톱5' 에 진입한다는 회사가 한 개인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위기에 처한다는 것은 엄살이 섞인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사장이 잠깐만 자리를 비우면 발주도, 납품도, 수금도 모두 멈추는 양평동의 철공소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아예 '글로벌 톱5' 얘기는 꺼내지도 말았어야 했다. 총수의 사법처리를 막아보려 '들이대는' 회사와 언론의 '경제논리'가 부담스러웠는지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은 "대기업이란 1인회사가 아니지 않느냐?"는 푸념을 하기도 했다.
시장경제를 말하며 경영권 세습하는 이율배반
우리는 총수 일가의 세습이 없어도, 윤리적인 경영을 해도 얼마든지 수익성을 내고 잘되는 기업을 여럿 알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접대와 선물, 경조사비, 기밀비 등을 없애고 사회성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경영을 한 뒤 순이익이 50억 원에서 900억 원으로 18배나 늘었다. 이 회사의 문국현 사장은 "전 세계가 한 시장에서 경쟁하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사회를 향해 투명하고 개방된 경영을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왜곡된 관행에 따라 관에 의해, 때로는 언론에 의해 보호받으며 유지되는 자본과 기업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유한킴벌리의 사례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로부터 이어져 오는 정직과 성실이라는 정신을 투명경영과 신뢰경영으로 발전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유일한 창업주는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공헌과 교육에 쓰이도록 사회에 환원했다. 그와 같은 창업주가 있었고 그의 정신이 기업문화에 체득됐기에 세계적인 다국적 생활용품 기업 p&g가 국내에서 힘을 못 쓰게 만든 전문경영인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차 그룹은 잘 돼야 한다. 한국사람으로서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는 현대차와 기아차를 해외에서 더 자주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자동차의 품질만큼이나 경영도 세련된 글로벌 선두기업이 돼 달라는 게 국민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재계가 입으로는 항상 시장경제를 외치지만 이율배반적이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제 총수는 뭔가 특별하며 그들 일가는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미몽'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bonghyun.lee@reu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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