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다목적 헬기(KMH) 사업이 사실상 한국형헬기프로그램(KHP)으로 이름만 바꾼 채 8일 이해찬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심의를 거쳐 이달 중 노무현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받을 예정이어서 시민단체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사업은 10조원대의 국민 세금이 사용되는 최대 규모의 무기 획득 사업으로 노 대통령 스스로 '정확한 검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참여연대, "참여정부 방산업체 로비에 굴복하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소장 박순성 동국대학교 교수)는 7일 KHP 사업에 대해서 "천문학적인 국민의 세금이 소요되는 사업인 만큼 국민의 합의를 바탕으로 사업을 결정하고 추진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업 추진은 즉각 중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또 "투명한 사업 진행을 위해서는 그 동안 이 사업에 대해서 다각도로 검토했던 한국개발연구원(KDI), 감사원, 한국산업개발연구원, 국방대학교 등의 보고서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며 "현재 감사원 보고서는 목차, 표지, 감사 개요까지 국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공개가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마지막으로 "특히 KHP 사업은 창군 이래 최대 규모의 무기 획득 사업이고 소요 예산도 대폭적으로 증액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무기 획득 구조에서 할 것이 아니라 2006년 1월에 발족하는 방위사업청에서 획득 방안을 별도로 검토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약 1~2년 가량 사업 추진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느나 그 동안 도태 예정인 헬기 대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1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기존에 추진하던 공격형·기동형 헬기를 동시에 개발하는 KMH 사업 대신 기동형 헬기만 우선 개발하는 KHP 사업을 추진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당시 NSC의 재검토는 감사원이 KMH 사업에 대해서 "경제성이 낮다"는 평가를 내린 후, 노무현 대통령의 '검증'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는 "NSC 재검토 과정은 정치적 고려와 방위 산업체의 로비에 굴복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참여연대는 KHP 사업과 관련해 ▲과도한 소요수량 제기 ▲회의적인 시장 여건 ▲낮은 경제적 타당성 ▲산업 유발 효과에 대한 고려 ▲국민 참여 배제한 사업 추진 등 다섯 가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전면 중단을 촉구했다.
이해찬 총리는 8일 항공우주산업개발정책심의회(항우심) 전원회의를 열어 KHP 사업 추진 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다. KHP 사업은 항우심 심의 후 이달 중순 노무현 대통령의 재가를 받게 된다. 참여연대는 7일 항우심 모든 위원에게 KHP 사업 추진의 부당함을 알리는 '부결 촉구 의견서'를 보냈다.
다음은 '부결 촉구 의견서'의 주요 내용 요약.
***거짓말 1 : 헬기 전력 증강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이 보유한 군용 헬기는 6백92대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3백20대의 두 배가 넘고 일본(6백61대), 중국(4백68~4백78대)보다도 많은 수준이다. 현재 헬기 전력이 지나치게 과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더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방부는 현재 운영중인 2백30여대의 교체 대상 헬기(500MD, UH-1H)를 2백45대의 KHP 기동 헬기로 교체할 방침이고, 별도로 2008년부터 수조원의 예산을 더 들여 아파치 급의 대형 공격 헬기도 도입할 계획이다. 이것은 미국이 1980년대 8천여대 수준에서 4천여대 수준으로 헬기를 축소할 예정이라는 것과 크게 비교된다.
헬기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예산이 과도하게 소요되는 것도 문제다. 다수의 교체 대상 헬기(500MD)의 현재 획득 가격은 80만 달러(8억원) 안팎인데 반해 KHP 헬기의 양산 단가는 2백억 수준으로 25배나 더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거짓말 2 : 헬기를 개발해서 수출하면 된다?**
국방부는 2013년까지 해외에서 KHP 헬기 1천5백2대(군용 6백61대, 민수 8백41대)의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일단 헬기를 개발하기만 하면 수출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내외 전문가들은 헬기를 개발해서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심지어 국방부가 헬기 산업 현황과 전망과 관련해 인용하고 하는 '틸 그룹(Teal Group)'은 2004년 6월 "한국과 인도가 국내 개발한 헬리콥터를 지탱해 줄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시장은 거의 없고, 기존에 설립한 회사들에 대항해서 수출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며 "한국과 인도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군용 헬기 산업이 발달돼 있는 영국의 경우에도 1997~1999년 헬기 수출 대수는 연간 10대(세계 헬기 시장의 약 5%)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국내 시장의 사정은 어떨까? KHP 헬기의 주 임무 중량은 1만5천~1만6천 파운드이고 최대 중량은 1만9천2백파운드이다. 1994~2000년까지 민수용 헬기 시장은 전반적으로 74% 가량 증가했으나 최대 중량이 1만9천 파운드급의 헬기의 증가율은 0%이다.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 헬기 시장 역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 3 : 헬기를 국내 개발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
헬기 국내 개발이 '경제적으로 불리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국방부와 산업자원부가 이를 계속 무시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이들은 "계속 국내 개발하면 초기 획득비는 많이 들지만 운영 유지비가 해외에서 구입하는 것에 비해 저렴해서 경제적"이라고 주장해왔다. NSC 역시 "국외 도입할 때는 부품을 해외에서 지속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등 운영유지비가 대폭 상승한다"며 KHP 사업 강행의 중요한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KHP 사업으로 개발되는 기동 헬기의 경우 부품의 약 60% 정도만이 국산이다. 부품 구입에 따른 운영 유지비를 낮추기 위해서는 국산 부품과 관련된 운영 유지비를 외제에 비해 더 저렴하게 지불해야 하는데 국산 부품 생산을 위한 개발비, 인건비, 이윤 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외제에 비해서 현저히 국산 부품 가격을 낮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국산 부품 역시 그 구성품 상당수는 해외에서 구입해야 한다.
개발비용의 증가가 불가피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것은 KHP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국방부조차도 2조~8조원 정도의 추가 비용이 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이는 더욱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로콥터의 '타이거'의 경우 1989년 개발 시작 후 당초 대 당 1천1백만달러(1백10억원)였던 가격이 2천7백만달러(2백70억원)까지 올라갔고, 1983년부터 20년간 80억달러(8조원)를 쏟아 부은 미국의 'RAH-66 코만치' 헬기 프로젝트는 2004년에 아예 폐기됐다.
***거짓말 4 : 헬기를 국내 개발하면 파급 효과가 엄청나다?**
국방부는 설사 KHP 사업이 수출도 어렵고, 경제적 경쟁력도 떨어지더라도 국내의 고용 효과와 산업 유발 효과, 기술 축척 등을 고려할 때 이를 추진할 근거가 충분하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KDI도 "KHP 사업의 파급 효과가 총 13.8조원에 이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산업 유발 효과, 부가 가치 효과, 기술 파급 효과의 경우 계량화가 쉽지 않고, 생략된 부분이 많아 연구자의 주관성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심지어 기획예산처조차도 "투자 결정에서 이런 파급 효과에 대한 분석은 참고 자료 중 하나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번 사업을 총괄하게 될 한국항공우주산업주식회사(KAI)의 경우 세계적인 항공사와 비교했을 때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헬리콥터뿐만 아니라 이미 고정익 항공기, 무인 항공기를 모두 개발·생산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이런 문어발식 개발로 과연 효과적인 기술 축적이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거짓말 5 : 국민의 동의를 얻은 사업이다?**
이번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천문학적인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동의를 얻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논란이 됐던 NSC 재검토 결과도 단 두 장의 보도자료만 제시됐을 뿐 '왜 기동형 헬기를 우선 개발하는 것이 대안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못하고 있다. 공청회 등에서도 국민 참여 통로는 막혀 있었다. 지난 6월 22일 KHP 사업단이 주최한 공개 토론회는 사실상 사업 설명회 자리여서 행정절차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공청회의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정부가 여전히 사업의 조속적인 추진에만 급급한 채 국민들을 들러리 세우고 있다"며 "국방 획득 사업 과정에서 투명성과 시민참여를 높이겠다는 참여정부의 약속도 공언이었음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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