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안전 보장 등 6자회담 복귀를 위한 4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직접 시인했다는 보도가 나와 주목된다.
그러나 미국은 28일(현지시간) <2004 연례 인권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잔인한 정권”이라고 비난, 북핵문제가 더욱 꼬여들어가는 양상이다.
***<교도통신> “김정일, 6자회담 재개 위한 4가지 조건 제시”**
복수의 회담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왕자루이 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6자회담에 복귀하기 위한 사실상의 조건으로 4가지 조건을 미국에 요구했다고 일본 <교도(共同)통신>이 지난달 28일 베이징발로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제시한 조건은 ▲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 ▲ 대등한 자격에서의 협의 약속 ▲ 신뢰할 수 있는 조건 제시 ▲ 북한을 폭정 국가로 규정한 명백한 이유 설명 등으로 “북한의 근본적 우려를 6자회담 재개전에 해소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통신은 덧붙였다.
소식통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3시간40분에 이르는 지난달 21일 회담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1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국가의 하나로 지목했던 것에 반발해 “어쩌겠다는 건지 명백한 설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취임사나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언급을 자제했던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평가를 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이어 미국의 안전보장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며 왕 부장이 6자회담 내에서 미국과의 양자회담이 가능하다고 설득한 데 대해 “지금까지 3차례의 회담에서 미국은 강압적인 태도를 취해 우리와 대등하게 협의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아 이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해 6자회담 지속 자체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통신은 또 ‘대등한 자격’ 요구는 ‘양국간 대화는 하지만 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원칙적 입장에의 불만으로 해석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건 제시’에 대해서는 “김 위원장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계속 요구해온 핵폐기 조치 단계별 에너지 지원 등 대가를 의미하는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통신은 이에 대해 “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미국의 의사 표시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과의 조정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한.미.일 3국은 ‘북한의 관심사는 6자회담에서 다룬다’는 원칙하에 북한에 무조건적인 회담 복귀를 요구하고 있어 중국에 의한 조정은 난항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김 위원장, 처음으로 핵무기 보유 직접 인정하기도 **
김 위원장은 이밖에 이날 왕 부장에게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한 외무성 성명에 대해 “이것은 어제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면서 핵무기 보유를 직접 인정했다고 교도통신이 1일 회담 소식통을 인용해 베이징발로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소식통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핵무기 제조 이유에 대해서는 “미국의 적대시정책 때문에 자위를 위해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구체적인 제조 시기나 수는 언급하지 않았다.
통신은 이와 관련해 “북한은 외무성 성명 이후 미국을 비난하는 논평에서 ‘핵무기 보유’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언급해온 ‘핵 억제력’ ‘물리적 억제력’ 등의 공격적인 표현을 현재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서 “신중하게 대응하려는 의도를 엿보이게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같은 교도통신 보도에 대해 우리 정부 관계자는 "4가지 조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일부 다르다"며 "김정일위원장이 핵 보유를 밝혔다는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미, <2004 연례 인권보고서> 발표. “北, 가장 억압적 잔인한 정권”**
이처럼 북한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강한 불만을 토로한 가운데, 미국은 28일(현지시간) 전세계 1백96개국에 대한 <2004년 연례 인권보고서>를 발표하고 북한을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잔인한 정권 가운데 하나”라고 적시하며 각종 인권 탄압 사례를 거론해 향후 대북관계 경색을 예고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발표한 인권보고서를 통해 “북한은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서기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놓여있는 독재국가이며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사회 가운데 하나”라면서 “15만에서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오지의 정치범 수용소에 갖힌 채 고문과 굶주림, 질병 등으로 숨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또 “북한 인권은 여전히 극단적으로 부실하며 비사법적인 살인, 실종, 법적 근거없는 구금 등 수많은 심각한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면서 “중국으로 넘어온 북한 여성들은 인신매매를 당한다는 보고도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감옥 수용 시설 실태에 대해서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이고 고문은 일반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면서 “임신한 여성 죄수는 강제로 낙태 당하거나 감옥에서 태어난 신생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이밖에도 “북한 국민들은 언론,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박탈된 상태”라면서 “모든 형태의 문화적 언론적 활동은 조선노동당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 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 노동권 등이 제한돼 있다”고 덧붙였다.
폴라 도브리얀스키 국무부 세계문제 담당 차관은 이날 인권보고서를 발표한 뒤 가진 브리핑에서도 “북한 국민들은 압제 체제하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이 압제 정권은 국민들을 위한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적대시하는 통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美 인권보고서, 북핵문제 해결에 어떤 영향 미칠지 우려**
미국의 이같은 인권 보고서 발표로 북핵 문제 해결을 둘러싼 북-미간 갈등이 더욱 첨예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북한 인권법 제정으로 체제위협이 강화되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인권보고서가 나옴으로써 더욱더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의 역대 인권보고서에 대해 “북한의 존엄과 자주권에 대한 용납못할 도전”이라면서 부정적 반응을 보여왔고 부시 정권 들어서는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근본 배경이 체제 전복을 위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또 지난달 10일 외무성 성명에서도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6자회담 무기한 불참과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이번 보고서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평가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북한은 지난해 7월 미 하원에서 북한 인권법이 통과된 뒤 “미국이 핵문제와 인권문제를 대조선 고립 압살정책의 2대 현안으로 삼고 있다”면서 이를 6자회담 참석과 연계, 결국 9월로 예정됐던 4차 6자회담이 무산된 바 있어 이번 보고서도 난국에 빠져있는 차기 6자회담 개최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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