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7일 1965년 6월22일 체결된 ‘한일수교협정’ 문서 가운데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철 5권을 공개, 파문이 일고 있다.
정부는 당시 일본측에 징병.징용 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을 명목으로 보상금을 요구했으면서도 받은 돈 가운데 극히 일부만 개인 보상문제에 사용한 사실이 드러나 정부의 추가보상이 불가피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또한 협상과정에 우리 정부가 먼저 일본에게 개인청구권 소멸을 제안한 사실도 드러나, 한일 수교협정이 ‘졸속, 구걸외교'의 결과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 인명피해 관련 3억6천만 달러 요구. 실제 지급액 25억원 불과 **
이날 공개된 문서 가운데 1963년 작성된 ‘한국의 대일청구권 8개 항목에 대한 양측 입장에 대한 대조표’에 따르면, 정부는 피해 보상금액과 관련 ▲생존자 93만81명에 대해서는 1인당 2백 달러씩 총 1억8천6백만 달러 ▲사망자는 1인당 1천6백50 달러로 총 1억2천8백만 달러 ▲부상자는 1인당 2천 달러 총 5천만 달러 지급을 요구했다.
이러한 보상 규모는 지난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사망자 8천5백52명에 대해 지급된 25억6천5백60만원을 훨씬 초과하는 것으로 당시 정부가 '개인 보상' 명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해석돼 논란이 일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1966년 ‘청구권자금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무상자금 중 민간보상 근거를 마련한 뒤에도 신고 대상에 부상자 및 생존자는 포함시키지 않고 강제징용, 징병자 중 사망자만을 대상으로 인적 보상에 나서 당초 스스로 요구한 내용과도 배치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정부는 당시 보상금 관련 신고를 받으면서 1971년 5월부터 1972년 3월까지 단 10개월간만 신고접수를 받아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에는 또 많은 피해자들이 신문지상에만 공지된 이 내용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25년 이상 지난 사실을 증명할 많은 서류들을 분실한 상태여서 신고건수는 더욱 적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외무부, “정부, 개인 청구권 보유자에게 보상의무 있어”**
특히 문서에는 정부도 '개인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날 공개된 문서 가운데 64년 2월과 5월의 상황을 기록한 ‘속개 제6차 한일회담 청구권 위원회 회의록 및 경제협력 문제’의 청구권협정 체결시 대일민간청구권 문제의 법적 효력에 대한 경제기획원-재무부-외무부간 공문을 보면 정부도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외무부에게 "현재 진행되는 교섭은 민간인 보유 대일 재산청구권의 보상을 전제로 한 것인가 또는 개별적인 보상을 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문의했고, 이에 대해 외무부는 "한일회담 청구권은 정부 당국의 청구권은 물론 국민이 보유하는 개인 청구권도 포함돼 있다“고 답해 개인청구권을 분명히 인정했다.
외무부는 이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개인 청구권도 포함해 해결하는 것이므로 정부는 개인 청구권 보유자에게 보상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으나, 그 이후 보상 과정에서 개인 청구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한-일 개인 청구권 문제 거꾸로. 日 “조사중”vs 韓 “이미 소멸” **
이날 공개된 문서에서는 또 일본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가 오히려 개인 청구권을 부인, 또다른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1965년 4월 이규성 주일 공사는 “현재 일본은 개인관계 청구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사중”이라는 사토 세이지 일본 참사관의 발언에 대해“일단 개인관계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하는 것이 확인됐고 앞으로 문제는 그것을 양국이 각각 국내적으로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남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회담을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개인 청구권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부인했음을 드러낸 것으로, 협상 진행 당시 범국민적으로 제기됐던 ‘졸속-구걸 외교’ 비판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개인 보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정부는 물론 이번 공개로 정부의 보생 책임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나, 그러나 내부적으론 지난해부터 청와대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재정경제부 등 6개 관련부처 차관들로 특별팀을 가동했고, 조만간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대책기획단’을 구성키로 해 개인 보상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의 이러한 활동은 또 국회에 계류돼 있는 ‘태평양전쟁희생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안’과 어떤 식으로든 연계돼 운영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日, 보상금 명목 ‘경제협력’ 고집. 90년대 이후엔 “개인보상 끝나”, 이율배반 **
한편 일본 정부는 보상금 명목에서 ‘청구권’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경제협력자금’이란 내용만 부각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으로 이번 문서에서 드러났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보다는 역사문제를 회피하려는 자세를 끝까지 고집한 것이다.
실제로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1965년 5월 니시야마 일본측 대표는 “결국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는 형식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 대한 우리측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측 김봉은 대표가 “청구권적인 성격이 엄연히 표현돼 있다”고 강변하자 이에 대해 “일본은 한국에 대한 것이 일종의 정치적인 협력이라는 의미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일본의 일방적인 의무에 입각해 제공하는 것으로 되면 곤란하다”며 재차 보상금 지급에 대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 대표단의 오카다도 “순수한 상업 베이스에 의한 것은 아니나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경제협력”이라고 주장, 결국 양측은 이날 회의에서 입장을 좁히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청구권 차원에서의 보상금 성격을 강력 부인했던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90년대 들어 일본을 상대로 개인 보상을 요구하자 그제서야 ‘한일협정으로 개인 보상은 끝난 일’이라는 입장을 보여 논리적 모순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일본은 법률적 책임은 아니더라도 도의적, 인도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고 재협상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청구권 관련 57권 中 5권만 공개**
이날 문서 공개는 지난 2월 13일 서울 행정법원이 일제강점 피해자 99명이 한일협정 관련 57개 문건 공개를 요구하며 외교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5개 문건을 공개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데 따른 것이다.
외교부는 이에 불복해 3월 4일 서울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회의록 공개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이날 공개하게 됐다. 정부는 이와 관련 “국민의 알권리 충족, 정부 행정의 투명성 증대 차원에서 그간 관련국과의 협의를 거쳐 재판의 결과와 관계없이 이들 문서를 적극 공개키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공개된 문서는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주요 협상 경과 등에 관한 보고서, 훈령, 전문, 관계기관간 공문, 한-일간 회의록 등으로서 문서철 5권 총 1천2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다.
이들 5권은 ▲제6차 한일회담(1961.10.20~64.4) 청구권 관계자료(1963년) ▲속개 제6차 한일회담(1964.3.12~64.4) 청구권위원회 회의록 및 경제협력문제(1964년) ▲제7차 한일회담(1964.12.3~65.6.22) 청구권 관계 회의보고 및 훈령(1965년 1권) ▲제7차 한일회담(1964.12.3~65.6.22) 청구권 관계 회의보고 및 훈령(1965년 2권) ▲제7차 한일회담(1964.12.3~5.6.22) 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내용 설명 및 자료 등으로 이뤄져 있다.
한일 회담 전체 의제별 토의 개요는 총 1백61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청구권 관련 57권 이외 기본관계 관련 문서 50권, 재일교포 법적지위 관련 문서 20여권, 어업문제 관련 30여권, 문화재 반환 문제 관련 5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에 따라 한일수교협상의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번에 공개된 5권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 이후 추가 공개가 이뤄질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