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상인 및 시민단체, 야5당 의원들이 21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이들은 가맹 방식의 SSM을 사업조정 대상에 포함하고, WTO 서비스협정 양허안에 포함되지 않는 품목들에 대한 부분적 품목제한을 차선책으로 제시하며 통과를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인태연 전국상인연합회 부위원장은 정운찬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월 중소상인 대표들이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단식 농성을 벌일 때 총리실이 나서서 부처 사이의 이견을 조율해 정부안을 만들겠다고 제안했지만, 최근까지 한·미FTA에 미칠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등의 이유로 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인 부위원장은 "(정 총리의) 저서에서 '우리의 행복은 결코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데 있다'고 말했다"며 "시장의 생태계도 이와 다를 바 없어 상인을 감싸는 유통과 시장이 온존해야 진정한 일자리와 삶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 부위원장은 WTO 규정 위배를 들며 SSM 규제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외교통상부에 대해 "외교적 문제에 이르면 자국민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전문적 식견으로 마찰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국가 공무원의 임무"라며 "정부가 재벌들을 막아주는 방파제같은 논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 총리를 향해 "총리님이 대한민국에 재직하는 이 시간이 부디 상인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따듯한 시절과 역사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수많은 소상인들의 절규를 이제는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다음은 인 부위원장이 정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이다.
< 정운찬 총리님께 드리는 상인 인태연의 글 >
봄이 참으로 더디게 옵니다.
올해 4월은 봄꽃들이 도시와 국토를 물들이지만 나라는 슬프고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상인들의 가슴도 차가운 삭풍 앞에 놓인 가을 낙엽처럼 아슬아슬하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유통재벌들의 시장파괴와 골목까지 휘저으며 우리의 삶터를 할퀴어 대는 기업형 슈퍼마켓의 위력 앞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그저 내 한 몸 열심히 살면 되는 줄 알았던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우리 상인들이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벌어진 대기업과 중소상인들의 사업조정을 통해 그나마 생존의 희망을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은 상생을 위해 중소기업청이 내린 사업 일시정지 권고도 무시하고 거침없이 사업장을 골목시장 안으로 들이밀었습니다. 우리 영세소상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마을과 일터를 지켜내는 싸움을 해왔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나중에는 생존권을 지켜내는 희망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관적입니다. 유통재벌들은 정부기관의 권고마저 무시할 정도로 염치를 잃었습니다. 여당 정치인들은 개별적으로는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을 규제해야 된다고 하면서도 정작 법으로 만들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관료들이 나서서 대기업을 보호하는 설득력 없는 논리를 반복할 뿐입니다.
가장 억울한 점은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승자만을 인정한다'는 삭막한 논리를 정부 관계자가 들먹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승자보다 훨씬 많은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고 지켜줄 수 없다면 그것은 야수들의 법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게다가 짐승들은 배부르면 먹이사냥을 멈추지 않습니까. 그들보다 포악하고 비정한 사회가 어찌 인간들의 사회가 될 수 있습니까?
총리님도 <가슴으로 생각하라>라는 저서에서 "우리의 행복은 결코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조화롭게 더불어 사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이 말씀에 공감하며 그 따뜻함에 감동합니다. 작은 들꽃, 큰 나무 심지어는 보잘 것 없는 잡초까지 어우러져야 비로소 숲이 이루어지듯 우리 사는 세상도 부자와 서민, 강자와 약자 모두가 모여 서로를 유지함으로써 토지와 공기와 하늘이 되는 것이지요.
시장의 생태계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상인의 존재를 감싸는 유통 시장의 생태계가 온존해야 진정한 일자리와 삶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요? 몇 개의 재벌기업이 우리 일자리를 모두 만들어 주는 세상을 우리는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몇몇 재벌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곳이 진정한 삶터일 수 없지 않습니까?
논과 밭을 빼앗아 그곳에서 노동하게 하고, 작물을 조금 나눠 준다한들 농부의 희망이 자랄 수 없듯이 전통시장이 파괴되고 동네 골목길에서 상인들이 쫓겨난 후 그들이 어디로 가서 새로운 일터를 만들고 삶과 희망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미 IMF이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마지막 회생의 몸부림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 이곳 전통시장과 골목시장입니다. 이들이 물러나 갈 곳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총리님! 상인들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입니다. 이런 상인들에게 외교통상부는 외풍까지 일으켜 상인들의 상처를 차갑게 후려칩니다. WTO규정을 들이대며 대형마트 규제를 가장 반대하는 곳이 외교통상부라고 합니다. 정부의 이런 행태는 우리 상인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를 묻게 만듭니다. 외교적 문제에 이르면 자국민인 상인들의 생존과 보호를 원칙으로 하고, 전문적 식견을 동원해 외교적 마찰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국민 앞에서 해야 할 국가공무원의 임무가 아닌가요?
그런데 이들은 차가운 태도로 WTO규정 '위배 가능성'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그들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아니면 그것은 오직 핑계이며, 정부가 재벌들을 막아주는 방파제 같은 논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너무 심한 생각이 아니길 바랍니다.
총리님! 아직도 대형마트규제법은 국회에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본회의장에 얼굴도 못 내민 이 미운 오리새끼 같은 법이 사실은 600만 자영업자들의 운명을 살릴 백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형마트에 의해 죽어나갈 상인들을 보호해줄 마지막 보루가 대형마트규제법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실행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국회와 정치인들은 정부의 의지를 이 법안 통과의 열쇠라고 합니다.
지난 3월 소상인들은 현재의 위기를 견딜 수 없어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대형마트규제법의 통과를 촉구하는 단식농성을 했습니다. 몇 분의 상인이 실신을 하는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자 단식농성장에 총리실 책임자가 찾아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상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내용도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권과 총리실의 방문 그리고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던 상인들은 다시 절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눈물과 한숨이 교차되는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소상인들의 절규를 이제는 부디 외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상인들이 무너진 세상에 쌓아올릴 대한민국의 희망은 없습니다. 상인들의 몰락은 말 그대로 중산층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중산층이 사라진 공간에 채워질 것은 재앙입니다. 그리고 수백, 수천만 가정의 파산이 다가올 미래를 채울 것입니다. 총리님이 대한민국에 재직하는 이 시간이 부디 상인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따뜻한 시절과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4월의 봄꽃들이 우리 상인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가슴까지 따스하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봄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합니다.
2010년 4월 21일 상인 인태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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