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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학살, 통치행위인가 전쟁범죄인가

김재명의 '중동 현지르포' <11> 후세인재판 논쟁점

***후세인 학살, 통치행위인가 전쟁범죄인가**

이라크 사람들은 이발소 같은 곳에 모였다 하면, 후세인 재판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시아파 이슬람 신자들과 쿠르드족 사람들을 비롯, 지난날 후세인 체제 아래서의 억압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후세인의 처형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후세인 체제에 향수를 지닌 수니파 이슬람 신자들은 대체로 그의 처형에 부정적이다. 이라크에서의 후세인 재판 공방은 미국에서 부시 지지냐, 케리 지지냐를 놓고 입씨름하는 수준보다는 거칠다. 때로는 칼부림을 벌이기도 한다.

20세기 들어와 지금껏 전쟁범죄자로 국제법정에 섰던 국가지도자는 모두 세 사람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전시내각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전 르완다 수상 제안 캄반다, 전 유고연방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다. 밀로셰비치는 2002년이래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ICTY) 법정에 서왔고, 1994년 80만의 투치족과 일부 온건 후투족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제안 캄반다는 아프리카 아루샤 르완다전범재판소(ICTR)에서 무기징역을 언도 받고 복역중이다.

여기에 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전범으로 이라크 국내재판을 받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후세인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그들 자신을 ‘전쟁범죄자’라고 여기질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 과정에서 승자든 패자든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승리라는 목표달성을 위해 무차별 살상행위를 벌였는데, 패자만이 법정에 서야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밀로셰비치-후세인 재판의 공통점**

밀로셰비치와 후세인의 차이점이라면, 밀로셰비치는 유엔의 권위 아래 구성된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에서, 후세인은 이라크 유권자들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라크 임시정부의 특별법정에 선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재판 사이엔 공통점이 많다.

첫째, 두 피고인은 1990년대 초 옛소련의 붕괴 뒤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전쟁을 벌이다 쇠고랑을 찬 패전국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미국에 맞서지만 않았다면, 지금 딱딱한 피고석이 아니라 편안한 안락의자에 있을 것이다.

둘째, 두 피고인에 따르는 전쟁범죄 혐의를 받쳐주는 직접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1995년 보스니아 동부지역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어린 소년들을 포함한 무슬림 7,500명이 학살당한 사건도 밀로셰비치가 직접 지시를 내린 증거가 없다. 헤이그 법정의 주임검사 칼라 폰테는 “밀로셰비치가 보스니아, 코소보에서의 학살과 인종청소를 지시했다”는 정황증거만 제시할 뿐,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후세인 재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1988년 이라크 북부마을 할랍자에서 쿠르드족 5,000명을 화학무기로 죽였다고 하지만, 후세인이 지시했다는 증거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라크 집권 바트당 체계상 후세인이 직접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서명을 하는 일이 드물고, 따라서 학살 지시를 담은 서류를 남기지 않은 탓이다.

셋째, 밀로셰비치와 후세인의 기본정서는 “기본적으로 집권기간 중 일어났던 사건들은 통치행위이자, 전쟁행위다. 따라서 전쟁범죄가 아니다”라는 논리 아래 전범혐의를 부인한다. 밀로셰비치는 “내가 전쟁재판을 받는 것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라며 자신이 무죄라 여긴다. 그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클린턴 미 대통령이 코소보 공습이란 전쟁범죄혐의로 법정에 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마디로 밀로세비치는 “헤이그 유고전범 특별법정은 미국과 서방의 정치적 도구”라는 신념을 지녔다. 밀로셰비치처럼 후세인도 이미 지난 7월1일 첫 법정출두에서 후세인은 그런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재판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나치 독일의 2인자로서 비밀경찰(게쉬타포)을 조직했고 공군총사령관 출신인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폈던 주장이다. 교수형을 언도 받은 날 밤(1946년10월15일) 청산칼륨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괴링은 스스로를 전쟁범죄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처칠이나 루즈벨트가 법정에 서야했을 것”이라 믿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전쟁을 지휘했던 도조 히데키도 마찬가지다. 1948년12월 사형집행을 앞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분석해봐도, 도쿄재판은 정치적인 재판이었어. 그것은 오로지 전쟁에서 이긴 자들의 정의였어” 일본 육군의 강경파를 대표하던 그는 1944년까지 3년 동안 일본전시내각의 총리를 지냈다. 1945년9월, 전쟁범죄자로 붙잡히기 직전 그는 “전쟁에서 이긴 자들이 만든 법정엔 서지 않겠다”며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꾀하기도 했다.

민간인들의 손목을 도끼로 잘라 악명을 얻었던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도 스스로를 전쟁범죄자로 여기지 않았다. 필자가 지난 2000년 봄 시에라리온 현지에서 산코를 인터뷰했을 때, 그는 “내 부하들이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살상행위를 벌인 것은 잘못이지만, 그것들은 ‘혁명’의 과정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라 주장했었다. 만약 그가 내전에서 이겼다면, 그는 전범재판은커녕 국가지도자로서 유엔에 출석해 연설을 했을 것이다(산코는 유엔이 후원하는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중 2003년7월 옥중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쟁행위냐, 전쟁범죄냐”**

전범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라 보는 것은 그 역사적 뿌리가 깊다. 플라톤의 대화록 가운데 하나인『공화국』(Republic)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쪽에서나)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여기는 점에선 모두 똑 같다. 다만 승자에게 더 이로울 뿐이다(승자가 정의롭다고 주장할 권리를 갖는다)” 독일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그의 『영구평화론』에서 전쟁과 정의의 냉혹한 성격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법정신에 바탕한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재판이란 없다. 교전 쌍방 어느 쪽도 불의의 군대라고 처음부터 일컬어질 수 없다. 어느 쪽이 정의의 군대였나를 결정하는 것은 전쟁의 승패 여부 그 자체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승국의 정치 지도자나 군부장성이 국제 전범재판소에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 특히 미국이 그러하다. 현실적으로 미국은 전쟁범죄 재판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남아왔다. 독일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벌였던 제2차 세계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당장 21세기에 미국이 벌인 두 전쟁(아프간과 이라크전쟁)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미군의 공습으로 희생당했다. 이는 전쟁범죄를 규정한 1949년 제네바협정의 명백한 위반이다. 2000년9월 인티파다(봉기) 이래로 팔레스타인 주거지를 마구 폭격해대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악명을 얻었던 자가 아르칸(본명은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이다. 그는 극단적인 세르비아민족주의자로, 보스니아내전과 코소보전쟁에서 ‘호랑이’라는 이름의 민병대를 조직해 무차별 살육, 강간, 강도행위를 저질렀다. 헤이그 전범재판소가 체포하려 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미국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베트남, 캄보디아, 파나마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로 기소된다면, 그때 가서 나도 법정에 스스로 걸어가겠다” 아르칸에게서 보듯, 전쟁범죄를 저지른 승자가 재판을 받지 않는 현실은 극악스런 전쟁범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의식을 덜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전범재판은 패자에 대한 징벌”이란 강변을 늘어놓도록 하는 묘한 역기능을 낳는다.

현재 후세인에게 따르는 혐의 가운데는 ▷1990년 쿠웨이트 침공 ▷1991년 걸프전 뒤 이라크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봉기 진압 ▷1980년대 후반기 쿠르드족 학살 등이 포함돼 있다. 후세인은 이런 사건들을 ‘정치적 사건’으로 여길 것이다. 시아파와 쿠르드족 봉기 진압의 경우, 후세인은 “어떤 집권자라도 무장봉기로 체제에 맞서는 세력에 대해선 단호하게 무력 진압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그 봉기들은 미국이 뒤에서 부추긴 것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쿠웨이트 침공의 경우 후세인은 할 말이 없지 않다. 그는 역사적으로 쿠웨이트는 이라크 영토로 여겼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이슬람권 영토를 임의로 나눠 분할지배하면서 생긴 식민지적 유산이 쿠웨이트다. 1990년 쿠웨이트는 후세인의 미움을 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후세인은 석유생산량을 줄여 서방국가들의 오만을 꺾으려 했으나, 쿠웨이트가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 나갔다. 후세인의 시각에서는 친미 종속국가인 쿠웨이트를 손을 봐야 마땅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당시 후세인을 밀었던 레이건 행정부와 시니어 부시 행정부의 대이라크 유화정책도 “설마 미국이 무력 개입하겠나...”며 후세인의 판단을 흐리도록 작용했던 측면이 강하다.

***할랍자 주민 누가 죽였나**

특히 1988년3월 이라크 북부마을 할랍자에서 쿠르드족 5,000명을 화학무기로 죽였다는 혐의는 큰 논란이 예상된다. 미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 정권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명분의 하나로 “자국 국민을 화학무기로 죽였다”(gassing its own people)이란 주장을 펴왔다. 그 근거로 흔히 꼽히는 것이 할랍자 마을사건이다. 쿠르드족 부녀자들과 어린 아기들이 화학무기에 희생돼 쓰러져 있는 사진들은 후세인 정권의 잔인함을 알리는 데 널리 이용돼 왔다. 그러나 한쪽의 ‘진실’은 다른 쪽에겐 ‘의혹’일 수도 있다. 할랍자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죽인 것은 이라크 군이 아니라 이란 군이라는 의혹이다.

지난해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즈음에 띄운 필자의 <뉴욕통신> 제9신(‘부시 전쟁당위론 3가지의 허구’)에서 자세히 밝혔지만,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다시 짧게 정리해본다. 할랍자 사건이 후세인의 범죄사실과는 관련이 없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 해병이 1990년 12월, 걸프전쟁 작전 참고자료로서 작성한 ‘이란-이라크 전쟁의 교훈’이란 제목의 기밀문서(FMFRP 3-203), 다른 하나는 미 국방정보국(DIA) 기밀보고서다. 참고로 미 해병이 작성한 기밀문서의 관련 원문은 다음과 같다(문장 가운데 고딕은 필자의 강조).

Blood agents were allegedly responsible for the most infamous use of chemicals in the war the killing of Kurds at Halabjah. Since the Iraqis have no history of using these two agents-and the Iranians do-we conclude that the Iranians perpetrated this attack. It is also worth noting that lethal concentrations of cyanogen are difficult to obtain over an area target, thus the reports of 5,000 Kurds dead in Halabjah are suspect.
<관련 링크> http://www.fas.org/man/dod-101/ops/war/docs/3203/appb.pdf

이들 자료에 따르면, 이란에 가까운 국경마을인 할랍자에서 이라크-이란 군 사이의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화학무기 독가스에 희생당하는 사건이 터지자,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하던 미국은 DIA 조사요원들을 현지에 보냈다. 조사요원들이 파악한 ‘진실’은 이렇다. 당시 이라크 군은 이란 국경에서 멀지 않은 할랍자 마을이 이란군에 점령되자, 반격에 나섰다. 양쪽 군대는 화학무기를 써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쿠르드족 주민들은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끼여 있다 변을 당했다. 희생자들의 신체상태를 점검한 DIA 요원은 그들이 “청산칼리를 주원료로 한 혈액제재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이란군의 화학무기였다(이라크 군의 화학무기는 혈액제재가 아닌 겨자가스였다).

미 중앙정보국(CIA) 고위 정세분석가이자 미 육군대학의 교수를 지낸 스테판 펠리티르도 지난해 1월말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전쟁범죄인가, 전쟁행위인가’란 글에서 국방정보국 기밀보고서를 바탕으로 강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런 증거자료들에도 불구하고, 미 부시 대통령의 주장에 대한 검증 없이, 미 언론들은 할랍자 사건에 관한 한 판에 박은 듯이 후세인을 비난해왔다.
<관련 링크> http://www.nytimes.com/2003/01/31/opinion/31PELL.html

이라크 현지 취재과정에서 쿠르드 민주당(KDP) 바드다드 지부 부지부장 파라이 알-하이다리만에게 할랍자 사건의 진실을 거듭 물어봤다. 그는 “할랍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났다”고만 답할 뿐 얼버무렸다. 후세인 정권은 1987-8년 사이에 안팔 작전(Anfal campaign)이란 이름 아래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 마을들이 이라크 군의 화학무기 공격을 받았고, 할랍자도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기회있을 때마다 보기로 드는 1988년3월 할랍자 마을 5천명 독가스 학살설은 진실성이 떨어진다. 그 진실은 후세인 재판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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