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들어가려면 성원과 주변의 왕궁을 에워싸고 언덕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성벽 사이의 문을 지나야 한다. 약 800년 전 십자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살라딘(살라훗딘, 1137~1193) 성채다. 십자군을 물리친 이슬람 세계의 영웅 술탄 살라딘은 기독교 군대가 카이로에 진군할 것을 우려해 이 성벽을 올렸다.
"'폭력적인 이슬람교'라고?"
오랜만에 방문한 이곳의 입구를 지나려는 순간 낯익은 한국말이 들린다. "예루살렘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몰아낸 이슬람의 장수 살라딘이 지은 성채입니다. 전쟁을 숭상하는 이곳의 문화를 잘 말해주지요. 예루살렘이 아닌 이곳에까지 이렇게 성벽을 지어 기독교의 전파를 막았습니다. 폭력적인 종교, 이슬람교의 한 단면이지요."
'뭐라고?'라는 말이 나오려다 들어갔다. 성지순례 단체로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온 '무지한' 이집트 내 한국인 가이드의 말이었다.
가이드의 시각과 설명은 '한 손엔 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라는 오래된 기독교계의 대 이슬람 시각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언급한 말로 이슬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문구다.
아퀴나스의 활동 시점은 13세기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패배를 당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서방에서도 이제 이런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철저히 유럽과 기독교 입장에 근거한 시각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가이드는 유럽에서 사라진 이런 관점에서 이슬람을 설명하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십자군 전쟁
십자군 원정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아보자.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200여 년간 벌어진 십자군 원정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 중 하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는 수백만이 넘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유럽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 반감과 증오가 심화됐다는 점이다. 단순한 영토전쟁이 아닌 종교와 문명 간 갈등과 반목을 동반한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파는 아직까지 일반인들의 뇌리에 적잖이 울려 퍼지고 있다. 미국 주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점령을 바라보는 무슬림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떠올린다. 이슬람 과격세력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사마 빈 라덴 등 과격 단체의 지도자들이 성명서마다 언급하는 것이 '십자군 세력'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서양의 군대를 십자군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무슬림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차례에 걸쳐 전쟁을 감행했다.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다. 때문에 이 원정단을 십자군이라고 부르게 됐다. 종교적 상징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이라는 종교적 배경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전쟁의 결정과 진행 과정을 전적으로 좌우한 것은 아니었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했다.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의 동기가 신앙적 열정과 합쳐진 것이다. 현재의 상황도 상당히 유사하다. 중동 학계와 언론은 미국의 경제 및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3대 로비세력, 즉 에너지, 군수 그리고 이스라엘 로비세력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과 점령의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다.
▲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던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훈련중인 미군의 모습. '십자군'의 아이콘과 겹쳐진다. ⓒ연합뉴스 |
'유럽의 사자왕'보다 한 수 위였던 십자군 영웅은?
▲ 술탄 살라딘 |
영국의 왕 리처드는 1190년 프랑스의 필립 2세 그리고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제휴하여 제3차 십자군을 편성해 직접 출정했다. 1191년 리처드는 성지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라딘 군대를 격파하고 3년의 휴전을 맺음으로써 사자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용맹성에 대한 찬사다.
그러나 리처드는 동시에 잔혹성으로도 유명했다. 십자군 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이스라엘 북부 아크레 공방전에서 승리한 리처드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 기독교인 포로들의 석방이나 교환에 이용될 만한 소수의 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포로의 목을 베라는 명령이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왕의 부하들은 2700명의 포로들을 도시 밖으로 끌어내 참수해 버렸다. 무슬림과 이슬람 율법을 유린하겠다는 종교적 광기도 담겨있었다.
이슬람 군대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인들을 '무자비한 하얀 악마들'이라고 부르며 지하드(성전)로 맞섰다. 그러나 살라딘은 리처드 1세와는 대조되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라크 북부에서 태어난 쿠르드족 출신인 그는 삼촌 시르쿠가 지휘하는 이집트 원정대에 참여해 유럽의 십자군 원정대인 프랑크족을 몰아낸다. 그 공적으로 이집트 시아파 파티마왕조의 대재상에 올랐고, 이후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다. 살라딘은 국가 공인종교를 수니파로 바꾸고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한다.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이라크 지역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술탄이라는 칭호도 제국의 통치자가 된 이후에 부여받은 것이다.
그가 통치하던 이슬람 제국의 가장 큰 위협은 단연 십자군이었다. 평화조약 중 예루살렘 인근을 지나는 대상과 순례객을 공격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기독교 군대에 대해 그는 1187년 성전을 선포한다. 기독교 군과 이슬람 군의 최대 격전은 현재 이스라엘 북부 히틴에서 벌어졌다. 이슬람 대군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투에 임해 기독교 군을 격파한다. 3만 여명의 병사가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은 결국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서방의 학자들조차 살라딘을 영웅이자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등장한다. 관용과 용서의 정신이다. 전투가 끝난 뒤 포로로 잡힌 예루살렘 왕에게 그는 직접 물을 따라주며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다.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거점을 둔 기독교 왕국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이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90년 만에 기독교의 수중에 있던 성도를 되찾은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정복자'
▲ 살라딘을 소재로 한 19세기 동판화 |
예루살렘 회복을 외치며 출정한 리처드 1세와의 전투에서도 아량을 잊지 않았다. 전투 중에 리처드가 낙마했을 때 살라딘은 새 말을 보내주었다. 리처드가 고열에 시달렸을 때는 열을 내리기 위해 눈을 선물로 보냈다. 살라딘의 이름이 먼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된 중요한 일화다.
살라딘은 또 청렴한 지도자였다. 다른 권력자들처럼 자신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지도자가 되면서 얻게 된 왕궁의 금은보화 중 자신이 착복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아랍 역사학자들은 기술하고 있다.
전장에서도 승리 후 적의 막사에 나온 풍부한 전리품도 병사들에게만 나누어주었을 뿐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살라딘은 55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전사로서 자신이 들고 다닌 검과 함께 다마스쿠스 요새 안의 정자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고 났을 때 금고 안에는 티루스 디나르 한 잎과 은화 47디나르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기에 어떤 종류의 사유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성문 밖에 운집해 있던 군중은 모두 거리로 나와 대성통곡을 하며 진심으로 그를 애도했다. 그는 백성들의 진정한 애도 속에 죽어간 몇 안 되는 중동의 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살라딘은 백성의 보호자로서 공정하며 인자한 군주였고,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전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간절히 원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문명의 충돌'이라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는 진정한 평화와 관용에 바탕을 둔 상생의 정신을 가르쳐 주는 이슬람의 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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